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을 포기하는 교회   (마가복음 2, 13-17)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 1년 365일 새벽기도개근하시는 경건한 장로님이 계시는데, 그 장로님은 새벽기도에 나오실 때 길에 교인들을 만나도 인사를 하지도 않고 인사를 받아도 받지도 않습니다. 인사하지 않은 이유가 참 재밌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경건한 첫 시간인데,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정식으로 문안인사도 드리기 전에,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먼저 인사를 할 수 없다는 경건논리 때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오래 전 여름 장마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그 교회 주변 인근 지하상가가 모두 침수되는 큰 피해가 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침수피해를 입은 상가의 입주자들이 다급하게 교회에 찾아와서 양수기를 좀 빌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의 애타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양수기를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양수기를 빌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들에게 양수기를 빌려주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성물인 양수기’를 교회 울타리 밖으로 절대로 가져갈 수 없다는 그 장로님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한두 가지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생각과 가치관, 신앙을 가진 그 장로님이 그 교회의 정책과 일을 결정하는 중요한 실세였다는 점입니다.
이 장로님이 가지고 있는 그 철저한 하나님 중심 신앙의 신앙, 교회 중심의 신앙의 문제점이 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4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목회하시는 아버지 의 뒤를 따라 목사 된 사람입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도 햇수로 20년이 넘었고, 1989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목사 된 지 15년째 되는 목사입니다. 목사 안 수 받을 때, 하나님께 한 기도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 평생 복음을 선포하는 목사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전부터 제가 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하였던 질문 중 하나는, 그 동안 내가 정말 예수를 제대로 알고 복음적인 삶을 살아왔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가르치고, 선포하는 목사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그 동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예수를 잘 몰랐다는 사실이었고, 최근에 와서 예수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정확하게 그 시기를 말할 수는 없지만, 최근 5-6년 전부터 저는 예수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다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회하면서 다시 만난 그 예수를 가르치고, 선포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집사님이 저희 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초대해 주신 식당에 가서 보니까 꽤 많이 부담스러운 식당이었습니다. 서초동에 있는 ‘용수산’이라는 한식집이었는데, 집사님이 저희부부를 초대하시면서 ‘식당 위치’와 ‘식당전화번호’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주셨지만…. 저는 그 식당의 위치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늦은 시간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집사님의 저녁식사초대 약속을 이야기하면서, “당신, 용수산이라는 식당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저보다 길눈이 더 밝거든요. 그런데, 아내에게 확인차 물었던 그것이 그만 큰 화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당연한 듯이 “그럼, 잘 알지요….” “당신,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작년에 큰 아이를 3년 동안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께 다른 학부모님들과 같이 용수산이라는 한식집에서 대접한 적이 있다는 겁니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니까, 영동대교를 건너면 가까이에 있다는 겁니다. 속으로 “그래?” 하면서, 집사님의 안내와는 좀 다른데…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감히 아내를 의심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거지요. 거기를 너무 잘 안다고 하기에,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는 저를 초대해 주신 집사님이 알려준 정보를 완전히 무시하고, 아내의 말과 정보가 ‘참’(the truth)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도 의심 없이 100% 믿었습니다.

집사님이 식당을 안내하시면서, “목사님, 서초동 대법원이 어디 있는 지 아시지요?” “녜,” “그 대법원 담장을 따라 쭉 오시다 보면, 용수산이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시간은 저녁 6시입니다.” “녜!” 하고 대답까지 분명하게 잘 했는데…. 저는 제 아내 이야기를 듣고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초대하신 집사님을 완전히 의심했습니다. “그 참, 집사님이 왜 그렇게 안내하셨지? 영동대교와 서초동 대법원은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어떻게 그렇게 안내하셨지? 집사님이 뭔가 잘 못 알고 말씀하신 것이 틀림없어!”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초대하신 집사님을 그렇게 100% 무시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결혼해서 한 집에서 17년 같이 산 아내지만 한 번 의심도 안 해보고 그렇게 100% 믿을 수 있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제 스스로에게 많이 놀랐습니다. 아니, 놀란 정도가 아니라, 제 평생에 제 자신에 대해서 가장 크게 놀란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문제는, 약속 한 그 날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영동대교 방향을 목표로 하고 가는 도중에, 아내를 만나서 열심히 가는데, 교통체증이 너무 심해서 혹시 늦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미리 전화라도 드려야지 하고는, 집사님이 가르쳐 주신 용수산 식당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습니다. “제가, 지금 그 식당으로 가기 위해서 강북에서 영동대교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저를 기다리고 계신 분 오셨으면 좀 바꿔 주세요” 했습니다.

