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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은혜 받읍시다. (시107:10 -23)
시 107편은 시편 전체 150편 중에서 표제어가 없는 34편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가 기록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노래하는 역사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수많은 굴곡을 가진 역사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에 하나가 바벨론 포로 시기입니다. 나라는 망했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으니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희망 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나라에 고레스 왕은 왕이 되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을 명령했고 그 명령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금 성전이 건축되고, 성벽이 재건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서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절망은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시에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희망의 역사를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4, 5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광야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마르고 심히 피곤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니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기적이 일어나고 9절에 보니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10절에 보니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14-16절에 보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얽어 맨 줄을 끊으십니다. 놋문을 깨뜨리시고 쇠빗장을 꺾으셨습니다.
23절부터 보면 장사하는 사람이 배를 바다에 띄워 항해를 하다가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얼마나 파도가 강하게 일어나는지 26절 보니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데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29부터 보면 하나님이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개입하시니 광풍이 고요하게 되고 물결도 잔잔하게 되고 그들을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33절부터 보면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고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옥토는 염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35절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니 광야가 변해서 못이 되고 마른 땅이 변해서 샘물이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나서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8절에 보니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는 그분이 사람들을 향해서 가지신 인자하심과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기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도, 21절, 31절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 107편은 절망에서 회복을 노래하는 희망의 시인데 이 회복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회복의 과정 속에서 필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분들마다 절망에서 희망을 보시고 절망에서 회복되어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1. 회복의 제1요소 감사
시인은 1절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로 본시를 시작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어도 그 상황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감사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시 50:23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 즉 감사를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실례들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 풍랑을 만나고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요나서 2장에 보면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요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스올의 뱃속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스올’이라는 말은 음부를 말하는 것으로 그가 당한 고통이 지옥 고통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고통 중에서도 그는 원망의 기도를 하지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욘 2:9). 하나님은 요나의 감사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기적을 베푸셔서(욘 2:10)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감사하면 사람이 행복해집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칼 힐티는 그의 ‘행복론’에서 행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감사를 꼽습니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중요한 것은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해집니다.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지난 6개월을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일 년에 두 번 농사를 짓습니다. 첫 수확은 늦봄 5-6월경에 밀과 보리의 곡식을 거둡니다. 가을 수확은 9-11월에 포도, 무화과, 감람나무 열매 등을 거둡니다. 그래서 해마다 일 년의 첫 열매인 밀과 보리를 거두고, 그 첫 열매를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맥추절입니다. 다른 말로는 칠칠절 혹은 오순절입니다. 지난 6개월을 허락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합시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합시다. 과거를 더듬어서 지금 감사하는 이런 감사가 후불감사입니다.
오늘은 후불감사도 하시고 선불감사를 해봅시다. 지난 6개월이 아니라 앞으로 6개월간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도와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감사합시다. 이런 감사를 선불감사라고 합니다. 선불감사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선불 감사를 잘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오병이어를 붙잡고 감사하셨습니다. 먹을 사람은 남자만 5천명이 넘는데 떡 다섯 덩어리 물고기 두 마리를 붙잡고 감사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오병이어로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무덤 앞에서 먼저감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감사 후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선불감사라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매일 술에 만취되어 들어온 인사불성 남편을 끌어다가 겨우 눕혀 세상모르게 잠을 자고 있는 남편 옆에서 훌쩍 훌쩍 울면서 팔자타령을 하면서 절반은 신세타령 절반은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감사기도를 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감사할 일을 곰곰 생각하니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앞으로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취했어도 집을 찾아 올 수 있음에 감사하고 토요일은 더욱 술을 많이 먹어 주일날은 집을 잘 봐주어서 교회 나오는 데 불편하지 않아 감사했고, 생각해보니 좋은 감사의 일들이 많았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남편이 갈증이 나서 잠을 깨어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무엇이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물었더니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렇다고 감사를 구체적으로 나열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들은 남편을 “나도 오늘부터 예수 믿어 줄께”하며 선뜻 교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후에 이 분이 간증하기를 10년 동안 그렇게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번의 감사기도로 이루어졌다고 감사했습니다.
