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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의 믿음 일자 (창4:1-7)
지구종말시계’(Doomsday Clock)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 시카고에 있는 시카고대학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시계가 만들어진 배경은 제2차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5년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한 과학자들은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자신들을 ‘인류의 파괴자요 죽음의 신’이라고 자책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전쟁이 끝난 1947년에 원자력과학자협회를 만들어 ‘불리틴’이란 잡지를 내기 시작했고, 이 잡지의 표지에 ‘운명의 날 시계’, 이른바 ‘핵 시계’를 처음 공포했습니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자정에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맨 처음 자정 7분전에서 시작한 이 시계는 그 동안 모두 17차례 수정이 되었습니다. 자정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던 때는 1953년으로서 11시 58분이었습니다. 소련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미국과 소련이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했을 때였습니다. 그러다가 소련의 해체와 독일의 통일로 냉전 질서가 급격히 무너졌을 땐 자정 10분전까지 물러났고,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 감축에 합의했을 때는 17분전까지 후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911 사태가 발생했던 2002년에는 자정 7분전까지 접근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금년 1월 17일에 2분 앞당겨져서 지금 지구종말의 시계는 자정 5분전으로 다가갔습니다. 북한의 핵실험, 이란의 핵 개발, 미국과 러시아 등이 보유한 2만 6천 개의 핵무기, 핵 안전관리의 미비 등으로 시계를 2분 앞당긴 것입니다. 아울러 이제는 핵무기만이 아니라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인류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종말이 가까이 오면 여러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믿음이 식어진다고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믿음 있는 자들까지도 믿음이 떨어진다고 강조했습니다. 2007년을 시작하면서 우리교회가 ‘성령으로 하나되어 믿음으로 나아가자’라는 표어를 정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금년 한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성장하는 한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의 귀한 신앙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본문에 나오는 ‘아벨’입니다. 아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 예배중심의 믿음입니다. 본문은 아벨에 대한 기록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벨의 제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가장 처음으로 언급된 제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범죄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이 보였지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가죽옷을 입으시면서 그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이후 인류의 역사는 생육과 번성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이라는 자손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생육과 번성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분명 인간이 에덴동산은 잃어버렸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앙을 다시 찾아가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사’입니다. 여기 아벨의 제사가 그것을 잘 알려줍니다. 한때 범죄 했지만 에덴동산이후의 그들의 삶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벨의 제사를 시작으로 이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제사로 이어지고, 출애굽시대의 성막에서의 제사와 솔로몬 시대의 성전에서의 제사로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여기 아벨의 제사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제사의 근원과 출발로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의 신앙과 믿음을 무엇보다도 제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신앙의 중심에 제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제사,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제사는 신약시대와 오늘 우리 시대에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믿음은 제사중심, 곧 예배중심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가장 귀하게 표현할 것이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갖는 많은 것 중에 예배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4장에서 이것을 잘 알려주셨습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여인과의 대화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결국 예배자를 찾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제사를 드릴 참된 예배자를 찾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이고, 구원하신 것이며,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점점 예배가 소홀히 되고, 점점 예배가 형식으로 치우치고 있는 시대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으로 바뀌고, 예배는 내용은 빠지고 껍데기만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딴 생각하고, 졸고, 장난하고,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늘 조심하면서 점검할 부분이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야 할 부분입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신앙의 성공자요, 예배에 영적 생명을 거는 사람이 결국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예배중심과 함께 아울러 중요한 것이 바로 주일중심입니다. 우리가 한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에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내 신앙과 삶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모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주일성수를 생명처럼 지켜야 합니다. 달력에 빨간 숫자로 표시된 날, 이날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날입니다. 주일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예배를 귀하게 여기고, 주일을 잘 지키는 자가 믿음의 성공자가 됩니다.
