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언어생활   (마 12:33-37 요 8:26-28,38, 12:49-50)


삼성그룹의 창업자였던 고(故) 이병철회장님이 생전에 각 공장의 공터마다 나무를 심게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그 분이 각 공장을 시찰할 때면, 사무실에서 서류 보고를 받거나 생산 라인을 살펴보기 전에, 반드시 그 공장에 심겨진 나무를 먼저 보았다고 합니다. 나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면 그 공장의 공장장을 신뢰하였고, 만약 나무에 이상이 있으면 그 공장의 서류 보고가 아무리 훌륭해도 공장장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공장을 책임지는 공장장의 손길이 공장 밖 나무에까지 미친다면, 그 공장장은 공장 안 관리도 두말 할 것 없이 잘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공장에 심겨진 나무로 공장장의 역량을 평가했던 그분의 판단은 거의 정확했다고 합니다.

불교의 한 구도자가 이름 있는 스님을 만나보기 위해, 그 스님이 기거하고 있는 산사를 찾았습니다. 깊은 산속의 산사 아래에 막 도착했을 때, 산사를 끼고 도는 계곡물 속에서 산사에서 버려진 콩나물 대가리와 밥알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구도자는 발길을 돌려 하산해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처럼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산신령이라 할지라도 만나 볼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불교에 귀의하여 스님이 되고자 하는 모든 불자는 먼저 밥 짓는 일부터 하게 된다고 합니다. 구도란 섬김과 봉사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때 갓 귀의한 불자들에게 스님이 첫 날 첫 시간에 들려주는 이야기가 방금 말씀드린 이야기라고 합니다. 스님의 참됨의 정도, 산사의 참됨의 정도는 그 산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의 물 속을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고 이병철 회장님이 공장의 나무를 보고 공장 전체를 알 수 있었다면, 불가의 구도자들이 산사를 끼고 도는 계곡의 물을 보고 산사를 평가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평가될 수 있을까요? 무엇을 보면 우리 자신을, 우리의 신앙생활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을까요?

조금 전,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이 여기에 대한 좋은 답변이 될 것입니다. 본문의 흐름을 우선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1장과 12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여러 반응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반응들 중의 하나로, 마태복음 12장 22절 이하에 기록된 것처럼,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의 치유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그 기적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렸다는 비난입니다(마 13:24).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반박하시고(마 12:25-30), 그들의 그런 태도를 “성령을 훼방하는 것”(마 12:31)으로, 또한 ‘말로써 성령을 거역하는 것’(마 12:32)으로 간주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의 심각성을 다룬 후, 오늘 본문인 말의 중요성(문제)을 다루고 계십니다. 말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말하는 자의 본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곧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주님의 강한 어투를 발견합니다. 과격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비난의 말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 곧 메시아 예수를 대하는 그들의 악한 삶의 태도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저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주님은 열매와 나무의 비유를, 사람의 말과 마음의 관계에 적용하십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악한 행동, 악한 말이 결국 악한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임을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본문의 가르침은 바리새인들만을 향한 경고가 아니라, 제자들을 향한 경고이자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까닭을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발견할 것입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님은 인생을 나무에 비유하시면서, 우리 인생을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로 구분하십니다.

어떻게 한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 수 있습니까?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은 나무라고 판단할 수 있고, 나쁜 열매를 맺으면 나쁜 나무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또한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야기입니까?

본문 34절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어떻게 우리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까?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듯이, 사람은 그 입술의 언어로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척도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 여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의 믿음생활, 그 신앙적인 인격을 살필 수 있는 잣대는 그 사람의 열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의 입술의 열매를 보면 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는 어떤 열매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최근 여러분의 입으로 뱉어 낸 그 숱한 말들은 어떤 말들입니까?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례한 말, 잔인한 말, 쓰디쓴 말, 악한 말이 입술의 열매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내면의 모습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하다는 증표입니다.

