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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과 교회 (요 3:3-5)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이고 또 우리 성결교회가 탄생한 기념 주일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뜻이 있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강림을 주제로 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령강림은 인간 편에서 보면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서 죽으십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사역을 마무리 하시고 마침내 승천하십니다.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리고 있다가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며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기도하기 시작한지 열흘 만에 그곳에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날 제자들은 모두 성령에 힘 있게 흠뻑 힘입고 하나님의 영에 강하게 사로잡힘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영적 종교입니다. 불교나 유교는 이성적 종교입니다. 그래서 학문을 연구하고 도리를 깨닫는 종교로 수양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수양종교가 아니고 영적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행동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영이 나의 삶을 주관하고 내 생각과 발걸음을 좌우하십니다. 그렇게 나의 삶을 주도하시도록 맡기고 위탁하고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성령이 주어짐으로서 두 가지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시작이고 또 하나는 능력을 입은 일입니다. 이 땅에 성령이 주어짐으로서 교회가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성령강림하심으로 교회가 주어진 것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탄생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맨 먼저 이 땅에 교회가 주어졌습니다. 행 2장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당부하신 대로 성령을 받기 위해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10일 만에 그곳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그곳에 있던 제자들은 모두 성령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성령에 사로잡힘을 받았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히니까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전하고 고치고 나누고 헌신의 삶을 살고 섬김의 삶을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꾸만 모여들었습니다. 개종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조직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3천, 5천, 수만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나누고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모인 것이 오늘의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꾸만 확산되고 복음이 퍼져가니까 제자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점령되었고 마침내 유다 온 땅이 점령되었습니다. 또 사도바울에 의해서 사마리아가 점령되었고 로마가 점령되었습니다. 아주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기독교의 조직이 얼마나 커졌겠습니까. 조직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타락하고 인간적인 수단이 난무하게 됩니다. 교회조직이 타락하고 부패하고 인간주의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517년 루터에 의해서 교회가 개혁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그 시대 종교인들이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에 변화를 추구하는 개혁파와 변화를 한사코 막으려는 수구파로 나누이게 되었고 그러다 마침내 이 두 파가 분열하게 됩니다. 그래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파가 오늘의 개신교파이고 변화를 한사코 막으려고 몸부림을 쳤던 파가 오늘의 구교입니다.
구교는 오늘의 천주교회입니다.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천주교의 장점은 중앙집권적이라는 것입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이기 때문에 천주교 안에는 파벌이나 교파나 분열이 적습니다. 내적으로는 많은 갈등이 있고 여러 갈래의 파가 있지만 그 안에서 있을 뿐 밖으로는 잘 나타나 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조직이 교황을 중심으로 정치체계화 되어 있기 때문에 겉에서 보면 일사불란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단점은 이렇게 조직화 되다 보니까 신앙이 형식화되고 조직화되고 계급화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생동감이 없고 선교나 구원이나 복음전파 등에는 아주 소극적이고 미약합니다.
그 대신 개신교를 보면 참 열심입니다. 생동감이 있고 선교 열이 뜨겁고 복음적이고 회개와 은혜의 신앙이 강합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무섭게 발전합니다. 그런데 단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개개인의 신앙이 나타나다 보니까 분파가 많고 분열이 많습니다. 이 땅의 기독교에 교파가 많은 것은 바로 이점 때문입니다.
1517년 종교개혁을 하면서 틀에 매여 있던 신앙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평신도는 성경도 읽지 못하게 하던 것을 성경을 번역해서 모두가 자유하게 읽도록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앙이 개인적인 차이와 특성에 따라 동류끼리 모이다 보니까 그 모임이 마침내 교파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의 신학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마침내는 오늘의 장로교파를 만들었고 웨슬레의 신학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오늘의 감리교파를 만들었고 루터 신학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마침내 루터교파를 만들었습니다. 윌리암 부스를 중심으로 구세군이라는 교파가 만들어졌고 세례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 오늘의 침례교파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땅에 많은 교파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성결교회
그러면 성결교회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는가를 보겠습니다. 19세기말 시카고를 중심으로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무디 열풍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시카고에 1886년도에 무디 신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그 후에 신학교는 2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그 2만 명 가운데 15,000명이 선교사로 전 세계에 파송되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카우만이라는 젊은이는 당시 전기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마침내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전도했고 그의 동료 길보른 이라는 젊은이에게도 전도해서 마침내 이 세 명이 함께 무디신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 3인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선교사의 꿈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과 함께 이 3인은 맨손으로 1901년 일본으로 건너와 선교를 하다가 동경에 성서학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그때 한국의 정빈, 김상준이라는 젊은이 두 사람이 그 성서학원에 유학을 하게 되었고 공부를 마치고 1907도에 귀국해서 전도하여 결신자를 장로교와 감리교회로 보내다가 결신자가 많아짐에 따라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의 성결교회의 시작이 된 역사입니다.