2. 회복의 제2요소 섭리
우리들의 생활에서 겪게 되는 고난 중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도 있습니다.
4절 말씀은 아마도 광야 생활에 대한 내용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횡단할 때는 많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를 공급하시지만 40년의 광야생활은 지긋지긋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생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광야생활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적인 속성을 제거하는 장소가 광야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준비시키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는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소입니다. 광야만 놓고 생각하면 괴로운 장소이지만 가나안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감사한 것입니다.
섭리란 만물을 하나님의 목적에 맡게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때로는 광야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종살이와 옥살이 13년이 있었고, 모세에게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그들을 고생시키기 위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고난은 애굽에 닥칠 7년 흉년을 준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이스라엘을 인큐베이터와 같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큰 민족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이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애굽의 바로의 압제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힘든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신혼기도 무척 힘든 나날이었고, 개척초기에도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시간은 저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저는 고생하던 그 당시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어느 정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힘든 것을 잘 모르고 감사하고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거치는 광야의 과정,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나운 광풍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믿어지고 섭리라는 시각으로 환경을 보면 좀 더 마음에 여유도 생길 것이고 한편으로는 감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회복의 제3요소 회개
우리들의 생활에서 겪게 되는 고난 중에는 죄의 결과로 찾아오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회개해야 합니다.
10, 11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는 미련한 자들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죄악의 길을 따르고 악을 범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집안에는 항상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들어갔는데 집안에서 악취가 납니다. 악취의 원인을 찾아보니 음식물 쓰레기가 싱크대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놓고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시 쓰레기를 처리할 것입니다. 그대로 놓게 되면 고약한 냄새 때문에 괴로워서 못 견딜 것입니다. 과거처럼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하는 집으로 회복되려면 일단 먼저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인생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죄악의 문제를 처리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은 회개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도 죄를 범하고 구원 받지 못한 사람도 죄를 범합니다. 다 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구원 받은 사람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고,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아서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단과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차이점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어느 성도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며 하늘나라에 갔는데, 먼저 사단이 “하나님, 여기 천당에 온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어 천당으로 오게 하시면서, 나는 한 번밖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묻더랍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단아, 네가 언제 나에게 용서를 빈 일이 있느냐 ?”하고 반문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등산을 하다가 발속에 작은 모래 하나가 들어가면 처음에는 신반을 벗는 것이 귀찮아서 무시하고 계속 걸어가지만 결국은 신발을 벗고 모래 한 알을 찾아서 제거하고서야 계속 등산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고, 환경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내 속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죄악의 모래알을 제거하는 회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4. 회복의 제4요소 겸손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신 목적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의 교만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낮추십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혹시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의 배후에 교만함이 숨어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별 어려움이 없기에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겸손하십시오. 겸손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겸손해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겸손함과 교만함의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 29:23에 보면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반드시 지식이 필요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그러나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 가능성이 많고 지식으로 인한 교만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지식을 갖되 겸손을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고전 8:1에 보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라고 지식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음악의 예를 들어봅시다. 저는 음악성이 부족한 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예배에서든지 찬양단의 인도를 따라서 찬양하면 은혜를 받는 편입니다. 그런데 음악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은혜 받는 것이 힘듭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찬양하기 보다는 앉아서 악기 연주, 싱어들의 음정, 박자, 화음 등 걸리는 것이 많아서 판단하고 있습니다. 판단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음악성이 풍부해서 다른 사람 판단하고 앉아있는 것보다 음악성이 부족하지만 은혜 받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기에 일반적인 설교는 양이 차지 않아서 은혜를 받을 수 없고 특별한 설교에만 은혜를 받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성경을 잘 모르고 어떤 설교에도 은혜를 받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이 나를 교만하게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사람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면 하나님은 인생막대기 사람 채찍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낮추셨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사람이 교만하면 그 사람에게 괴롭게 하는 자를 붙여서 교만한 사람을 낮추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욥 22:29에서 “사람이 너를 낮추거든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고 욥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회복을 원하십니까? 겸손해 지십시오. 잠3:34에 보면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도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5. 회복의 제5요소 기도