주일은 정말 특별한 날입니다. 신기하게도 역사적으로 보면, 이날 하나님의 뜻과 거슬린 행동으로 어렵게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6 25전쟁이 시작된 날이 주일날입니다. 그날 새벽에 북한 인민군이 남침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히틀러가 영국을 공격한 것도 바로 주일입니다. 그후에 패전국이 됩니다. 일본도 진주만을 주일에 공격합니다. 그후에 결국 원자탄을 맞고 패전합니다. 미얀마에서 있었던 아웅산 폭발 사건도 주일에 일어났습니다. 최근 서남아시아의 지진도 주일에 발생했습니다. 이 모두는 다 뭔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 주일은 정말 특별한 날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새해를 시작하면서 주일 중심, 예배중심의 믿음으로 신앙의 성공자가 되시고, 큰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최선을 다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아벨의 제사가 중심인데, 그냥 제사를 말하지 않고 가인과 비교하여 알려줍니다. 그래서 가인과 비교하여 아벨의 제사를 보아야 합니다. 가인과 비교하여 아벨의 제사는 어떤 제사였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아벨의 제사는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여기에서 성경은 아벨의 제사, 그의 믿음을 가인과 비교하여 더 나은 제사라고 강조합니다. 어떤 것에 있어서 비교급을 쓰는 것은 최선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아벨은 가인과 비교하여 최선을 다하는 제사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주 귀하게 보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믿음, 최선을 다하는 행동,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귀한 믿음이 모습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모두가 아벨을 본받아야 합니다. 최선이 중요하고, 과정이 언제나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몫이요, 우리의 행동이어야 합니다.
러시아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아주 어려운 바이올린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에게 곡을 받아 연습하던 연주자는 몇 주간 동안의 노력에도 연주가 되지 않아 그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아무리 해도 이 곡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연주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곡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연주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연주해 보려고 애쓸 때 나오는 바로 그 소리란다."
에디오피아의 아베베라는 유명한 마라톤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때 맨발로 뛰어 우승한 사람입니다.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인간승리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4년 후 도쿄 올림픽에서 그는 운동화를 신고 뛰어 또 우승했습니다. 그가 뛰고 또 뛰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큰 힘과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만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그를 운동장에서 볼 수가 없게 됨을 안타까이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1970년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장애인 올림픽에서 휠체어를 타고 달려 또 우승을 합니다. 그는 “나는 오직 달릴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최선을 다한 모습이 감동을 준 것입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삶은 없습니다. 최선만이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살아가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힘들지만 미완성의 삶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사람보다 최선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귀하게 보십니다. 결과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과정을 소중히 보십니다. 결국 사람들은 최선의 사람에게 감동을 받고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아벨처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자기를 먼저 드리는 믿음입니다. 여기 아벨의 제사에서 지금까지 의문을 갖는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먼저 제물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인의 제물은 농산물이었고, 아벨의 제물은 양이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았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제사는 동물의 제물을 요구하는 속죄제사가 아니라, 감사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제물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면 첫 번째 것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가인은 이 부분에 대하여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면 정성이 때문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전반적으로 보면 정성이 없어 보이고, 아벨은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정성은 인간 편에서의 몫이지, 하나님은 오직 그의 뜻을 세우고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모두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성경은 그 중요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니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 지라...” 여기 중요한 해답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벨의 제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벨과 그 제물,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벨은 제사만 드리지 않고 자기도 함께 드렸습니다. 자기자신도 드리니까 정성도 나오고, 최선도 다하고, 제사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준비도 잘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자기를 먼저 드리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준비도 안되었고, 정성도 없고, 형식이었고, 최선을 다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가인은 자기를 드리지 못한 믿음 없는 모습으로 분노하여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통해 처음부터 무엇보다도 사람, 그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초점을 두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흐름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 그가 사랑하는 사람, 그분이 관심을 갖고 보시는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물도 제사도 정성도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나, 바로 그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진정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나를 요구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참된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도 나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되고 바른 삶으로 헌신하며 살기를 