그때 우리 성결교회가 강조한 신학이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신학을 사중복음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결국 성결교회의 신앙의 주체가 되는 신학이 됩니다.
중 생
중생은 성결, 신유, 재림의 첫 수순입니다. 신앙의 가장 첫 순서는 중생입니다. 중생이라는 말은 거듭난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되는 영적 체험을 말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기로 작정하면서 주어지는 영적 은혜입음, 영적체험, 영적 깨달음입니다. 그 결과 내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그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영에 소속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본문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께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중생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중생입니다. 중생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공부를 하게 되면 지성적으로 거듭나듯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알게 되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으면 내가 영적으로 새로운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체험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어서 마침내 나는 영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단계입니다. 신앙인은 반드시 이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성 결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영적 능력을 입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서 거룩하여지는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내안에 잃어버렸던 거룩함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거룩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함께 거닐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거룩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함으로 모든 인간은 이 거룩함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속에는 더러워진 아담의 타락한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 상태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알고 믿음으로 그 옛날에 주어졌던 내안의 거룩함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결의 은혜입니다.
기독교의 최대의 목적은 우리 조상의 죄로 잃어버린 하나님이 부여하셨던 거룩함을 되찾는 일입니다. 그래야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 상태가 거룩한 상태 즉 성결한 상태입니다. 이 성결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성결은 매일같이 오랜 세월동안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성숙해져갑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매일 눈과 귀로 세상적인 소리를 듣고 살아갑니다.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타락하게 하고 부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사모하며 살아야 나를 깨우치고 절제시키고 타락을 방지하게 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마침내 나의 미력한 성결의 내용을 성숙시키고 키워가는 것입니다.
신 유
신유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로 병을 고치는 삶을 말합니다. 신유는 두 가지 종류의 신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중병으로부터 고침 받는 은혜입니다. 신약시대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중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유입니다. 우리는 이 신유의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중병에 걸리면 먼저 기도를 받고 신유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또 하나의 신유는 병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신유는 반드시 병난 후에 고침 받는 것만 아니고 병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신유의 삶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모두 이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신유의 은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부지런히 우리들 마음과 몸속에서 치유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유가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때로 육신의 질병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이 신유의 은혜를 사모하며 먼저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시고 의사의 손을 통해서 실 수 없이 잘 치료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고치시는 손은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계십니다. 지금도 내 몸 안에서 무슨 병이 고침 받고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병난 후 고침 받는 것만이 신유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큰 신유의 은혜는 병나지 않게 사전에 치유 받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더 큰 신유의 은혜의 삶입니다.
재 림
이 재림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반드시 다시 오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이 재림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마지막의 때입니다. 그 마지막 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분명 이 세상을 심판하려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성결교단이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이 재림교리 때문입니다. 장차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을 믿고 그 어려운 시절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해 오시면 일본의 천황도 심판하실 것을 기도했고 설교했고 강조했고 외쳤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그냥 놔두었겠습니까. 그래서 마침내 일본은 한국의 성결교회를 폐쇄했고 해산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이 성결교회가 강조해온 4중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4중 복음은 성결교회만의 신학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 4가지 신학을 가지게 되면 신앙에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신앙은 얼마든지 이론화 될 수 있습니다. 이 이론화를 막으려면 분명한 중생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중생은 영적 체험입니다. 이 영적 체험이 신앙의 이론화를 막아줍니다. 또 성결은 구체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신비주의를 막아줍니다. 또한 신유는 성령의 임재를 확인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재림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현재의 삶을 엄숙하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일본의 사상가 내촌감삼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한창 군국주의가 열풍을 일으킬 때 동경고보 교사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본의 경축식 날 당당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언론과 학교로부터 매국노라고 매도를 당하며 마침내 사임압력을 받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맨하탄에서 초라하게 음식점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기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왜 이 초라함을 자초했습니까”. 그때 내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명예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여렸을 때 교회에서 장차 예수님은 세상에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믿습니다. 나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떳떳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나의 신앙중심입니다“. 이것이 재림신앙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신앙이 경건하고 자신 관리에 철저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이 4중 복음은 신앙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는 신학인 것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