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밖에서 신앙생활 잘하는법  (골로새서 3:22~4:1)


기독교는 원리의 종교임. 원리가 없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며 공허한 메아리임. 골로새서 3장 17절에서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음. 이같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 하나님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중심이 예수그리스도이심.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면 구체적이 되지만 마귀가 역사하면 추상적이 됨.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성령충만한지 여부는 그가 하는 말과 기도가 얼마나 구체적이며 단순한지 보면 알 수 있음.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의 관계는 ①부부간의 관계, ②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③직장에서의 관계가 있음. 오늘은 이 중 마지막으로 직장에서의 관계를 보기로 함. 우리는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음. 그러므로 직장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이 없음. 또한 직장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진정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없음.


Ⅰ.교회와 세상과의 관계
--------------------

22절 말씀에서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하심. “종들아”에서 종이란 servant가 아니며 경제학에서 재화와 용역할 때의 용역도 아님. 대신 slave(노예)의 개념임. 인격이 인정되지 않고 짐승취급받는 노예라는 뜻임.

어떤 부류의 진보적인 청년들은 불합리한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기독교를 믿을 수 없다고 함. 그러나 노예제도의 문제는 유사한 다른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 교회든 국가든 다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 이땅에는 불의한 권력, 노동문제 등 많은 구조악이 존재함. 독재와 불의한 정권 기타 이땅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를 교회가 직접 해결하겠다고 나서면 안됨.

여기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해답을 주고 있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을 예수님은 올무라고 하였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답하셨음. 예수님은 복음증거 하는 것 이외의 것에 집중하게 하는 것을 다 올무라 하였음.

로마서 13장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씀하셨음. 베드로전서 2장 13절에서도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음.

세상사람들은 인종문제와 독점, 인권과 부정에 초점을 맞추지만 성경은 우리가 이런 문제에 집중하고 이런 문제에 부딛치는 것을 올무라 하였음. 대신 교회는 근원적인 것에 집중하여야 하며 세상과 다투는 것에 시간과 정력 낭비해서는 안됨. 교회가 사회의 모든 문제를 처리하려 하는 것은 교회의 오만임.

학교,정부 등 사회의 각 기관도 하나님이 세우신 것임. 그 기관이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함.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복음증거하는 것임. 교회가 다 하겠다고 하던 시대는 중세시대임. 그러나 그때가 가장 썪었을 때였으며 교회가 가장 오만하였을 때였음. 교회의 1차 사명은 본질 붙잡는 것이며 복음 증거하는 것임. 마귀는 사소한 것, 본질적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게 만듬.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일으킨 양대 산맥은 죠지 휫필드와 죤 웨슬레였음. 휫필드는 칼빈주의자로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임. 한편 웨슬레는 알미니안주의자로서 알미니안 즉 감리교는 하나님의 은혜외에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신학임.

그러나 휫필드도 “힘을 다해 충성하라” 즉 노력을 강조하였으며 웨슬레도 하나님의 은혜 무시하지 않았음. 둘다 하나도 틀리지 않음. 단지 강조점이 다를 뿐임.단지 마귀가 서로 치고 받게 만듬. 사소한 문제 때문에 본질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장난임.

교회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고 성질 급한 사람, 확인 않고 말하는 사람임. 큰 것을 볼 줄 알아야 함. 마귀는 근원적인 것 도외시하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게 함. 근원과 본질 그리고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함.

교회는 사회 현상에 대해 알기를 노력하기보다는 예배와 기도, 말씀을 통해 사람을 배출해야 함. 그리고 세상에 내보내야 함.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영국역사를 연구한 결과 영국을 변화시킨 것은 신실하게 예배가 살아서 거기에서 사람 배출하여 사회를 변화시킬 때였다고 말함.

죠지 휫필드는 음란과 범죄와 죄악으로 가득찬 금광마을 브리스톨을 말씀을 통해 변화시켰음. 죤 웨슬레는 뉴캐슬을 변화시켰는데 그 역시 구호와 운동이 아닌 말씀으로 변화시켰음. 그는 다름 아닌 이사야서 53장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며 그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입었음을 선포하였음. 그결과 사람이 변화되고 학교가 세워졌으며 오늘날 가장 대학이 많은 도시로 변화되었음.

영국은 법률에 의해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음. 영국교회는 윌리암 윌로페스라는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그의 40년 의정활동을 통해 노예제도가 폐지되게 되었음. 교회가 직접 나서는 이유는 사람을 안키웠기 때문에 때문임. 사람을 키우면 사회는 변화됨.

교회의 사명은 사람을 키우는 것임. 사람을 키워 그 변화된 사람이 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도록 해야 함.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는 알당구(직접 당구공 맞치는 것) 칠 것 아니라 쿠션당구(당구공을 당구대 옆면을 세번 맞치게 하고 나서 간접적으로 다른 당구공 맞치는 것)를 쳐야 함.

시끄럽다는 것은 능력이 없다는 것임. 교회는 사람 키우고 부양하는 것임. 성실성과 integrity가 있어야 함. 아무리 어렵더라도 제대로 된 사람 양성해야 함. 예배 통해 올바른 사람 하나 키워나가야 함.


Ⅱ.세상에 내보내는 구조가 되어야 함
-------------------------------

보수주의는 근본주의(fundamantalism)와 복음주의(evangelism)가 있음. 이 둘의 차이를 말하면, 근본주의는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며 복음주의는 우리 삶의 목적이 세상에 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함.

어제 예람제가 복음주의(evangelism) 모습을 잘 보여주었음. 보수적 성도의 눈으로 처음 보기에는 밤무대 같은 무대장치와 시끄러운 초반부 노래에 놀라와 했을 것음. 그러나 이같이 불신자의 눈까지 낮아졌다가 서서히 하나님까지로 올라 갔음.복음의 본질을 말하는 메시지로 행사를 끝맺었음.

Chrisrt against culture, 즉 세상은 죄악과 부정으로 가득찬 곳이라고 기독교가 외면하는 적대적인 자세를 보일 때 기독교는 산꼭대기에 올라가게 됨. 대신 Chrisrt above culture, 즉 모든 종류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복할 수 있어야 함.

“강하게 강하게”라고만 주장할 것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함. 교인은 그 자체가 죄가 되는 직업(예: 포주)이 아니면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있음. 주일날 일해야 하는 직업도 괜찮음. 대신 그 안에서 말씀 전하는 자로 서 있어야 함.

다니엘에게 느부가넷살왕은 네가지를 강조하였음. ①바벨론의 세속적인 교육 받을 것 ②공무원직 수행할 것 ③이름을 바꿀 것 ④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먹을 것(우상에게 절하는 것)이었음. 그런데 다니엘은 처음 세가지는 받아들였으나 네번째 명령, 즉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음.

우리는 가장 유교적인 것에 매달려 본질 놓치지 말아야 함. 대신 본질을 붙잡고 Above all powers가 되어야 함.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이세상의 모든 권세를 정복해 나가야 함.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Three Is가 있어야 함. 즉 Identity, Involvement, Influence가 있어야 함.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Identity)하고 세상의 죄악 속에 들어가(Involvement) 영향을 미치는(Influence) 자가 되어야 함. 예배를 통해 영적 충만을 받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아야 함. 그리고 세상에 들어가게 만들어야 함. 이러한 자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 끝

출처/전병욱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