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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기쁘게, 즐겁게, 웃으며 살아야지! (합3:16-19)
인생은 기쁨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지장이 없는‘상대 조건’이 있는 반면, 없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기쁨이 바로 이 없어서는 살 수가 없는 필수 조건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기쁨이 있는 곳에서 보람과 긍지와 삶의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아무런 기쁨도 찾을 수 없게 돼면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하다못해 먹는대서라도 기쁨을 찾아야 사람은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70년대 초에‘스마일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스마일 빼지를 달게 하고, 서로 마주보고 웃는 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귀찮기만 했던 스마일 운동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꼭 필요했던 운동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임진왜란과 일제36년의 수탈, 6,26전쟁과 국토분단으로 근대 역사 속에서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국민 모두가 지금처럼 이렇게 밝은 웃음으로 살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입니다.
인생살이에 기쁨과 웃음과 즐거움은 꼭 있어야할 필수 조건입니다. 기쁨은 삶의 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속담에는 웃음과 관계되는 것이 많습니다.“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쁨은 인생을 복되게 바꾸어 준다는 뜻입니다.“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는 속담도 있습니다. 웃음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일소일소”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번 웃으면 그만큼 젊어진다는 말인데, 웃음이 우리를 젊게 할 만큼 삶의 활력소가 된다는 뜻입니다.
육체의 질병까지도 기쁨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잘 웃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찾는 사람은 병에 걸리지도 않지만, 쉽지 않은 병에 걸렸어도 그 회복이 빠르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증명이 되어있습니다. 기쁨은 우리에게 이렇듯이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어떤 기쁨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여러 가지입니다, 먹는데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이 있고, 또 소유하는데서, 또는 어떤 일을 성취하는데서, 또는 놀고 즐기는데서 얻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시간이 흘러가면 소멸되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리는,
첫째,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은 때가 되면 소멸되는 기쁨입니다.
음식물, 즉 식료품에는 반드시 유통기한이 적혀있습니다. 이 날 자를 잘 보고 물건을 사야합니다.‘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은 그 기한이 지나면 변질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그 무엇이 주는 기쁨이든, 시간이 흘러 정한 기한이 오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기뻐했던 만큼 공허해지게 만드는 것이 세상이 주는 기쁨입니다.
때문에 지나놓고 보면 순식간이요, 끝이 꼭 오고야마는 것이 세상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잠14:13)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웃음 속에 슬픔이 배어있고, 즐거움의 바로 뒤를 붙들고 근심이 뒤따르는 것이 세상이 주는 기쁨이요 즐거움이란 말입니다. 정말로 잠깐이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변질이 잘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쁨을 하나 찾으면 그 기쁨이 어떠한 것이든지 현 상태로만 잘 유지하면 그 기쁨이 행복으로 연결되어 영원한 것 같은 착각에 도취되어 살아갑니다. 다시는 슬픔이 오지 않을 것 같고, 근심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충고하고 싶습니다. 깨어나십시오, 착각에서 깨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 생활 속에 한껏 기대를 걸고 살아갑니다.‘이번 계획대로만 된다면, 요번에 이 건이 성공만 하면, 저 사람과 결혼만 하면, 자식들이 공부만 잘하면....’문제가 하나도 없을 것 같고, 끝없이 행복할 것만 같은 것입니다.
*이솝이야기에 “꿈꾸는 총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시골 총각이 장에서 계란 한 꾸러미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면서 앞으로의 꿈을 꾸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좀 심합니다.
