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교회 , 좋은 세상. (마 15 : 29 - 39)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까닭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그와 같은 예수님의 사역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이나 신유(神癒)의 은사에만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관심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생길 것을 많이 염려하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 이후 저들을 피하여 숨으셨으며 병자들을 고치신 후에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시면서도 끊임없이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에 대하여 마음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먹지 못해 굶주릴 때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몸이 불편하여 고생할 때 저들 때문에 늘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과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염려하시면서도 끊임없이 병자를 고쳐 주시고 끊임없이 기적을 통해서라도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셨지만 무조건 저들의 편을 들어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의 편이시라고 많이 생각들을 하지만, 그리고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들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병든 약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과 저들의 편을 들어 주시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계십니다.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을 드는 것은 무조건 부자 편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부자 편을 드는 것은 비겁한 일이요, 무조건 가난한 자 편을 드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무조건 작고 약한 자 편을 드는 것은 무조건 크고 강한 자 편을 드는 것과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 작고 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지만 무조건 저들의 편을 들어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저는 성경을 통하여 이와 같은 균형과 절묘한 구별들을 배우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에 하나는 레위기 19장 1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재판 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 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저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치우치지 않으시는 공평함과 균형감각을 배웁니다. 그 하나님의 절묘하신 감각에서 제 목회철학과 신앙윤리가 세워졌습니다. 저는 부함과 세상적인 성공을 제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을 무조건 훌륭함과 거룩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살기 위하여 가난해 지는 것은 거룩하고 훌륭한 일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러나 저는 그 말을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가난해 져야만 한다는 말과는 다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는 무조건 크게 성장하여야만 한다는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장을 무조건 성공으로 보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회는 작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거나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는 식의 말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큰 것이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큰 교회가 아름답다’는 주장과 똑같이 불완전한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개 ‘무조건 큰 것이 아름답다’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경멸하면서도 ‘무조건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편견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관대한 나머지 그것을 훌륭하고 용기 있는 것으로 오해까지 합니다.

저는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교회의 사이즈에 대하여 어떤 인위적인 목표와 목적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크면 큰대로 목회하겠고 작으면 작은 대로 목회하겠습니다. 부하면 부한 대로 목회하겠고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목회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부하게 하시면 ‘깨끗하고 아름다운 부함’이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할 것이며, 하나님이 가난하게 하셔도 그 가난함이 ‘깨끗하고 떳떳하고 아름다운 가난함’이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저는 ‘깨끗하고 떳떳하고 아름다운 가난’을 자신의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다른 사람의 부함에 대하여 시기하지 않고 무조건 미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한 자들에 대한 증오와 시기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함에서 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가난한 사람은 ‘깨끗하고 떳떳하고 아름다운 가난’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부함’을 떳떳한 부와 가난한자와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부릅니다. 부하고 강한 자의 책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을 생각하는데 두 가지 방법과 철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자와 약한 자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하여 부함과 강함을 거부하고 함께 가난한 자와 약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미엔 신부가 나병(한센씨 병)을 앓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병 환자가 된 것과 헨리 나우엔이라고 하는 하버드 교수 출신이 그 모든 자리와 명예를 버리고 장애인 공동체에서 자신의 남은 여생을 헌신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훌륭하고 실제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방법과 철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데 꼭 그와 같은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자와 같은 방법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매우 훌륭하지만 그와 같은 철학은 무조건 강함과 부함을 죄악시하거나 부정시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편견과 오류를 해결할 수 있는 철학이 바로 가진 자 (강하고 부한 자)들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대한 책임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철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자는 함께 가난해지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고 후자는 책임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방법과 철학이 다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기독교는 두 가지 철학과 방법을 다 인정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이미 중대형 교회로 분류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목표로 한 적도 없고 그것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노력한 적도 없었지만 우리 교회는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앞으로 더 성장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과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성장을 부정하거나 죄악시하여 인위적으로 교회를 작은 교회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럴 수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교회를 깨끗하고 떳떳하며 아름다운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과 기도를 할 작정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이미 크고 부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크고 부한 교회가 되었다고 무조건 좋은 교회가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가 되려면 부한 교회의 책임을 (노블리스 오블리제)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책임을 성실히 그리고 겸손히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될 때 비로소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깨끗하고 떳떳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높은 뜻 숭의교회입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나와 있는 ‘높은 뜻’ 높은 곳에 뜻을 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뜻을 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높은 뜻은 영어로 high will 이 아니라 God"s Will 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뜻과 관심은 언제나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무조건 하나님이 저들의 편이라는 말씀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 교회가 높은 뜻 숭의교회가 되려면, 아주 역설적이지만 높은 데 뜻을 두지 말고 낮은 데 뜻을 두어야만 합니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관심과 목적을 두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과 세상에 뜻과 목적을 두고 목회하고 사역하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 이름과 같이 높은 뜻 숭의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역과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이웃 사랑회의 사역과 몽골인들을 위한 사역입니다. 교회가 개척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맞은 첫 성탄절 헌금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쓰기로 결정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웃 사랑회’라는 모임이 생겼습니다. 우리 교회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매달 후원금을 보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생긴 모임이었습니다.