6, 19, 2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고통 중에 했던 일이 기도입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사 그 고통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수도꼭지가 있어서 물이 필요하면 수도꼭지를 돌리면 됩니다. 과거에 수도가 없을 때에는 펌프를 쓰는 집들이 있었습니다. 물이 필요하면 펌프에 물을 한 바가지 붓고 펌프질을 하면 깊은 곳에서부터 물이 올라와서 콸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물이 필요하면 펌프질만 하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기도는 펌프와 같다고 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이 부어주신 능력을 끓어 올리는 펌프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펌프질을 쉬고 있어서 삶에 필요한 물이 고갈 되어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물이 떨어져 가기 때문에 펌프에 부울 한 바가지의 물이 아까워서 펌프질을 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하면 응답이 없습니다. 펌프질을 멈추면 올라오던 물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못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포기하는 이유는 기도에 대한 거절감 내지는 기도의 패배주의가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안 되기도 하지만, 안 하기도 합니다.
벼룩은 자기 몸의 몇 백배 높이로 뛰어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벼룩을 병 속에 집어놓고 비닐로 뚜껑을 막아놓습니다. 그러면 뛰어오르는 본능을 가진 벼룩이 펄쩍 뛰어오르다가 병 입구에 막아놓은 비닐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반복되면 자기 보호본능에 의해서 병뚜껑 바로 아래까지만 뛰어오릅니다. 그 이상 뛰어오를 능력이 있지만 거기까지만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뚜껑을 치워도, 벼룩은 더 이상 뛰어 오르지 못합니다. 뛰어오르다가 병 입구에서 부딪혔던 경험이 그 벼룩을 사로잡아서 그 이상 뛰어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라오면서 부모나 형제나 친구 선생님 등 수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며 살아왔습니다. 무엇인가 요구했으나 거절 된 수많은 경험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들 앞에 나아갈 때 나를 받아주지 않았던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거절감과 패배의식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만들고 그 고정관념이 나를 붙잡아 놓고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결심했다가도 ‘내가 기도한다고 응답이 되나! 될 리가 없다. 하나님은 내 기도는 응답지 않으신다.’는 등의 거절감과 패배의식으로 인하여 형성된 기도 응답에 대한 불신앙이 작동하고 그 불신앙에 무릎을 끓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하지만 의식은 거절감과 패배의식으로 가득합니다. 그가 비록 열심히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주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일은 그리스도께서 뚜껑을 치우셨다고 믿고 기도에 다시 도전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내 한계선에 나를 묶어두지 말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다시 한번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기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내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사단이 만들어낸 거짓말입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뚜껑을 열어놓으셨는데 사단은 계속해서 아직도 뚜껑이 있다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없다는 패배의식, 기도해도 별수 없다는 고정관념,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된다는 열등감, 그 뚜껑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 열등감, 거절감, 패배의식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며 기도하지 못하게 만들며, 희망을 잃게 만들며 주저앉게 만들며 늘 실패와 무기력의 틀, 질병과 가난 안에 갇혀 살게 만듭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안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패배의식이나 고정관념, 열등감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새롭게 기도하십시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신다. 더딜지라도 반드시 나의 기도는 응답된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며 내 편이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 나는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보란 듯이 승리한다. 나는 이미 승리자이다.”라고 외치시며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그림을 그리시며 기적을 누리는 환상을 바라보시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긍정적인 생각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히 11:1). 기도하는 내용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려보십시오.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꿈꾸십시오. 사단은 거절감과 패배의식으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부정적인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들을 집어넣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림을 그리고 입으로 그렇게 될 것을 선포하며 담대한 확신 속에 거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며, 우리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시 107편은 시편 전체 150편 중에서 표제어가 없는 34편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가 기록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노래하는 역사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수많은 굴곡을 가진 역사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에 하나가 바벨론 포로 시기입니다. 나라는 망했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으니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희망 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나라에 고레스 왕은 왕이 되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을 명령했고 그 명령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금 성전이 건축되고, 성벽이 재건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서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절망은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시에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희망의 역사를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4, 5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광야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마르고 심히 피곤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니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기적이 일어나고 9절에 보니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10절에 보니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14-16절에 보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얽어 맨 줄을 끊으십니다. 놋문을 깨뜨리시고 쇠빗장을 꺾으셨습니다.