입만 열면 속이는 말, 더러운 말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 마음속에 속이는 영, 더러운 영이 자리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정말 우리들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자리하고 있다면, 더럽고 추한 말이, 악의가 가득한 말이, 그렇게 습관적으로 입에서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입술에 은혜로운 말, 기쁨이 넘치는 말, 축복하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그 마음속에 성령께서 좌정하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한 성도의 마음에는 평강과 기쁨이 넘쳐 나는 것입니다. 남을 격려하는 말,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말이 가득하십니까? 그 마음속에 타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향해서 용서하는 말, 용납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이 하나님의 큰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에, 용서하는 말, 용납하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주님을 닮아 가는 삶’을 매우 어렵고 힘든 것으로 이해하지만,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주님을 닮아 가는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안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이 주장하는 가르침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3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몇 년 전 몰래 카메라가 우리 사회의 문제거리로 등장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연예인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그것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간간히 이것과 관련된 우스운 기사거리도 나왔습니다. 울산의 어떤 사람은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마구 버리는 택시 기사들을 카메라에 담아, 울산 시청에 제보함으로 제보금 1500만원을 상금으로 받았다고 신문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꼭 몰래 카메라가 아니더라도, 몰래 녹음하는 녹음기는 어떨까요? 누군가가 우리들 몰래 하루 종일 우리들의 말을 녹음했다면, 그래서 그 녹음한 내용을 다시 재생했다면,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셨던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 말에 미국의 몇몇 한인 목사님들이 평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 북한에 들어가기 전, 중국 북경에서 서로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북한에 가면,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감시되니까, 정말 말조심 몸조심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호텔방 안에는 틀림없이 도청장치나 감시 장치가 되어 있을 터이니,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더욱 조심하고, 중요한 얘기는 밖에 나와 거리를 다닐 때 하자고 서로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나누고, 평양의 호텔방에 들어가니, 호텔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이상하게 보이더랍니다. 약간만 이상한 물건이 있으면, ‘저걸로 나를 감시하나 보다’하고 생각하니까, 행동이 너무 너무 부자연스러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 평생에 호텔방 안에서 그렇게 엄숙하고 경건하게 거룩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충분히 상상이 되시죠?  

이튿날 아침 호텔 밖에 나와 산책하면서 어젯밤 다들 어떻게 지냈느냐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연세 많은 목사님 한 분은 아예 양복을 다 입고 주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일행 중의 한 분이 “목사님! 아무리 그래도 양복까지 입고 주무신 것은 너무하셨어요.” 그랬더니, 이 분 대답이 “그러면 공산당이 보고 있는데 팬티 바람으로 잘까요?” 그러시더랍니다.

누군가가 나의 말을 듣고 있고,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삶의 스타일마저 바꾸고 만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몰래 카메라나 몰래 녹음하는 녹음기는 의식하지만, 정작 의식해야 될 대상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은밀한 중에 계시며, 은밀한 것을 보고 들으시는 하늘 아버지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늘 아버지를 의식해야 합니까? 주님은 본문 36절과 37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심판 날에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행동에 대한 심판이기 이전에, 우리의 말에 대한 심판입니다.

사람들의 행위로 인한 해악보다는 말의 해악, 언어의 해악이 훨씬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인한 범죄보다 말로 인한 범죄가 더 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집에 도둑이 들어 귀중한 물건을 훔쳐 갔다고 가정해 봅시다. 얼마나 아깝고 속이 쓰리겠습니까? 하지만 도둑을 맞았다고 해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들은 말 때문에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교실에서 없어진 물건의 범인이 너라는 급우들의 말을 들은 학생이 죽음으로 자신의 결백을 항변합니다. 직장 상사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욕설을 들은 여직원이 자살로 항거합니다.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심문하는 검찰 수사관들의 거친 말 때문에 자살해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날, 하나님은 우리들의 말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의 언어생활에 대해, 우리들의 말에 대해, 이렇게 엄하게 교훈하시는 주님의 언어생활은 어떠하셨을까요?

요한복음 8장 26절부터 28절, 그리고 38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찾아볼까요? 요한복음 8장 26절부터 2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그리고 8장 38절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방금 읽었던 내용을 다시 살펴볼까요? 26절에,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라고 왜 많은 말씀을 하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계속되는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음모, 제자들의 불신앙 등 하고 싶은 말씀들이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침묵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말을 해야 할 때는 분명히 하셨습니다. 언제 어느 때 말씀하셨습니까?

2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28절 하반절에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그리고 38절에,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펜이 있는 분은 성경에 밑줄을 그어 보십시오.

