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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 (고후 11:23-28)
인도네시아 선교현장을 살피는 중에도 내내 아프간에 납치된 우리 형제, 자매들 걱정이 이어졌습니다. 목요일 아침에 도착하자마자 배형규 목사님의 피살 소식를 접하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납치된 남은 22명이 빨리 귀환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했던 오늘의 설교를 급하게 바꿨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회 내외에서 아프칸에 납치된 우리 형제, 자매들에 대한 비난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라도 바른 역사의식으로 바라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거짓된 자들과 자신을 대조시켜가며 바른 믿음에 서도록 고린도교회를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바울사도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교사 바울 사도의 고난과 염려
23-27절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수고를 넘치도록 했지만 옥에 갇히고 수없이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선교여행 중에 바다나 강, 광야 등에서 큰 위험을 만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 의해 위협을 당했습니다. 잠을 잘 수 없는 시간이 많았을 뿐 아니라 목마름과 배고픔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살아가는 바른 길이란 여러 가지 손해 볼 일이 많고 불편한 일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안한 길을 좇느라 주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직 교회를 위한 염려만 했습니다. 자신의 문제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28절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이것이 바울 사도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바울 사도
이렇게 큰 고난을 겪었으나 결국 승리했습니다.
무엇보다 염려, 걱정,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육신의 질병 가운데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12장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어떤 고난도 바울 사도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승리했습니다. 마지막 순교의 피를 제단에 드릴 때까지 그는 시험을 이기고 고난과 모진 박해를 온 몸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그는 디모데후서 4장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확신 속에 주님의 부르심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아프간 사태를 접하면서
이번 사태를 통해 교회의 반성이 필요함을 물론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비난거리는 결코 아니라고 믿습니다. 교회의 무모함에 대해 비난할 사람들이 많은 때에 우리라도 이해하고 이 길이 어떤 것인지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늘 힘들고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도 선교여행을 위해 중국, 몽골, 일본 등을 다녔습니다. 고생입니다. 편안한 잠자리도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전도하면서 모욕감도 느끼고 편치 않은 잠자리며 긴 여행길에 지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섬김은 늘 그렇습니다.
며칠 전에 전화 목소리로 공개된 납치된 임현주 자매 이야기가 알려졌습니다. 그는 신촌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 3년 전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습니다. 3남1녀 중 셋째로,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기에 부모 반대가 심했지만 그는 직장생활로 모아둔 3000만원을 부모님께 드리고 빈손으로 출국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3년째 의료봉사를 해온 현주씨는 지난 6월 처음으로 일시 귀국했었습니다. 양팔이 없는 10대 소년과 치아가 없는 30대 여성과 함께였습니다. 현지에서는 수술이 어려웠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함께 온 것입니다. 현주씨는 후원자를 찾아 이들이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습니다. 오랜만에 귀국한 그는 9월 초까지 한국에 머물 계획이었지만 한민족복지재단 봉사단 20명이 간다는 소식을 듣고 7월 3일 아프가니스탄으로 함께 떠났다가 이번에 납치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삶 자체로 존경스럽습니다.
누가 비난 하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 쉽습니까? 무모하다고 비난하겠습니까? 만일 샘물교회가 아니었다면 단지 시회단체, ngo, 국제기구에서 한 일이라면 이렇게 평가절하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가 미국사람이었다면 미국 언론은 “영웅 만들기”에 힘썼을 것입니다.
우리까지 너무 무모한 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중국에 가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북한 주민에 대한 전도 역시 위험한 일입니다. 북한에서 예수 믿는 것 자체도 위험합니다. 공개처형 당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땅에 빛을 주었던 무모한 봉사자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들어왔던 봉사자들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전쟁 중에도 그랬지만 전후의 고통 중에 있던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생한 분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일어섰습니다.
그 보다 훨씬 일찍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도 생각났습니다.
뛰어난 언어실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목사님의 아들로 얼마든지 편안하게 성공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그가 중국선교사로 들어간 것은 런던의 뉴 칼리지를 졸업하고 결혼한 직후였습니다. 1863년 7월 21일 갓 결혼한 부부가 신혼여행을 외면한 채 중국으로 들어가 조선 선교의 비전을 가꾸게 됩니다. 1864년 3월 선교 여행을 위해 집을 비운 사이 혼자 집에 남아있던 그의 아내는 유산으로 인해 나흘간 병들어 앓다 죽었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은 후 1865년 9월 4일 한문성경을 가지고 작은 배를 타고 조선으로 들어옵니다. 두달 반 동안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에서 그동안 배워온 조선어로 복음을 선하고 성경을 나눠주고 돌아갔던 그는 1866년 조선선교의 열정을 어쩔 수 없어 다시 조선에 들어왔다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했습니다. 무무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죽음은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린 것입니다. 그 열매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병사 박춘권이었고 장대현교회와 사리원교회의 장로로 시무했던 이덕환입니다.
여행 위험지역 아프칸에서의 봉사가 무모한 일로 비난받아야 한다면 토마스 선교사의 시역은 더욱 무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무모한 일을 원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전체적인 한국교회의 해외봉사 활동이 제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선교적 마인드가 축소되는 계기가 된다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위기일 뿐이고 사단의 고도의 전략이 먹혀들어간 것입니다. 사단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선교의 열정이 뜨거운 우리나라를 가장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프간은 누군가 사랑을 안고 가야했던 곳이고 계속 가야할 곳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가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사역이 위축되지 않도록 마음모아 기도해주시고 무사귀환을 위한 우리들의 마음이 더욱 진지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출처/김관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