23절부터 보면 장사하는 사람이 배를 바다에 띄워 항해를 하다가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얼마나 파도가 강하게 일어나는지 26절 보니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데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29부터 보면 하나님이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개입하시니 광풍이 고요하게 되고 물결도 잔잔하게 되고 그들을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33절부터 보면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고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옥토는 염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35절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니 광야가 변해서 못이 되고 마른 땅이 변해서 샘물이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나서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8절에 보니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는 그분이 사람들을 향해서 가지신 인자하심과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기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도, 21절, 31절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 107편은 절망에서 회복을 노래하는 희망의 시인데 이 회복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회복의 과정 속에서 필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분들마다 절망에서 희망을 보시고 절망에서 회복되어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1. 회복의 제1요소 감사
시인은 1절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로 본시를 시작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어도 그 상황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감사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시 50:23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 즉 감사를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실례들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 풍랑을 만나고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요나서 2장에 보면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요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스올의 뱃속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스올’이라는 말은 음부를 말하는 것으로 그가 당한 고통이 지옥 고통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고통 중에서도 그는 원망의 기도를 하지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욘 2:9). 하나님은 요나의 감사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기적을 베푸셔서(욘 2:10)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감사하면 사람이 행복해집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칼 힐티는 그의 ‘행복론’에서 행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감사를 꼽습니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중요한 것은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해집니다.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지난 6개월을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일 년에 두 번 농사를 짓습니다. 첫 수확은 늦봄 5-6월경에 밀과 보리의 곡식을 거둡니다. 가을 수확은 9-11월에 포도, 무화과, 감람나무 열매 등을 거둡니다. 그래서 해마다 일 년의 첫 열매인 밀과 보리를 거두고, 그 첫 열매를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맥추절입니다. 다른 말로는 칠칠절 혹은 오순절입니다. 지난 6개월을 허락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합시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합시다. 과거를 더듬어서 지금 감사하는 이런 감사가 후불감사입니다.
오늘은 후불감사도 하시고 선불감사를 해봅시다. 지난 6개월이 아니라 앞으로 6개월간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도와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감사합시다. 이런 감사를 선불감사라고 합니다. 선불감사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선불 감사를 잘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오병이어를 붙잡고 감사하셨습니다. 먹을 사람은 남자만 5천명이 넘는데 떡 다섯 덩어리 물고기 두 마리를 붙잡고 감사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오병이어로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무덤 앞에서 먼저감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감사 후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선불감사라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매일 술에 만취되어 들어온 인사불성 남편을 끌어다가 겨우 눕혀 세상모르게 잠을 자고 있는 남편 옆에서 훌쩍 훌쩍 울면서 팔자타령을 하면서 절반은 신세타령 절반은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감사기도를 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감사할 일을 곰곰 생각하니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앞으로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취했어도 집을 찾아 올 수 있음에 감사하고 토요일은 더욱 술을 많이 먹어 주일날은 집을 잘 봐주어서 교회 나오는 데 불편하지 않아 감사했고, 생각해보니 좋은 감사의 일들이 많았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남편이 갈증이 나서 잠을 깨어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무엇이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물었더니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렇다고 감사를 구체적으로 나열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들은 남편을 “나도 오늘부터 예수 믿어 줄께”하며 선뜻 교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후에 이 분이 간증하기를 10년 동안 그렇게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번의 감사기도로 이루어졌다고 감사했습니다.