바라시고, 그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사람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숙한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설명이 되어야 하고, 그의 편지가 되고,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삶이요,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벨의 믿음은 예배중심의 믿음이요, 최선을 다하는 믿음이고, 자기를 드리는 믿음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고, 한 주간도 아벨의 길을 향해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지구종말시계’(Doomsday Clock)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 시카고에 있는 시카고대학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시계가 만들어진 배경은 제2차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5년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한 과학자들은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자신들을 ‘인류의 파괴자요 죽음의 신’이라고 자책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전쟁이 끝난 1947년에 원자력과학자협회를 만들어 ‘불리틴’이란 잡지를 내기 시작했고, 이 잡지의 표지에 ‘운명의 날 시계’, 이른바 ‘핵 시계’를 처음 공포했습니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자정에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맨 처음 자정 7분전에서 시작한 이 시계는 그 동안 모두 17차례 수정이 되었습니다. 자정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던 때는 1953년으로서 11시 58분이었습니다. 소련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미국과 소련이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했을 때였습니다. 그러다가 소련의 해체와 독일의 통일로 냉전 질서가 급격히 무너졌을 땐 자정 10분전까지 물러났고,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 감축에 합의했을 때는 17분전까지 후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911 사태가 발생했던 2002년에는 자정 7분전까지 접근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금년 1월 17일에 2분 앞당겨져서 지금 지구종말의 시계는 자정 5분전으로 다가갔습니다. 북한의 핵실험, 이란의 핵 개발, 미국과 러시아 등이 보유한 2만 6천 개의 핵무기, 핵 안전관리의 미비 등으로 시계를 2분 앞당긴 것입니다. 아울러 이제는 핵무기만이 아니라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인류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종말이 가까이 오면 여러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믿음이 식어진다고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믿음 있는 자들까지도 믿음이 떨어진다고 강조했습니다. 2007년을 시작하면서 우리교회가 ‘성령으로 하나되어 믿음으로 나아가자’라는 표어를 정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금년 한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성장하는 한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의 귀한 신앙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본문에 나오는 ‘아벨’입니다. 아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 예배중심의 믿음입니다. 본문은 아벨에 대한 기록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벨의 제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가장 처음으로 언급된 제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범죄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이 보였지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가죽옷을 입으시면서 그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이후 인류의 역사는 생육과 번성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이라는 자손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생육과 번성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분명 인간이 에덴동산은 잃어버렸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앙을 다시 찾아가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사’입니다. 여기 아벨의 제사가 그것을 잘 알려줍니다. 한때 범죄 했지만 에덴동산이후의 그들의 삶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벨의 제사를 시작으로 이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제사로 이어지고, 출애굽시대의 성막에서의 제사와 솔로몬 시대의 성전에서의 제사로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여기 아벨의 제사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제사의 근원과 출발로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의 신앙과 믿음을 무엇보다도 제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신앙의 중심에 제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제사,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제사는 신약시대와 오늘 우리 시대에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믿음은 제사중심, 곧 예배중심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가장 귀하게 표현할 것이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갖는 많은 것 중에 예배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4장에서 이것을 잘 알려주셨습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여인과의 대화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결국 예배자를 찾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제사를 드릴 참된 예배자를 찾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이고, 구원하신 것이며,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점점 예배가 소홀히 되고, 점점 예배가 형식으로 치우치고 있는 시대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으로 바뀌고, 예배는 내용은 빠지고 껍데기만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딴 생각하고, 졸고, 장난하고,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늘 조심하면서 점검할 부분이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야 할 부분입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신앙의 성공자요, 예배에 영적 생명을 거는 사람이 결국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예배중심과 함께 아울러 중요한 것이 바로 주일중심입니다. 우리가 한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에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내 신앙과 삶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모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주일성수를 생명처럼 지켜야 합니다. 달력에 빨간 숫자로 표시된 날, 이날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날입니다. 주일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예배를 귀하게 여기고, 주일을 잘 지키는 자가 믿음의 성공자가 됩니다.
