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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관계 (마 06:09-1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는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무서운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은 분명히 질병에서 나음을 입은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대답할 것이고 사업이 위기에서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면 그는 사업이 회복된 것을 가장 큰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경험되는 것을 가장 큰 은혜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도 귀한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은혜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업에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를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 가운데서 건짐을 받고서 건강관리를 잘못함으로 다시 질병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육체의 도구로 사용하다가 넘어지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받은 은혜 가운데 무엇이 가장 큰 은혜인가 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받은 가장 귀한 은혜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사람에게서도 얻을 수 있는 은혜이지만 자녀가 된 은혜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부모 없는 고아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 이웃에 아주 인자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이에게 때로 돈을 주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이 은혜를 나중에 값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아플 때에 병원에 데려가서 고쳐 주었습니다. 아이는 나중에 이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다른 사람이 해 줄 수도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관계는 여전히 남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이를 자신의 자녀로 삼았다면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자녀가 되면 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삼을 때에 아버지의 것과 자신의 것에 경계가 없어지게 됩니다. 자녀가 되는 것은 지금까지 그 자신이 받았던 모든 은혜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받았던 모든 사랑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큰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와 타인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누리는 것 가운데 가장 귀한 은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되면 그 전과 달라진 것이 부모에게 당당하게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집과 자녀의 차이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아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기도는 아들만이 가지는 특권의 세계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는 내용들을 보면 기도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기도는 아들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기도 역시 우리의 어떤 공로를 전제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주 예수님 안에서 인생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게 됨을 말씀인 것입니다. 자녀의 권세는 아버지의 것과 자신의 것에 대한 경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버지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때로 부모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면 맡겨 놓았느냐 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라는 믿음이 자식에게 있기 때문에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친구를 집으로 데려올 때 친구들에게 우리 집에 가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 집으로 가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집은 자기 집이 아닙니다. 아버지 집입니다. 그 집을 짓는데 도움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 집의 등기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그 집의 세금도 아버지가 냅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것이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 자기 것을 내 놓으라고 하듯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은행에 돈을 맡겨 놓고 다시 찾는 것보다 더 당당하게 내어놓으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의 마음입니다. 기도할 때 바로 이 자녀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음식을 달라고 할 때에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당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깊지 못하면 하나님께 구하는 일이 서먹하게 됩니다.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하기보다는 염려하게 되고 기도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씨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네 가지 밭이 나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밭이 무엇입니까 염려와 재리의 유혹 때문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 자라고 했습니다. 왜 염려 때문에 결실치 못하는 것입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녀의 또 한 가지 특권은 자녀라는 관계 이외에 다른 어떤 조건도 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가 되기 위해서 아이큐가 얼마가 되어야 한다든지 얼굴이 어느 정도 생겨야 된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할 때 성도는 자녀로써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전혀 의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리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들이신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아들의 신분을 우리에게 주시고 자신은 우리의 신분이 죄인의 몸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바로 아들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의 생명을 버리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는 다릅니다. 주님은 자신을 버리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죽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대속의 교리는 기독교 복음에 나타나는 가장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고 했습니다.
성도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이 성공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 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허나 진정한 행복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태도는 말씀과 기도의 삶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자녀의 삶은 염려와 걱정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와 원망에 명분을 가지려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 가운데 가장 교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출처/조병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