2. 회복의 제2요소 섭리
우리들의 생활에서 겪게 되는 고난 중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도 있습니다.
4절 말씀은 아마도 광야 생활에 대한 내용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횡단할 때는 많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를 공급하시지만 40년의 광야생활은 지긋지긋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생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광야생활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적인 속성을 제거하는 장소가 광야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준비시키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는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소입니다. 광야만 놓고 생각하면 괴로운 장소이지만 가나안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감사한 것입니다.
섭리란 만물을 하나님의 목적에 맡게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때로는 광야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종살이와 옥살이 13년이 있었고, 모세에게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그들을 고생시키기 위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고난은 애굽에 닥칠 7년 흉년을 준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이스라엘을 인큐베이터와 같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큰 민족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이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애굽의 바로의 압제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힘든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신혼기도 무척 힘든 나날이었고, 개척초기에도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시간은 저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저는 고생하던 그 당시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어느 정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힘든 것을 잘 모르고 감사하고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거치는 광야의 과정,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나운 광풍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믿어지고 섭리라는 시각으로 환경을 보면 좀 더 마음에 여유도 생길 것이고 한편으로는 감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회복의 제3요소 회개
우리들의 생활에서 겪게 되는 고난 중에는 죄의 결과로 찾아오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회개해야 합니다.
10, 11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는 미련한 자들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죄악의 길을 따르고 악을 범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집안에는 항상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들어갔는데 집안에서 악취가 납니다. 악취의 원인을 찾아보니 음식물 쓰레기가 싱크대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놓고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시 쓰레기를 처리할 것입니다. 그대로 놓게 되면 고약한 냄새 때문에 괴로워서 못 견딜 것입니다. 과거처럼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하는 집으로 회복되려면 일단 먼저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인생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죄악의 문제를 처리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은 회개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도 죄를 범하고 구원 받지 못한 사람도 죄를 범합니다. 다 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구원 받은 사람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고,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아서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단과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차이점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어느 성도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며 하늘나라에 갔는데, 먼저 사단이 “하나님, 여기 천당에 온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어 천당으로 오게 하시면서, 나는 한 번밖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묻더랍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단아, 네가 언제 나에게 용서를 빈 일이 있느냐 ?”하고 반문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등산을 하다가 발속에 작은 모래 하나가 들어가면 처음에는 신반을 벗는 것이 귀찮아서 무시하고 계속 걸어가지만 결국은 신발을 벗고 모래 한 알을 찾아서 제거하고서야 계속 등산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고, 환경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내 속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죄악의 모래알을 제거하는 회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4. 회복의 제4요소 겸손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신 목적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의 교만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낮추십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혹시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의 배후에 교만함이 숨어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별 어려움이 없기에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겸손하십시오. 겸손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겸손해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겸손함과 교만함의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 29:23에 보면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반드시 지식이 필요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그러나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 가능성이 많고 지식으로 인한 교만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지식을 갖되 겸손을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고전 8:1에 보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라고 지식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음악의 예를 들어봅시다. 저는 음악성이 부족한 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예배에서든지 찬양단의 인도를 따라서 찬양하면 은혜를 받는 편입니다. 