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은 십계명 가운데 제 이 계명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십 계명을 분할하는 방법에 관해서 교파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주교와 루터 교에서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합하고, 열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서 열 계명을 만듭니다. 그 열째 계명 첫째를 아홉째의 이웃을 탐내지 말라는 것으로 하고, 열째를 그 아래 것으로 합니다.

  옛날 어거스틴도 이전 방법으로 열 가지 계명을 나누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 교회 곧 장로교회와 헬라교회는 우리가 지금 나눈 것과 같이 나눕니다. 이것은 옛날의 학자 오래곤, 유대교의 학자 조세포스나 화일로 같은 분들도 다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은 첫째계명과 둘째 계명의 내용이 같지 않습니다. 첫 계명에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너희 앞에 있게 하지 말라― 곧 다신론에 관한 교훈입니다. 즉 한 하나님만 사랑하고 공경하고, 섬기라고 하는 것이 첫째 계명의 중요한 교훈입니다.  이 둘째 계명은 근본적으로 우상 숭배에 대한 교훈입니다. 문제는 이 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겠느냐, 예배의 양식은 어떠하여야 하겠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되 다른 백성처럼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둘째 계명을 읽어보면『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곳에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계속해서『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째 계명은 예배의 방법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제 이 계명을 세 가지 방면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는 이 계명이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배에 대해서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는 이 계명이 가르치는 적극적인 교훈이 무엇인가.

  셋째는 이 교훈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무슨 경고를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계명이 예배하는 이들에게 특별히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종교적 예술,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조각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도 구리 뱀을 만들어서 높은 장대 끝에 매어 달아 그것을 보고 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을 보고하여 낫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지은 기사를 읽어보면 여러 가지 화초와 열매와 사자 같은 그림으로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또 지성소 안에도 날개 있는 그룹을 만들어서 법궤(法櫃)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이 모든 종교적 예술을 금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이 종교적 예술을 예배할 때에 사용하는 것을 금한 것도 아닙니다. 성전에서도 예배할 때에 이런 모든 예술품을 그대로 두고서 예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둘째 계명이 사실상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신령한 하나님을 물질적 형상으로 만드는 것을 금지한 것입니다. 가령, 아론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있는 중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무슨 뜻으로 만들었습니까. 곧 여호와라고, 여호와를 금송아지로 만든 것입니다. 여로보암 왕이 따로 사마리아에서 나라를 세워 놓고 역시 벧엘과 단이란 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여호와라고 섬긴 것입니다.

  이 계명은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시청각 교육이라고 해서 굉장히들 힘을 씁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모든 백성들은 신을 섬기는데 보이는 신을 섬겼습니다. 곧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을 물질적 형상으로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오해하여 인간은 여러 가지 미신에 타락합니다. 여러보암 왕 때에 하나님을 송아지로 만들어 섬기게 되니 그 후에는 바알 우상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우상을 겸하여 섬기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 계명과 아울러 생각할 것은 종교적 예술이나 상징을 사용할 때에 매우 주의해야 할 점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화나 성상이나 십자가를 가정이나 교회 안에도 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상화되면 안 됩니다. 성화나 성상 앞에서 절을 하거나 여기에다 기도를 하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현대까지도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일들을 합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화나 성상이나 십자가를 향해서 기도를 드린다면 이는 분명히 제二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이 계명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이는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는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형상이 없습니다. 만질 수 없습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 이가 없다―고 요한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십니다. 아시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존재이시므로 하나님을 어떤 물질적 형상으로 표시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이는 곧 신령으로만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중심으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예배당 안에 다 들어와 앉았지만 마음으로는 예배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교는 듣지만 실상은 예배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영과 진정으로, 진리로, 참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말로 경고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지마는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지마는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 떠났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또한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였습니다. 예 님은 진리올시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통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중생하지 않으면 사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지 못하며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도 주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도 주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진리의 예배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이올시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구약 시대에는 양과 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예배의 양식이 아주 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들리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더욱 거룩한 생활, 매일의 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할 때에도 참으로 영적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듣고 설교를 들으며 또 헌금을 하고 성례를 거행해서 진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최고의 의무는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예배가 있기에 인간이 짐승과 다릅니다. 이 예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매일 드릴 개인의 예배가 있습니다. 가정의 예배가 있습니다. 매 주일 드릴 교회의 예배가 있습니다. 이 모든 예배를 우리는 신령과 진리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 계명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계의 말씀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의 계명을 읽어보면『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사실은 비슷하나 뜻이 다른 두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기, 또 하나는 질투란 말입니다.  시기는 엔비(Envy)라고 영어로 말하고 질투는 젤러시(Jealousy)란 말을 씁니다. 여기 시기는 승기자염(勝己者廉)이라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시기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사랑의 단일성의 표현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부부의 사랑은 단일한데 다른 어떤 대상이 그 속에 들어오게 되면 질투의 감정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번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며 교회는 신부라고. 우리 믿는 사람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는 다른 무엇이 끼울 수는 없습니다. 우상이 용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여기의 뜻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종교적 대상, 곧 세상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사랑하면 그 돈이 곧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보다도 어떤 권력을 더 사랑하게 되면 그 권력이 우상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십니다.  왜?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갑 되 삼사 대까지 하겠다. 이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은 피차에 연결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횡적으로도 연결이 되었습니다. 종적으로도 연결이 되었습니다. 조상과 우리와도 지난 세대와 우리와도 다 연결이 되었습니다. 이 인류의 연대성이란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나 혼자에게만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사회에 악한 영향을 끼칩니다. 왜냐하면 횡적으로 연결된 사회에 사는 까닭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후손에게도 악한 영향을 끼칩니다. 종적으로도 연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죽으나 악은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악은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한 세대가 심고 다른 세대가 거둡니다. 가라지를 심고 가는 이가 많으면 다른 시대에 많은 가라지를 거둡니다. 유전의 법칙, 한 가문의 족보, 세계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 보세요. 아버지 죄가 三, 四 대까지 이른다고 하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내 죄로 말미암아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선도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순종하는 이에게는 수천 대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이것도 사실입니다.  

  선도 횡적으로도 연결되고 종적으로도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는 사실은 꼭 역사적으로 나타납니다. 요나단 에드워드의 족보를 연구한 이들, 또는 당시의 쭉스란 나쁜 이의 족보를 연구한 이들은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거 해 줍니다. 스스로 속지 맙시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좋은 것으로 심으면 좋은 열매를 거둡니다. 내 후대에라도 반드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八장 十二절을 읽어보면 거기에 에스겔이 본 환상 가운데 담에 큰 구멍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담의 구멍을 좀더 넓게 헐고 보니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을 열어 보니 큰방이 하나 있습니다. 방안을 보니 사면에 온갖 곤충들과 짐승들과 우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고 당시의 지도자 七十여 명이 그 앞에서, 이런 우상 앞에서 분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다른 사람에게는 겉으로 보였으나 실상은 그 속에 다른 우상을 섬긴 사실을 보여 준 환상입니다.  이 사람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속으로 우상을 섬겼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 자신만이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자손들과 모든 후대의 사람들까지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나왔지만 교회에 더러 출석을 하였지만 사실로 하나님을 섬겼는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는가를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사람은 혹 속일 수가 있습니다. 자신도 혹 속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여러분,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우상은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습니까. 만일 있다고 한다면 이 시간 우상을 깨뜨려 버리세요.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 드리십시다.                                          

출처/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10권 中에서  (一九六七년 一월 十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