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 없는 내게도 은혜가 흐르게 하라  (마 15:21-28)

한 노예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싼 값에 노예들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동정'이나 '사랑'이란 단어는 사치스러운 감정에 불과했습니다. 주위에서는 그를 '냉혈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죄악 된 삶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됐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권위의 상징인 목사의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항상 노예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노예들을 파는 죄인이었던 나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기 때문에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노예복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이 목사의 이름은 John 뉴턴입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지은 목사입니다. 1절은 이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의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노예를 팔았던 죄인, 인신매매였습니다. 그런 죄인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된 다음에 고백합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은혜는커녕, 심판을 받아야할 사람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경건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믿음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충성하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받기는커녕,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나의 모습을 평가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받기는커녕, 고발을 당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격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 수 있을까요? 자격 없는 나에게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머물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나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흐르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을 가지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한 이방 여인, 가나안 여인, 그는 다른 곳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께 나와 귀신들릴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고쳐달라고 할 자격이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합니다. 유대인도 아닙니다. 선민도 아닙니다. 당시 개로 취급받던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자격도 없는 이방인이 주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딸이 고침을 받습니다. 도저히 주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격 없는 이 이방여인에게 주의 은혜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이 이방여인이 주의 은혜를 얻은 것을 보면서,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내 삶에도 주의 은혜가 흐르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22절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기도야 말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보면 모든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고백은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나이다"그럽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의 신분을 보면 절대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자격이 없는 이방여인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믿음을 보고 딸을 고쳐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뭐라고 했길레? 바로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저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신분은 죄인이요. 현실은 부패요. 모양은 악함이요. 형태는 교만이요. 마음은 욕심으로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은 심판의 대상이지. 은혜 받을 자격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큰 믿음도 아닙니다. 탁월한 믿음도 아닙니다. 그저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는 고백할 뿐입니다.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us,1473-1543)는 폴란드가 낳은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요, 저술가였습니다. 온 세상이 천동설(天動說)을 믿고 있던 시대에,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경이적인 지동설(地動說)을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람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부패했던 천주교회의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믿음은 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약한 몸으로 일생을 마칠 무렵에 그는 자신을 과학자나 천문학자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한 죄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무덤의 묘비에 아래와 같이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그 친절을 간구하지 않습니다. 또는 바울에게 내려주신 은혜를 간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님과 함께 달렸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자비만을 구하나이다. 진정 그 자비를 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구제 불능한 죄인들입니다. 이런 인간이 고백할 수 있는 길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는 고백뿐입니다.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오직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의 믿음으로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내 놀만큼 깊은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그 믿음도 껍데기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믿음보다도 어떤 업적보다도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순수한 믿음,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나오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내놓을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심정으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만 가지고 나가십시오. 번듯하게 가지고 나갈 믿음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선물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헌신도 없습니다. 그저 이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연약한 그 모습 보시고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둘째, 25절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나에게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25절에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면서 고백한 것처럼 이렇게 해보십시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십시오. 이 기도야 말로 가장 단순한 기도입니다. 단순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부릅니까? 22절에 '다윗의 자손', 25절에 '주여'라고 합니다. 기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 분이 나를 도우실 수 있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믿음입니다. 자격이 없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단순히 그분을 주인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내가 어떤 공로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으로 부르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때 나는 자격이 없지만 내 단순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나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F. B.마이어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여러 층으로 된 선반에 있는 줄로 알고 내 키가 높아질수록 그 여러 층의 것을 가질 수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후에 깨닫기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여러 층 되는 선반에 있는 줄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선물들을 받아 가지려고 하면 내 더욱 더 나를 굽히고 내려가며 또 내려가기를 힘써야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 공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공적을 감추고 오직 엎드려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여인이 예수께 절하며, "주여 나를 도우소서" 이것처럼 단순한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자격이 없는 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기 위해서는 이렇게 단순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내 인격으로 내 힘으로 내 믿음을 가지고 나간다면 오히려 그것이 은혜를 받는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내 놓을 것은 오직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하는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수많은 비법과 능력을 소유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 우리는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봐"라고 하면서 한탄사를 발하기도 합니다. 헌신하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응보사상으로 열심히 하나님 앞에 내 놓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그런 업보사상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내 놓을 자격이 없습니다. 내 자격으로는 어떤 은혜도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적으로 주님께 나간다면 아무도 나아갈 자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나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저 이것입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이 모습으로 나갈 때 주님은 나에게 여전히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 없지만 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단순한 모습으로 나가십시오. 자격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나가지 마시고 그저 순수한 이 한 마디면 됩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께 "나를 도우소서"라고 단순하게 입술을 여십시오. 그 때 주님은 나에게도 은혜를 베푸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셋째, 27절에 "주여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가나안 여인이 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6절에 예수님이 가나안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하십니다. 이 때 여인이 27절에 그럽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럽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는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왕창 받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주인도 음식을 개에게 주는 것처럼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면 좋겠다는 여인의 고백입니다. 저는 그 여인의 믿음을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여인에게 개라고 취급하는 것에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 유대인 이 외의 사람들은 개나 짐승처럼 취급했던 시기입니다. 개라는 말은 헬라어로 '케나리온'이라는 말입니다. 이 개는 지저분한 개가 아니라 애완용을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여인은 개의치 않습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이르건, 내가 신분이 어떤 사람이든, 내가 무슨 취급을 받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부스러기은혜라도 구하는 심정으로 주님께 나갈 뿐입니다.

여인은 큰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베푸실 수 있다면 주인이 버린 음식을 개가 먹고 살듯이 그런 사심 없이 부스러기 은혜라도 요청하는 것입니다. 참 순수합니다. 참 겸손합니다. 우리는 간혹 "세계를 이끌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인은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쓰다 남은 부스러기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부스러기는 크지도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부분입니다. 이 이야기에 예수님이 감동을 받습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을 설득하고, 예수님을 감동시키고, 예수님의 마음을 변화시킨 사람은 오직 이 가나안여인뿐입니다. 큰 믿음이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28절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시니 그 시로부터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이제는 뭐라고 하십니까? 조금 전에는 개라고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신분을 초월하여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위대한 믿음을 요구하기 보다는 순수함을 요구합니다. 부스러기은혜라도 순수하게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주님에게 큰 것을 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가장 적당한 것을 채워달라고 기대하십시오. 주님은 모든 상황과 사람을 초월하시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순수하게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제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하십시오. 나에게 부스러기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나는 자격이 없지만 주님은 나에게 베푸실 수 있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를 말입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고 구하십시오. 주님이 그녀의 딸을 깨끗하게 치료해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맺는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 내 놓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나에게도 주님의 은혜는 흐를 수 있습니다. 내가 은혜받기에는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축복을 받기에는 거리가 멉니다. 내가 복을 받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 많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주님의 마음을 너무나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내 삶에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말입니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어느 영성 강사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씩 줄에 메달아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매듭을 지어 다시 묶으시고 자연히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 계속 줄을 끊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더시 묶어 우리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십니다."

절대로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업적과 공로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경험과 경험으로 쌓인 믿음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나에게도 자격은 없지만 은혜를 흐르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오직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기도에 주님은 감동받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순수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부스러기 은혜를 사모하고 "주님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저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십시오. 주님의 은혜는 내 삶에 시작될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나지만 주의 은혜가 삶에 늘 흘러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