그런데, 제 전화를 받던 직원이 이상하다는 투로 “녜?”하고 되물으면서, “여기 오시려면 영동대교가 아니라 반포대교를 건너오셔야 하는데…”하는 겁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직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용수산이라는 식당이 서초동 말고 또 다른 곳에도 있습니까?…” 그 직원의 말을 듣고, 저는 기가 막히고 말았습니다.

“네, 서울에 용수산이라는 한식집이 6곳이나 있습니다” 하는 겁니다.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약속시간에 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했습니다. 가서, 집사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집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집사님 말씀을 듣고 서초동으로 와야 했는데, 17년 동안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고 제 아내 말을 듣고, 영동대교로 가다가 이렇게 늦었습니다. 제 아내 탓도 조금 있지만(사실 속으로는 굉장히 불평했음, 하마터면 부부싸움 할 뻔 했음. 아담의 죄를 범치 않으려고 많이 자제했음), 제 잘 못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 날 식사시간 참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를 초대해 주신 집사님께는 너무 죄송했지만 저는 그날 굉장히 중요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를 전혀 믿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더 중시합니다. 맹목적으로 교회의 전통을 따릅니다. 고착화된 교리를 진리로 믿고 따르기도 합니다. 사회의 인습적인 지혜를 따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라는 종교적인 상황에 오셔서, 유대교의 교리나 가르침을 답습하거나 그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지혜는 인습적인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과 교리, 가르침과는 다른 대안적인 지혜를 가르치셨습니다(마 7, 28-29 산상수훈 마지막 결론에 나오는 무리들의 반응). 유대교에 대하여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믿고 따라야 하는 궁극적인 영원한 길과 진리와 생명을 선포하셨고, 가르치셨고,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나야 하는, 예수는 바로 그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배워야 하고, 그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세속적이지 않았고, 유대 종교적인 인습적 지혜를 너머서는 존재방식,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하는 복음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저와 여러분과 우리 모두가 함께 걸어가야 하는 ‘예수님의 복음의 길’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고 지켰던 “거룩의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두 가지 이야기가 중첩되어 나옵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마태를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제자 부르심의 이야기입니다. 또 한 가지 이야기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후에 일어난 사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야기의 실제 중심 주제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것보다는, 그를 제자로 부르신 후에 세리 마태의 집에서 앉아서 음식을 잡수실 때 일어났던 문제에 있습니다.

세리 마태의 집에서 먹었던 그 식탁에는, 수많은 세리들도 초대되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정죄 받고 버림받은 죄인들도 초대되어, 함께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본,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느냐?” 우리는, 여기서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제기하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문제제기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이 문제를 푸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식탁정결법, 순결법, 거룩의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 법 못지않게, 중요한 법이 있었는데,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식탁정결법’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법이었는가 하면 그들의 율법전통 가운데, 무려 67%의 내용이 ‘식탁교제에 관한 법’입니다. 유대인의 식탁은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하는 정결과 성결과 순결, 거룩함의 자리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엄격하게 구분했습니다. 그들은 치즈버거를 먹지 않습니다. 우유제품인 치즈와 고기를 함께 먹지 않습니다. 우유와 송아지 고기를 함께 먹지 않습니다. 음식만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담는 그릇도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고기를 위한 담는 접시, 사용하는 포크와 나이프와 유제품을 사용하는 것들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유대인이 경영하는 호텔 음식점에서 식사할 때 이방인의 음식 - 김, 고추장, 김치 - 을 그들의 그릇에 담을 수 없다. 만일 그릇에 그 음식을 담은 것이 발각되면, 그 음식과 그릇은 깨뜨려서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그릇만 그런 것 아니고, 설거지하는 싱크대는 물론, 그릇을 넣어두는 장소도 각각 구별되어 있습니다.

