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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 (요 2:12-25)
메시아의 두 모습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베푸시고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그 후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13, 14절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합니다. 하나님과 교회의 이름을 팔아 일하는 척하면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보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보는 순간 그렇게 겸손하고 온유하고 사랑이 충만하던 예수님이 순간적으로 바뀌셨습니다. 15절과 16절 입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추상같은 호령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분노하는 모습에 아무도 항거하지 못하고 성전 안은 숙연해졌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의 장면이 소개된 바로 다음에 예수님이 화를 내고 채찍을 들고 분노하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왜 기적의 현장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고 야단치고 진노하는 모습이 소개되어 있을까요?
마태나 마가, 누가 복음을 보면 사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체포 당하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한 지 삼 년 만의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앞으로 끌어당겨 소개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메시아의 두 가지 모습, 즉 심판과 채찍, 진노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메시아는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적을 베풀고 격려하십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를 심판하시고, 거짓에 대해 진노하고, 잘못에 대해 채찍질을 합니다. 오늘 이 두 가지 모습을 요한복음에서 동시에 발견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를 덮어두지 않고 죄를 치워줍니다. 진정한 용서는 잘못을 못 본 척 지나치지 않고, 그 사람이 치러야 하는 대가를 대신 치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순교하고 희생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많고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도 한국 사회가 외롭고 쓸쓸한 것은 교회가 순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 이후에 순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미국의 기독교가 허무하고 외롭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내가 값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부모의 가슴이 찢어지는 대가를 치러야 자녀가 용서받습니다. 용서가 그런 것입니다. 사랑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교회
오늘 우리는 이 메시지를 통해서 몇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때는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함께 토론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장면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보면 언제나 성전 중심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은 삶의 구심점이 하나님, 말씀,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께서 교회를 중심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와도 교회를 생각하고, 세상에 아무리 좋고 훌륭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세상의 유명한 사상과 철학이 있어도 말씀을 먼저 생각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에게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거룩과 순결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은 거룩과 순결입니다. 행사를 많이 하는 것, 구제를 많이 하는 것,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깨끗함에 있고, 거룩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장사하는 무리를 보시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오늘날 교회에 오시면 어떤 태도를 취하실까 궁금합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성전에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데 사용할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짐승을 데리고 왔지만 오는 도중에 상처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짐승을 상처나지 않은 것과 교환해서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환전소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하는데 로마 돈은 이방인의 화폐이기 때문에 하나님 집에 돈을 낼 때는 세겔로 바꿔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화폐를 세겔로 바꿔주는 환전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일 자체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환전하는 과정에서 이익이 생겼습니다. 이익이 생기니까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예배를 지배하게 됐고, 성소를 지배하게 됐습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바꿔주는 사람들이 장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점점 심해져 제사장과 짜고 물건을 팔게 됐습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장사에 우선 순위를 두고 신경을 썼습니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이익에 충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좋은 동기, 선한 동기로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다 그것이 이해관계와 맞물리고 이익이 생기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짐승처럼 변하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양과 천사같이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 안에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있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똑같습니다.
교회는 성도의 필요에 의해서 어떨 때는 음식을 팔기도 하고 책이나 CD, 농어촌에 있는 물건을 팔기도 하고 바자회를 하기도 합니다.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동기로 시작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불순한 동기와 결과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물건을 파는 일이나 돈을 주고 받는 일을 할 때는 열 번 스무 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나 원점으로 돌아와 순수한 동기와 깨끗한 양심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예수님을 통해 배웁니다.
태도가 중요하다
세 번째 예수님께 배우는 사실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신중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야단은 치지만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양이나 소나 비둘기를 파는 것 자체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바꿔 예배를 잘 드리도록, 교회 성전세를 내도록 한 그 문제를 가지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에서 장사할 수 있느냐? 물건을 팔 수 있느냐?’를 가지고 문제삼습니다. 그것은 교인의 필요에 의해, 예배의 도움을 위해, 농촌 교회를 돕기 위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일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일을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과 소는 내쫓고 돈 받는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때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람을 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자기의 분노가 지나쳐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도덕적 수치를 주는 일을 쉽게 합니다. 요즘 한국사회는 사실인지 아닌지 규명되기 전에 신문에 내고, 사업을 망하게 하고, 사람을 도덕적으로 파멸로 몰고갑니다. 나중에 사실이 규명되더라도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사람을 파멸시키고 죽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더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예수님은 비둘기장을 열어 비둘기를 날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소와 양은 내쫓으면 잡아올 수 있지만 비둘기는 날아가면 잡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얼마나 신중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의 재산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한 사람의 인격마저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중성입니다.
또 한 가지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했다고 해서 제자들도 같이 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메시지를 주는 일입니다. 그 인격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이것이 부부 생활이나 직장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예수님의 리더십
네 번째 우리가 배우는 것이 17절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것이 영적 영향력입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겸손하고 사랑과 인자가 많았던 예수님의 또다른 모습을 통해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저를 삼켰구나 하는 말씀이 바로 저것이구나’하는 영적 감동을 받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든 사람에게 영적 감동을 주길 바랍니다. 영적인 충격, 감동의 절정은 순교입니다. 순교는 남을 죽일 수 없어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남을 해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대신 고통을 겪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영적 영향력을 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18절에서 우리는 이 사건의 다섯 번째 본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유대인들, 종교 지도자들, 특별히 이해관계에 얽매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돌발적인 태도에 당황했습니다. ‘네가 도대체 누구냐?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우리에게 어떤 표적을 보이겠느냐?’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19절에서 21절까지의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만 이해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왜 당신은 그런 행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아주 재미있는 대답을 하십니다. 무려 46년 동안 지어진 어마어마한 성전,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성전을 가리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십니다. 46년이나 지은 성전을 헐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소린데 예수님은 ‘내가 삼일 동안에 다시 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유대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비유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알아들을 자만 알아듣습니다. 비유는 모든 자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 있는 자만 듣습니다. 여기 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한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예표적으로 말해 주지만 제자들을 포함해 아무도 이 메시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절정입니다.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네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짓겠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21절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저는 여러분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눈이 생기길 바랍니다. 영적인 귀가 생기길 바라고, 복음과 구원의 비밀을 깨닫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망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는 장소였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비밀이 담겨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였고, 우주의 중심이었고, 하나님의 거룩과 순결이 지켜져 있는 장소였습니다. 믿음의 고향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내가 바로 성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네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령의 집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 하나님 집의 본질은 거룩과 순결입니다. 교회가 순결, 거룩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부활입니다.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삼 일만에 이 성전은 회복될 것이다.” 여러분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부활시키셨습니다. 이것을 믿은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거룩과 순결입니다. 예수님같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러분을 가득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