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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믿음 (요 20:27-29)
어제는 3,1절 기념일이었습니다. 3.1절 역사도 금년으로 84돌이 되었습니다. 역사도 이제는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3,1절 당시를 경험하고 참여했던 분들은 이제는 극소수만 남았습니다. 그때의 생생한 증언이 자꾸만 흐려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6,25나 3,1절 같은 역사적인 경험이나 체험자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상당히 우려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오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지난날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철없는 해석들을 하는 모습을 보고 염려하는 소리들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때의 경험자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으니 한편 아쉬운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살아가는데 경험이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경험도 건전한 경험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참 유익합니다. 배고픔의 경험,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입니까. 사람이 배고픈 환경에 처하게 되면 아주 단순해집니다. 그리고 본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쌀 한 톨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생각이 넓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또 실패의 경험, 이 경험도 소중한 경험입니다. 살아가다가 실패가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일부러 실패할 필요는 없지만 실패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를 소중한 기회로 맞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이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이게 되고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낙방의 경험도 좋은 경험입니다. 그 당시는 눈앞이 캄캄해 오겠지만 그 경험은 두고두고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이런 경험 없이 세상을 살면 자신이 능력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인식되어 자만함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또 암담한 현실에 부딪쳐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입니다. 중병에 걸려보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사람은 겸허하게 되고 신비의 세계를 보게 되고 침착하게 되고 자신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합니다. 이런 경험들은 살아가는 동안 참 소중한 체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우리조상들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강조해왔습니다.
북한에 살다가 월남한분들은 이남출신들 보다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월남하는 과정에서 뼈저린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보통 길이었습니까. 그래서 그 길을 사선을 넘었다고들 말하지 않습니까. 그 사선을 넘어오는 동안 수많은 죽은 시체를 넘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 사선을 맨몸으로 넘어와 이 땅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것이니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뼈아픈 경험들은 그때는 고되고 아팠겠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렇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교훈을 간직한 채 살아가게 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민족은 고난의 역사를 경험한 민족입니다.
우리민족이 일본으로부터 압제를 당하는 동안 암담한 현실도 경험하고 죽을 고비도 넘기고 배고픔과 서러움도 경험했습니다. 나라 없는 설움, 내 땅에 살면서도 남으로부터 지배를 당하는 수치, 농사를 다 지어놓으면 모두 뺏기는 아픔, 젊은 처녀들이 공출당하고 이 땅의 젊은이들이 꿈과 미래를 잃어버리고 짓밟혀 살아가는 아픔 등 우리민족은 그런 일 아니었으면 그런 경험을 할 수 없는 민족입니다. 우리민족은 누구를 밟고 침략하고 전쟁을 하는 그런 민족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역사를 보면 모두 남에게 당하고 고난당한 역사가 전부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민족이 비로서 강해지고 비굴함도 경험하고 나라소중함도 경험하고 민족이 무엇인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서 우리민족이 지혜로워지고 눈을 뜨게 되고 근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민족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이고 세계를 보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경험은 아주 유익한 체험으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그 경험이 오늘 이 나라를 건설하는데 기여하고 의지를 발휘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습니다.
경험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오늘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3,1절의 역사도 이제는 84년이나 되어서 그때의 생존인물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6,25의 체험자들도 줄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후 세대들이 정권중심부에 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염려가 됩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북침설을 말하기도 하고 북한에 대한 인식도 너무 핑크빛 이상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핵을 가지는 일을 왜 반대하느냐 통일이 되면 자연히 우리의 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역사도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염려됩니다. 그러니 역사의 질곡을 경험한 생존자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경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를 보고 깨닫는 지혜입니다.
사람은 모두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서 지난날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역사를 보고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고 듣고 배우고 나서 스스로 판단해서 내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더 강한 힘이고 지혜입니다. 지하철 사건은 한번 체험으로 족합니다. 내가 꼭 직접 경험해야만 깨닫는다면 그것은 무지입니다. 세상에는 꼭 그래야만 믿고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한심한 사람입니다. 체험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체험하지 않고도 듣고 가르침 받고서도 얼마든지 경험 이상으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에 교훈을 주실 때 보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매를 드시지 않습니다. 한사람만 매를 때리십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보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랬는데도 깨닫지 못하면 또 때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는 또 때리셨는데 지금 신약시대는 또 때리시지 않습니다. 그냥 놔두십니다. 그 그냥 놔두시는 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 매를 맞는 것이 아니고 아주 무서운 화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 보다 오늘 이 시대는 더 무서운 방법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교육하시고 움직이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경험이 다가 아닙니다. 경험보다 더 좋은 것은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이 복중의 복입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예수께 와서 병을 고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병도 그냥 병이 아니고 모두 원시적인 병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소경, 혈루병자, 중풍병자 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께 와서 병을 고치고 기적을 보고 경험하고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하고 체험했으면 끝난 것 아닙니까. 더 이상 보여줄 것이 무엇입니까. 그랬으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믿음이 컸어야 합니다. 믿음이 깊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경험하고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 받으실 때 모두 어디서 무엇을 했습니까. 복음서를 보면 그중 한사람도 후에 제자가 되고 무슨 일을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경험하는 일이나 체험이 다가 아닙니다.