‘이 계란 한 꾸러미를 잘 부화시켜서 병아리를 잘 키우면 어미 닭이 되겠지요? 그러면 그 닭을 팔아서 암퇘지새끼를 한 마리 사자, 그 돼지를 잘 키워 새끼를 내서 또 키우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돼지들이 잘 컸을 때 그것들을 팔아서 이번에는 암소를 사는 거야, 그리고 또 그 송아지를 낳고, 낳고 또 낳으면 그것을 키워서 부자가 돼야지, 그리고 부자가 되면 이웃집 순이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아주 행복하게 살아야지.’그런데 그 상상 속에서 너무도 행복했던 이 순박한 청년이 지그시 눈을 감고 감상을 하며 발을 옮기는 순간 돌부리에 넘어져 계란 한 꾸러미가 박살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꿈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니라고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키우는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기만 하면, 포도나무에 열매가 탐스럽기만 하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풍성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 꼭 될 것만 같습니다. 밭에 식물이 가득하고, 우리에 양이 가득하고, 외양간에 소가 가득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편이 아닐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하박국서’는 유다가 패망하기 약 25년 전에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과 대화한 내용과 하박국의 신앙고백이 기록된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서운 갈대아 사람들을 채찍으로 들어 유다를 치시겠다는 예언을 주시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1:6절 이하를 보면 유다를 치러올 갈대아 사람들이 얼마나 흉악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사납고 성급한 백성들이고, 두렵고 무서우며,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마치 식물을 움키려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다’(6-8)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역사의 기록을 보면 이 갈대아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끝까지 저항하다가 잡히는 포로들은 본보기로 산채로 말뚝을 항문으로 박아서 입으로 나오게 하여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본문의 이스라엘의 떨림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본문16절 말씀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그리고 17절부터는‘완전히 화패해진 자신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화가 나무는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는 소출이 없고, 밭에 나가 봐도 식물이 없고, 우리엔 양 한 마리 없고, 외양간에도 소 한 마리도 없습니다. 다 끝장난 세상입니다. 이젠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삶이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주는 기쁨은 이런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할 때가 없었겠습니까?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 열매가 풍성한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밭에 나가면 푸릇한 채소가 가득할 때도 있었을 것이고, 우리와 외양간에 양고 소가 꽉 들어찼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한 번 불면 이런 만족과 기쁨은 봄바람에 눈 녹아내리듯이 온데간데없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가 되면 들리는 것은 대적의 치러 올라오는 소리요, 남은 것은 뼈가 썩는 떨림뿐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니 우리는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닌 참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 기쁨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까?
둘째, 참 기쁨은 영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살전 5:16절에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항상 기뻐하라”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보다 더 우스운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기쁨이라는 것은 기뻐하려고 해서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는 것이 어디 억지로 되느냐 말입니다. 기뻐할 만한 조건이 있어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까?
거기다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항상”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가 있습니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들을 만나고, 그에 따라 또 수십 번씩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변화 속에는 기분이 나쁠 때도 있고, 울적할 때도 있으며, 외로울 때도 있고 마음이 상해있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까?
바로 여기에 우리의 영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저절로 왔다가 저절로 나가버리고 말지만, 영적인 기쁨, 변치 않는 기쁨, 참된 기쁨은‘나의 신앙의지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기쁨을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주안에서 순전하고 완전한 기쁨, 세상이 감히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는 그 기쁨을 내가 믿음으로 갖고 영적으로 선택할 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지금 눈에 보이는 처참한 상황과는 전혀 별개의 기쁨입니다.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떨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의지로 하나님의 기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갈대아 사람의 쳐들어오는 소식과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힘겨운 상황에 뒤이어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합3:18-19)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다 무너졌어도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겠다는 겁니다. 다 빼앗겼어도 자기는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답니다. 정말 담대한 영적인 선택입니다. 참된 기쁨은 영적으로 선택하여 얻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영적으로 기쁨을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길 능력을 주십니다.
고후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어려웠던 복음의 행로를 고백합니다.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는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이나 배가 파선하여 물고기 밥이 될 번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까지, 열거하려면 다 이야기 할 수 없고,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었다’며 마무리를 합니다. (고후11:23-27).
그런데 그 이후의 바울의 고백에 우리는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 심한 고난과 아픔과 역경들을 바울은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고후12:10)“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라”왜냐하면“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고후12:10상).
약하면 약한 것이지 어떻게 약할 때가 강한 것입니까? 큰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약해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위를 바라보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곤란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능욕과 곤란을 오히려 기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약할 때가 바로 강할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12:9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기쁨은 세상을 이기는 기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통이나 질병 때문에 없어질 수 없는, 오히려 세상의 고통과 질병을 잠재울 수 있는 그런 기쁨입니다.
슬픔이나 삶의 쓰라림이 반 갈라 가져갈 수 없는,오히려 우리의 인생을 성숙케 하는 그런 기쁨입니다. 궁핍이나 실패가 간섭할 수 없는, 오히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그런 기쁨인 것입니다.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이 영적인 기쁨을 선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런 성도 안에 우리 하나님께서 강한 능력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