26절의 “들은 그것” 28절의 “가르치신 대로” 38절의 “본 것” 핵심 단어는 이것입니다. “들은 것, 가르치신 것, 본 것!”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께 들은 것,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것, 아버지께 본 것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원칙이셨고, 말의 법칙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과 50절도 찾아서 한번 볼까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말을 가려서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몹시 분노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꾼들로 더렵혀진 것을 보셨을 때, 그들을 내어 쫓으시며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의 순간에도 주님은 함부로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며, 내 자의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명령이 영생인 줄 아시고,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얘기한다고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왜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것만 이야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었던 이유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생각이나 뜻대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것만 얘기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말 때문에 고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단순히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는 정도의 방어적인 말에 관한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말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말이 아무런 호소력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저와 여러분의 말이 그 누구에게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의 말이 힘이 없고, 그 누구도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신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늘 아버지로부터 듣고 본 것을 내가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말씀 보다는 나의 생각과 경험, 나의 감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저와 여러분의 말에 선한 호소력과 영향력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타인의 심령에 충격을 주는 언어의 파동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이웃을 살리는 말, 영혼을 살리는 말을 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먼저 귀담아 들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을 내 심령 깊은 곳에 가득 채우십시오. 우리가 함부로 말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의 빛이 충만할 때, 빛에 속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서, 그것을 사용할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내 생각, 나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 아버지께서 보여 주신 것을 말할 때, 우리의 말 속에 죽고 사는 권세가 있게 됩니다. 지친 자가 새 힘을 얻고, 어둠에 있는 사람이 빛을 보게 되며, 죽어 가는 사람이 치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충만한 아름다운 언어로 내 자녀를, 그리고 내 이웃을 축복해 보십시오. 그들의 미래를 축복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말하는 그대로 그 인생이 새롭게 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말의 권세, 언어의 권세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예화를 말씀드리면서, 설교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남부에 가면, 로스 알토힐이라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습니다. 특별히, 꽃들이 많은 꽃마을입니다. 거리거리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즐비합니다. 이런 꽃마을이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습니다.

오래 전, 이 마을에는 요한이라는 우편 배달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에서 늘 똑같은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우편물을 배달했습니다. “편지요”, “소포요” 하면서 말입니다. 그는 똑같은 길을, 늘 왕복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15년 동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 우편 배달원은 삶이 단순하고 단조로우니까, 싫증이 났던 것입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처럼 똑같은 거리를 다니며, 똑같은 일을 해야 하나? 밤낮 편지 왔어요, 소포 왔어요를 외쳐야 하나...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른 일로 바꿔 버릴까?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하지?’하면서,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속하라고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께 그 일이 너무나 지겹고 지루한데, 어떻게 계속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속하면서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기도하던 어느 날, 그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거야! 그것 참 좋은 방법이구나. 이제부터 다르게 살아보는 거야.’

그는 여전히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 똑같은 거리를, 똑같은 자전거로 돌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한 후에, 그의 우체부 가방 안에 꽃씨를 넣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집마다 거리마다 계속해서 꽃씨를 뿌렸습니다. 어떤 꽃씨는 죽기도 했지만, 어떤 꽃씨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가 지나가는 길에 아름다운 꽃들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지나가는 거리는 꽃의 거리가 되었고, 그가 다닌 마을은 꽃마을이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의 이름난 명승지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지나간 인생길은 어떻습니까? 아니, 지나간 과거는 제쳐 두고라도, 앞으로의 남은 삶은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물론, 우리들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반복할지 모릅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인생 가방 안에, 자비의 꽃씨, 사랑의 꽃씨, 친절의 꽃씨, 감사의 꽃씨, 축복의 꽃씨를 넣고 다닌다면, 우리들의 인생길은 이전과는 다를 것입니다.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때로는 황폐했던 우리들의 인생길이, 주님의 꽃동산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그 꽃씨를 뿌려야 할 때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나가는 인생 곳곳에 아름다운 언어의 꽃씨를 뿌려봅시다. 감사의 말, 격려의 말, 관용의 말, 친절의 말, 사랑의 말, 화평의 말, 축복의 말, 우리 주님이 즐겨 사용하신 언어의 꽃씨를 뿌려 봅시다.

우리가 지나가는 거리 곳곳이, 아름다운 꽃의 거리가 될 것입니다. 악한 말, 더러운 말, 남을 해하는 말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꽃동산을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남들이 흠모하는 천국 언어의 집을 지어가면서, 천국 방언이 넘쳐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 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 백성으로서 그 나라에 합당한 말을 아끼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말을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 분 곁에 있다가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체취와 기운이 베여 있습니다.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하늘 아버지의 거룩한 체취가 묻어나옵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성품을 묵상하도록 만듭니다.  

말씀과 기도로 정화된 천상의 언어가, 그의 일상의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일상의 언어를 보고, 그 가운데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향기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의 언어로 성육신된, 또 하나의 작은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10년을 넘게 만나도, 언제나 신선한 감동으로 아침마다 새롭게 보는 사람처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감동이 되는 사람, 만나면 만날수록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 만나면 만날수록 하나님의 신비를 느끼게 만드는 사람, 그는 정직한 말, 성실한 말을 아끼지 않는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늘 백성으로써, 품위 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두 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말을 사용해 보십시오. 예수님처럼, 지혜롭고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하늘의 숨결로 가득 찬 권세 있는 언어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천국 백성으로, 날마다 깨끗한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국 언어의 집을 만들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박원택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