그런데 음악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은혜 받는 것이 힘듭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찬양하기 보다는 앉아서 악기 연주, 싱어들의 음정, 박자, 화음 등 걸리는 것이 많아서 판단하고 있습니다. 판단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음악성이 풍부해서 다른 사람 판단하고 앉아있는 것보다 음악성이 부족하지만 은혜 받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기에 일반적인 설교는 양이 차지 않아서 은혜를 받을 수 없고 특별한 설교에만 은혜를 받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성경을 잘 모르고 어떤 설교에도 은혜를 받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이 나를 교만하게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사람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면 하나님은 인생막대기 사람 채찍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낮추셨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사람이 교만하면 그 사람에게 괴롭게 하는 자를 붙여서 교만한 사람을 낮추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욥 22:29에서 “사람이 너를 낮추거든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고 욥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회복을 원하십니까? 겸손해 지십시오. 잠3:34에 보면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도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5. 회복의 제5요소 기도
6, 19, 2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고통 중에 했던 일이 기도입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사 그 고통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수도꼭지가 있어서 물이 필요하면 수도꼭지를 돌리면 됩니다. 과거에 수도가 없을 때에는 펌프를 쓰는 집들이 있었습니다. 물이 필요하면 펌프에 물을 한 바가지 붓고 펌프질을 하면 깊은 곳에서부터 물이 올라와서 콸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물이 필요하면 펌프질만 하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기도는 펌프와 같다고 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이 부어주신 능력을 끓어 올리는 펌프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펌프질을 쉬고 있어서 삶에 필요한 물이 고갈 되어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물이 떨어져 가기 때문에 펌프에 부울 한 바가지의 물이 아까워서 펌프질을 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하면 응답이 없습니다. 펌프질을 멈추면 올라오던 물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못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포기하는 이유는 기도에 대한 거절감 내지는 기도의 패배주의가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안 되기도 하지만, 안 하기도 합니다.
벼룩은 자기 몸의 몇 백배 높이로 뛰어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벼룩을 병 속에 집어놓고 비닐로 뚜껑을 막아놓습니다. 그러면 뛰어오르는 본능을 가진 벼룩이 펄쩍 뛰어오르다가 병 입구에 막아놓은 비닐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반복되면 자기 보호본능에 의해서 병뚜껑 바로 아래까지만 뛰어오릅니다. 그 이상 뛰어오를 능력이 있지만 거기까지만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뚜껑을 치워도, 벼룩은 더 이상 뛰어 오르지 못합니다. 뛰어오르다가 병 입구에서 부딪혔던 경험이 그 벼룩을 사로잡아서 그 이상 뛰어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라오면서 부모나 형제나 친구 선생님 등 수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며 살아왔습니다. 무엇인가 요구했으나 거절 된 수많은 경험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들 앞에 나아갈 때 나를 받아주지 않았던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거절감과 패배의식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만들고 그 고정관념이 나를 붙잡아 놓고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결심했다가도 ‘내가 기도한다고 응답이 되나! 될 리가 없다. 하나님은 내 기도는 응답지 않으신다.’는 등의 거절감과 패배의식으로 인하여 형성된 기도 응답에 대한 불신앙이 작동하고 그 불신앙에 무릎을 끓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하지만 의식은 거절감과 패배의식으로 가득합니다. 그가 비록 열심히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주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일은 그리스도께서 뚜껑을 치우셨다고 믿고 기도에 다시 도전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내 한계선에 나를 묶어두지 말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다시 한번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기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내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사단이 만들어낸 거짓말입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뚜껑을 열어놓으셨는데 사단은 계속해서 아직도 뚜껑이 있다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없다는 패배의식, 기도해도 별수 없다는 고정관념,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된다는 열등감, 그 뚜껑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 열등감, 거절감, 패배의식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며 기도하지 못하게 만들며, 희망을 잃게 만들며 주저앉게 만들며 늘 실패와 무기력의 틀, 질병과 가난 안에 갇혀 살게 만듭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안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패배의식이나 고정관념, 열등감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새롭게 기도하십시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신다. 더딜지라도 반드시 나의 기도는 응답된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며 내 편이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 나는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보란 듯이 승리한다. 나는 이미 승리자이다.”라고 외치시며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그림을 그리시며 기적을 누리는 환상을 바라보시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긍정적인 생각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히 11:1). 기도하는 내용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려보십시오.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꿈꾸십시오. 사단은 거절감과 패배의식으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부정적인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들을 집어넣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림을 그리고 입으로 그렇게 될 것을 선포하며 담대한 확신 속에 거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며, 우리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