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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 (눅 15:10)
누가복음 15장은 매우 중요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세 가지 비유는 각각 다른 이야기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단일 주제임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무엇 때문에 이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내용은 누구를 지적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선 이 말씀은 유대사회에 종교적 경계선이 되어버린 세리와 죄인으로 지칭되는 한 그룹과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지칭되는 유대 사회의 보편적인 종교인 그룹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종교적 경계선은 당시 유대사회에 가장 깨어지기 어려운 편견을 서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많은 말씀들이 이 두 그룹의 상황을 배경으로 말씀되어졌습니다.
때문에 세 가지 비유에서 나오는 내용은 유대사회가 만들어놓은 종교적 경계선과 편견을 무너뜨리시는 주님의 관심과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 사회 뿐 아니라 오늘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이 어떻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독선을 극복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은 종교적 독선을 극복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독선이란 이기적 종교적 집단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교회도 이기적 종교적 집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목자의 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키고 사는 보편적인 유대인들을 말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이들이 정죄하고 있는 세리나 죄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품에 있는 아홉 드라크마는 역시 스스로 하나님의 품에 있다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있고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그들이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밖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던 맏아들은 보편적인 유대인들을 설명하고 있고 집을 나간 탕자는 말씀에서 떠나 살고 있는 세리 그룹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비유는 잃어버림과 찾음의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림은 아픔이요 고통을 설명하고 있고 찾음은 기쁨이요 감사요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림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픔은 언제나 영혼을 잃어버림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찾음을 통해서 주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찾음을 통해 그 기쁨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잃어보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잃어보면 그것이 가진 가치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에 세 가지 잃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는 양을 잃음이요 둘째는 돈을 잃음이요 셋째는 자식을 잃어버림입니다. 이 세 가지 잃음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떠난 사람을 보는 하나님의 아픔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주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세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없는 샘치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한 사람에 대해서 없는 샘치자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없는 것이 큰 피해가 아닌 경우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른 것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아직 아흔 아홉 마리가 있으니 하는 생각이나 내게는 아홉 개의 돈이 있다는 생각이나 아직 맏아들이 있으니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구조는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숫자의 힘이 존재의 의미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모든 가치를 숫자에 둘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숫자로 계산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절대적인 존재로 나를 생각하십니다.
셋째는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반드시 찾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것이 많아도 잃어버린 것을 대신할 수 없고 아무리 다른 것이 중요해도 잃어버린 것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것으로 대신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것으로 나를 대신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어떤 것으로도 자식을 대신할 수 없듯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그 아들을 보내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포기하실지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 자를 교회가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는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 자를 포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아직도 이 지역의 영혼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구원의 등대로 이 땅위에 있는 것입니다.
2. 주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는 찾음에 적극적인 교회입니다.
여기 세 가지 비유에서 찾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잃은 자를 찾는 세 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는 양을 찾아 나선 목자처럼 찾아 나서는 것이고 둘째는 등불을 켜고 쓸며 부지런히 찾는 것이고 셋째는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주님의 찾음의 방식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양을 찾아 나선 것은 오늘의 전도를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발이 지역을 정하고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오늘도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전도는 누구의 발이든지 그 발은 바로 주님의 발입니다. 바울 사도는 일생을 회고하면서 달려 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한 평생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발자국은 분명히 한 영혼을 찾기 위해서 걸었던 길입니다. 이것보다 귀한 발자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집안에서 불을 켜고 쓸면서 부지런히 찾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도 잃어버린 자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나왔지만 잃어버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까지 나왔지만 하나님 앞에 스스로 숨겨진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삶을 10년 혹은 20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는 바깥에 잃어버린 자도 찾아야 하지만 교회 안에서도 잃어버린 자의 삶을 사는 자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경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다녔지만 주님을 구체적으로 마음에 영접하는 경험이 없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등불을 들고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의 빛 앞으로 나오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자를 찾는 집입니다
그 다음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찾음의 또 한가지 방식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의 방식에 의해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은 평생을 기다리면서 남편을 주님 앞에 세우는 사람이 있고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과 기도로 기다림으로 아들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찾음의 방식이 기다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다림의 장소로 이 땅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3. 주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는 주님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교회입니다.
세 가지 비유에서 결론은 다 잔치하는 것입니다. 양을 찾았다고 그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했습니다. 드라크마를 찾았다고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했습니다. 아들이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했습니다. 기쁨을 벗과 이웃과 함께 공유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는 기쁨의 주제가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의 기쁨을 교회의 기쁨으로 받아져야 합니다. 좋은 가정은 남편의 기쁨이 아내의 기쁨인 가정입니다. 좋지 않는 가정은 남편의 기쁨이 아내의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교회, 동일한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교회가 복이 있습니다. 교회는 기쁨을 공유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출처/조병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