베드로도 예수 사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락방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서도 나머지 제자들을 이끌고 고향바다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서 고기잡이에 나섰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고향으로 후퇴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락방에 찾아오셨을 때 분명히 만났습니다. 그리고 도마가 의심하는 소리도 다 들었습니다. 후에 도마가 예수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고도 베드로는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그때까지만 해도 여물지 못하고 미약했습니다. 본 것이 적어서 입니까. 경험이나 체험이 적어서 입니까.
그런 베드로가 언제 진심으로 깨닫게 되는가 하면 고향 바다에서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질문하실 때 녹아졌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날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실 때 베드로는 뼈 속 깊이 저려오는 아픔과 고뇌와 통한의 깨달음을 가지게 됩니다. 얼마나 심정을 저리게 만드는 질문입니까. 베드로는 그 질문에 비로소 녹아집니다. 그리고 그 길로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 후 다시 실수하지 않고 제자노릇을 충실하게 다하고 마침내는 순교자가 됩니다.
여러분, 체험이 다가 아닙니다. 무지자는 보여주고 만져주고 쥐어주어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경험이 다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그들이 출애굽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까. 그들은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 열 가지 재앙은 재앙중의 재앙이고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애굽에는 어두움이 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밝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애굽인들은 장자가 다 죽는데 그들은 안전했습니다. 이런 기적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또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갈라진 그 길로 직접 통행한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이 내려준 만나를 먹었습니다. 바위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를 마신 사람들입니다. 그 정도면 더 이상 보고 체험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 백성들은 매일같이 불평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론을 통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하나님이다 하고 섬겼습니다. 무지하고 완악해서 그렇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타락하고 순전성을 잃어서 그렇습니다. 참 불행한 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여기 도마라는 제자가 나옵니다. 이 도마는 참 맹랑한 제자입니다. 도마가 없는 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녀가셨습니다. 도마가 들어온 다음에 “너 없는 사이에 부활하신 주님이 다녀가셨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아쉬워해야 합니까. 아쉬워 어쩔 줄 몰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허튼소리 하지 말라, 말 같지 않은 말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은 그런 말을 기록해 놓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런 말까지 기록해 놓을 여백이 없습니다. 도마도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분명히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는 결정적인 부정을 또 합니다. “내 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과 옆구리 창자국에 직접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 이 말은 너무나 치명적인 부정의 대답이기 때문에 성경은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신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만 골라서 제자를 삼으셨는지 모릅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참 우매한 짓만 골라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 길이 얼마나 비장한 길입니까. 그때 제자들은 우리 중에 누가 높으냐고 논쟁합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혼나지 않습니까. 한 제자는 이 다음에 우리 형제를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다가 주님으로부터 핀잔을 받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배반을 합니다. 유다는 주님을 팔아먹습니다. 도마는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부인을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이 제자들이 모두 고향 바다로 내려갑니다. 아마 여러분들을 불러 제자를 삼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여기 나오는 이 도마는 철두철미 불신앙자의 모형으로 나타납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그곳에 현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27절을 보면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 말씀을 듣고 도마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가 궁금합니다. 참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그리고 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경험이고 체험입니다. 이 경험과 체험은 사람에게 힘이 되고 자신감을 주고 능력이 되어줍니다. 또 삶에 지혜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은 경험보다 수준이 높고 체험보다도 그 차원이 더 높습니다.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보고 믿는 것은 인간의 자질입니다. 그런데 보지 않고 믿는 것은 하늘이 주는 은혜의 선물이고 지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고 체험하고 만져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은혜와 지혜로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6,25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염려할 것 없습니다. 3.1절의 역사가 오래되어 체험자들이 없어진다고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때의 역사가 있고 교훈이 있습니다. 그 역사와 교훈만으로도 족합니다. 그 역사의 교훈으로 깨닫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 세상이 건전한 세상입니다.
다만 그 역사를 배우는 후대인들은 두어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겸허함입니다. 젊은 세대라는 점에서, 좌경화되었다고 해서, 개혁파라고 해서 지난날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아주 무지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후대인들이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지혜 있는 민족은 역대의 교훈을 그렇게 무시하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후손들에게 이 역대의 연대를 가르치라고 강조해서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에 아주 강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민족입니다.
그리고 교훈을 받았으면 오늘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지금부터 84년 전 우리나라는 참 암담했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참담했습니까. 그때 태어난 분들은 가장 고난스러웠던 시대를 살았던 불행한 세대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일제의 압제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려움을 모두 감수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해방이 되어 자유를 누리는가 싶었는데 6,25의 전쟁을 겪습니다. 전후 그 가난했던 가난기를 모두 경험한 세대들입니다. 그리고 좀 살만하니까 모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나라는 그분들의 고 고난의 삶으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그때에 비하면 오늘 이 나라는 참 눈부신 발전을 이룬 나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세대들은 부족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에 더 충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픔의 역사를 가진 백성이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