회원들은 우리 교회가 후원금을 보내는 가정들을 일일이 심방하며 밑반찬도 만들어 드리고 외로운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말동무도 해 드리고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교회 사무실로 오게 하여 과외공부를 시키는 등 정말 믿음과 사랑에서 나오는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그 활동 범위와 영역을 넓혀서 서울역과 남산 주위의 쪽방에 사는 분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이웃 사랑회원들의 사역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진정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게 하는 사역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회의 구조적인 가난을 다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하여도 핑계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 그와 같은 사역을 감당할 때 우리 교회가 정말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역 중에 하나는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로 와 있는 몽골인들을 위한 사역입니다. 처음 어린 아이들 몇 명을 교회 사무실로 불러 들여 공부시키는 것으로 시작 된 사역이 일년 사이에 커져서 지금 주일 날 거의 백 명 가까운 몽골인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소외된 백성들 중에 하나인데 그래도 주일 날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진정한 사랑과 섬김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워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저는 너무나 감사하고 좋습니다. 이번 설 명절에도 체육관에서 간단한 운동회와 잔치를 벌이고 텔레비전에서 요리 강습을 하는 분이 직접 음식을 만들고 그 분이 간증까지 하였습니다.

작년 성탄절에도 보니 교인 중에 한 분이 몽골 식구들에게
케이크를 한 상자씩 선물로 드리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케이크도 감사했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지난 일년 동안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한 부서 중에 하나가 저는 몽골인들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과 기도는 저들이 우리 교회에서 자기들끼리 모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차별이 없는 진정한 교인이 되어 저들도 예배의 순서를 담당하고 저들도 교회의 제직이 되어 함께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저들을 단순히 돕고 구제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우리와 똑같은 식구와 교인으로 받아 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몽골인과 우리 한국인이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차별 없이 함께 교회를 섬기고 몽골인 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도 주눅 들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우리 교회를 자신의 교회처럼 편안하게 여기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제 기도의 소원 중에 하나는 우리 교회에 외국인 노동자뿐만 아니라 각종 장애를 가진 분들이 많이 오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예배 때에 청작 장애자들도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시각 장애자들도 함께 예배를 드리고 지체 장애들도 함께 예배들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오세호 장로님 한 분만이 주일날 휠체어 타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지만 머지않은 날에 많은 장애를 가진 분들이 예배당 가득 모여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어른 들 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많이 와서 장애가 없는 우리 아이들과 서로 친구가 되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소원은 요즘 탈북자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탈북자들이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모였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병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장애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고 임재하시는 교회라면 당연하게 그 주위에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 그리고 장애인들과 소외된 사람들이 많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사야 11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아름다운 시적인 예언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좋아하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 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리만 있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 아닙니다. 어린 양만 있는 나라도 하나님 나라 아닙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표범만 사는 나라를 하나님 나라 아닙니다. 어린 염소만 살 수 있는 나라도 하나님 나라 아닙니다.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눕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부자 만 모이는 교회는 좋은 교회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도 건강한 교회 아닙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생각처럼 쉽지는 않지만, 차라리 부자는 부자끼리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 훨씬 더 문제가 없고 편하지만 그래도 그런 교회는 좋은 교회 아닙니다. 힘들어도 함께 모이는 교회가 건강하고 좋은 교회입니다. 부한 사람이라고 가난한 사람들을 깔보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무조건 부한 사람을 미워하지 아니하고 서로 함께 섬기고 사랑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높은 사람들만 편하게 모이는 교회 좋은 교회 아닙니다. 낮은 사람들만 편하게 모이는 교회도 좋은 교회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 좋은 교회 아닙니다. 장애인들만 모이는 교회도 좋은 교회 아닙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건강한 사람 약한 사람, 부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 함께 모여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교회가 진정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에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가난에 처할 줄 아는 당당한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족하며 여유있는 마음을 가지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며 너그럽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기를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중에 부하고 형통한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부하고 형통한 자의 책임을 (nobless oblige) 잘 감당하시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함과 형통에 부끄러움이 없는 떳떳한 분들이 되시기 바라고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사랑으로 가난한자와 연약한 자들을 섬기며 사시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정말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면 가난한 자도 무시당하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들도 더 이상 차별 받지 않고, 장애인들도 장애가 부끄럽지 않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낮은데 뜻을 두고 가난한 자와 외국인 노동자들과 장애인들과 탈북자들을 진정으로 섬기게 되면 우리 교회 안에서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해 지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될 때 우리 하나님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비로소 좋은 교회가 될 것이고,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좋은 교회가 될 때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때문에 세상이 점점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낮은데 마음과 뜻을 둠으로 진정 높은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세상을 밝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일조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와 교인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