음식과 그릇만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식탁은 음식과 그릇의 정결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중요한 정결의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식탁에 함께 앉아서 밥 먹는 사람의 정결입니다.

한 식탁에 함께 앉아서 밥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같이 밥 먹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식탁의 정결을 위하여 세리들, 죄인들, 문둥병자들과 저주 받은 각종 병자들, 신체가 온전치 못한 사람들, 창기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자들이 함께 식사하면 식탁의 거룩함이 깨어진다는 정결법 때문입니다. 그들의 식탁은,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이 명확하고 분명하게 서로 구별되어야 하고 분리되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금기(禁忌)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중요한 유대인의 전통법이 있는 그 식탁에서, 유대인들의 생명과 같은 금기법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그 식탁의 정결법을 어기신 겁니다. 성결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들의 거룩한 전통과 법을 깨뜨리신 겁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 예수님의 식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식탁에서 나타난 복음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배타적인 정결과 순결과 거룩함이 아닙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말하는 정결과 순결, 거룩함의 의미는 철저한 배타성(排他性)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성결과 순결, 순수성, 거룩함은 철저한 동일성(同一性)과 동질성(同質性)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신 자신의 식탁행위말씀’으로 유대인들의 식탁정결법의 배타적인 그 정신과 그 신학이 비복음(非福音)적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와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거룩한 식탁정결법이 가지고 있는 비복음적인 신앙과 신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식탁정결법이 나병환자나 저주 받은 병자들, 세리들과 창기들, 죄인들, 불구자들이 함께 그 식탁에 앉을 수 없다는 배타성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비복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을 무시하는 바로 그 정신 때문입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배타적인 법과 전통, 신앙과 그들의 신학 말입니다(예수님은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훼방 죄를 말씀하시는데, 성령훼방 죄가 무엇이냐 할 때, 그 말씀의 중심 뜻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회복시키고,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의 복음과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거부하고, 그것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하는 것이라고 정죄한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그들의 신학을 말합니다. 막 3, 20-35).

예수님의 밥상은, 당시 유대 사회와 유대종교의 신학과 전통의 울타리가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 병자들, 죄인들, 세리들, 창기들 - 이 함께 앉을 수 있는 혼합성과 다양성이었고, 이질성이었습니다. 배타적인 성결과 순수와 거룩함이 아니라, 수용과 개방과 열림에 의한 온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복음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유대인들의 식탁정결법의 전통과 신앙과 신학의 울타리를 단번에 허무시는 분이셨습니다. 부정함과 정결함의 금기의 경계선을 단번에 훌쩍 뛰어 넘으신 겁니다.

예수님의 이 복음은 결국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세워 놓은 배타적인 기준에 때문에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그 사람,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이웃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가 세워 놓은 배타적인 순수와 정결과 거룩함의 신앙과 신학의 기준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견고하게 둘러쳐 있는 나의 배타적인 거룩함의 기준들이 무너질 때,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앉아 먹고 마시던 예수님의 식탁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내 아들과 딸이,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한 식구가 될 것입니다(마 6, 10).

우리는 오늘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토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1/3밖에 되지 않고 인구도 약 600만 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입니다. 그 작은 나라에 사는 유대인들은 단일 민족이지만, 그렇게 다양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순수성과 동질성을 소원하였던 민족이었지만, 지금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특성을 가진 나라입니다. 수천 년 동안 흩어져 살아온 민족답게, 그들은 세계의 약 130여 개 국가로부터 이민 온 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만도 현재 약 80여 개가 넘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전통과 문화, 각기 다른 정치 이념과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의 국가를 건설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상황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역사적인 산 교훈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봅니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너무나 견고한 ‘나’라는 신앙과 ‘나의’ 신학이라는 울타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는 틈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그 울타를 넘지 못하고, 나도 그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배타적인 나의 신앙과 신학 때문에, 나와 신앙과 신학이 다른 사람들이 살아 갈 수 없고, 회복될 수 없고, 함께 공존하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저는, 저 자신과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복음은, 배타적인 정결, 순결과 거룩함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성과 수용성과 포용성의 온전함이라는 겁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듯이,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그 복음이, 저와 여러분 모두를 함께 살리는 온전한 복음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