주일은 정말 특별한 날입니다. 신기하게도 역사적으로 보면, 이날 하나님의 뜻과 거슬린 행동으로 어렵게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6 25전쟁이 시작된 날이 주일날입니다. 그날 새벽에 북한 인민군이 남침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히틀러가 영국을 공격한 것도 바로 주일입니다. 그후에 패전국이 됩니다. 일본도 진주만을 주일에 공격합니다. 그후에 결국 원자탄을 맞고 패전합니다. 미얀마에서 있었던 아웅산 폭발 사건도 주일에 일어났습니다. 최근 서남아시아의 지진도 주일에 발생했습니다. 이 모두는 다 뭔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 주일은 정말 특별한 날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새해를 시작하면서 주일 중심, 예배중심의 믿음으로 신앙의 성공자가 되시고, 큰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최선을 다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아벨의 제사가 중심인데, 그냥 제사를 말하지 않고 가인과 비교하여 알려줍니다. 그래서 가인과 비교하여 아벨의 제사를 보아야 합니다. 가인과 비교하여 아벨의 제사는 어떤 제사였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아벨의 제사는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여기에서 성경은 아벨의 제사, 그의 믿음을 가인과 비교하여 더 나은 제사라고 강조합니다. 어떤 것에 있어서 비교급을 쓰는 것은 최선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아벨은 가인과 비교하여 최선을 다하는 제사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주 귀하게 보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믿음, 최선을 다하는 행동,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귀한 믿음이 모습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모두가 아벨을 본받아야 합니다. 최선이 중요하고, 과정이 언제나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몫이요, 우리의 행동이어야 합니다.
러시아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아주 어려운 바이올린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에게 곡을 받아 연습하던 연주자는 몇 주간 동안의 노력에도 연주가 되지 않아 그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아무리 해도 이 곡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연주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곡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연주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연주해 보려고 애쓸 때 나오는 바로 그 소리란다."
에디오피아의 아베베라는 유명한 마라톤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때 맨발로 뛰어 우승한 사람입니다.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인간승리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4년 후 도쿄 올림픽에서 그는 운동화를 신고 뛰어 또 우승했습니다. 그가 뛰고 또 뛰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큰 힘과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만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그를 운동장에서 볼 수가 없게 됨을 안타까이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1970년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장애인 올림픽에서 휠체어를 타고 달려 또 우승을 합니다. 그는 “나는 오직 달릴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최선을 다한 모습이 감동을 준 것입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삶은 없습니다. 최선만이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살아가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힘들지만 미완성의 삶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사람보다 최선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귀하게 보십니다. 결과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과정을 소중히 보십니다. 결국 사람들은 최선의 사람에게 감동을 받고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아벨처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자기를 먼저 드리는 믿음입니다. 여기 아벨의 제사에서 지금까지 의문을 갖는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먼저 제물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인의 제물은 농산물이었고, 아벨의 제물은 양이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았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제사는 동물의 제물을 요구하는 속죄제사가 아니라, 감사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제물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면 첫 번째 것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가인은 이 부분에 대하여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면 정성이 때문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전반적으로 보면 정성이 없어 보이고, 아벨은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정성은 인간 편에서의 몫이지, 하나님은 오직 그의 뜻을 세우고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모두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성경은 그 중요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니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 지라...” 여기 중요한 해답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벨의 제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벨과 그 제물,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벨은 제사만 드리지 않고 자기도 함께 드렸습니다. 자기자신도 드리니까 정성도 나오고, 최선도 다하고, 제사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준비도 잘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자기를 먼저 드리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준비도 안되었고, 정성도 없고, 형식이었고, 최선을 다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가인은 자기를 드리지 못한 믿음 없는 모습으로 분노하여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통해 처음부터 무엇보다도 사람, 그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초점을 두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흐름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 그가 사랑하는 사람, 그분이 관심을 갖고 보시는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물도 제사도 정성도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나, 바로 그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진정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나를 요구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참된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도 나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되고 바른 삶으로 헌신하며 살기를 바라시고, 그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사람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숙한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설명이 되어야 하고, 그의 편지가 되고,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삶이요,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벨의 믿음은 예배중심의 믿음이요, 최선을 다하는 믿음이고, 자기를 드리는 믿음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고, 한 주간도 아벨의 길을 향해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