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을 노래하는 삶 (창 49:22-26)

필라데피아 “인콰이어리” 1991년 12월 13일자에는 “하나님께 빚을 갚은 사람”이란 제목으로 존 카누소씨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누소씨는 9세의 딸 베이브가 백혈병 진단을 받게 되었을 때 밤을 새워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만일 내 딸을  살려 주신다면 나의 평생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카누소씨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하여 그의 딸은 백혈병에서 회복되어 결혼도 하고 아들을 나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카누소시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는 건축업자였는데 1974년에 아동병원 입원 병동인 Ronand Mcdonald house를 사재를 털어 지었고, 그 후 오늘날까지 개인의 돈은 물론, 잦은 모금행사를 통해 수십만 달러를 백혈병 연구소에 보내 왔습니다.
그의 감사는 더 큰 축복으로 변하여 허다한 백혈병 환자에게 빛을 던져 주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카누소씨의 삶은 축복을 노래하는 삶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열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축복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축복 선언의 내용입니다. 감동적인 영혼의 노래이며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언어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몫이기도 합니다.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 우리들의 삶의 노래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살아 약동하는 삶이 되기를 축복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사람의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축복하고, 감격과 기쁨을 노래하는, 영혼과 영혼이 어울리는 감격을 나누는 축복의 말씀이 됩니다.

1. 축복을 노래하는 삶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삶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이 말씀의 의미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의 성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 요셉의 일생이었습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아”라고 했는데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일생동안 하나님의 끊임없는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창 28:10-15, 32:24-30, 35:1-5, 46:1-4)
이와 같은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상한 도움의 손길이 요셉과 요셉의 후손에 미치리라는 예언의 축복입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세상일에 관심이 많았지만 요셉은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다른 형제들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는 눈이 부족했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바라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항상 아버지가 말씀하신 축복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축복은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요셉은 믿음으로 지켰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축복의 근원이 됨을 믿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요셉의 가슴에 비석처럼 새겨졌고 그 약속이 요셉의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 약속의 성취 과정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된 삶이 어디서 출발됩니까?
22절의 말씀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이 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근원을 두고 요셉은 생활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성한 가지가 되어 담을 넘듯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함을 주는 위대한 축복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샘 곁의 나무는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재해를 입지 않습니다. 가뭄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깨끗한 맑은 생수를 공급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생수의 샘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와 가까이 살게 되면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풍성한 축복을 공급받게 됩니다.
예레미야 17:7-8 말씀입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 말씀은 사람을 의지하면 저주를 받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길이 번영하고 축복을 받는 원리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요셉이 받은 축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노래되는 삶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믿습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사람이 축복을 노래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교훈의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 20:1에는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는 어떤 환난이 닥친다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는다는 약속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야곱의 하나님”이라 했는데 이 말씀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신실성을 나타내는 말이며, 야곱에게 언약을 이루신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축복을 이루신다는 놀라운 교훈이 담긴 말씀입니다.

2. 축복을 노래하는 삶은 환난도 형통으로 바꾸는 소망의 삶입니다.

23-24절 말씀입니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놀라운 비밀이 있는 말씀입니다.
“활 쏘는 자”(מיצח ילעב; 바알레 히침)는 “활의 명수들”이란 뜻인데 이는 요셉의 개인의 과거에 닥쳤던, 그리고 장차 그의 가문에 대항할 모든 적대 세력을 지칭하는 말입니다.(수 11:16-18, 삿 12:4-6)

그리고 “군박하였으나”라는 말은 “다그쳐 몰아 붙였으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환난이 되는 적대 세력들도 요셉에게는 오히려 힘을 쓰지 못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요셉과 항상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요셉의 활은 견강했습니다. 견강이란 말은 “힘”(출 15:13) “능력”(사 51“9)의 뜻으로 ”힘있고 유능한“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믿음의 삶은 환난도 형통으로 바뀌는 축복이 됩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 모두가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누구보다도 요셉은 환난 가운데서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미디안 상인에게 팔렸을 때도, 보디발의 몸종이 되었을 때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도, 감옥에서 술 맡은 바로의 관원장의 꿈을 해몽하여 주었지만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의 양식을 사서 애굽에 내려왔을 때 요셉은 단 한 번 그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간표를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었고 하나님이 아버지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었고, 어떤 환난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와 환난의 환경을 축복의 환경으로 바꾸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승리자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의 축복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다니엘 3장에는 감동스러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않았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왕이 분노를 사게 되어 일곱 배를 뜨겁게 한 풀무(ךותא;아툰=용광로) 속에 던져집니다.
그런데 3:24-25에 느부갓네살이 놀라서 외친 말이 있습니다.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풀무 가운데의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러내어 보니 “몸도 상하지 않았고,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더라”(단 3:27)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곳은 환난의 장소가 될 수 있지만 어떤 환난의 장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면 물이든 불이든 축복의 장소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그래서 환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신앙생활에서 그 환난은 축복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3장에 보면 유다와 이스라엘과 에돔이 연합하여 모압을 침공하려 했을 때 마실 물이 없어 생축도 군사도 환난의 시간에 갇혀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지만 유다 왕 여호사밧은 그 어려운 환난의 시간에 매여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 환난의 시간을 축복의 시간으로 바꾸어 전쟁에서 승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생활할 때 불평하고 원망하면 축복도 환난과 역경으로 변하지만 믿음으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소망으로 살아갈 때 환난도 축복으로 변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안경을 쓰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 봅니다.
“왜 안경을 썼습니까?”
그러면 100사람 중에 99명은 “안 보이기 때문에”라고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대답은 “더 잘 보기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않은 자처럼 살아갑니다.
정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더울 잘 느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삶이 가능할까요? 이제 다음 질문에 접근해 봅니다.

3. 축복을 노래하는 삶은 이웃과 함께 축복을 나누는 사랑의 삶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는 원문이 ‘벤 포라 알레 아인’(ךיע ילע תרפ ךב)인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풀어 보면 “샘의 가까이에 있어서 열매를 많이 맺는 아들”입니다.
진정으로 축복을 노래하는 삶은 혼자만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지가 담장을 넘었도다” 했습니다.
실제로 요셉이 그 아버지와 형제들 가족을 구원했듯이(창 45, 46장) 이후로도 여전히 요셉 가문의 은택이 다른 지파들에게 미치게 될 것을 시사하는 축복입니다.
25절을 다시 봅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이 말씀은 말할 수 있는 모든 복이 다 언급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축복합니다.
이 본문 25절 말씀을 여러분의 생각에 가득 채우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여러분 혼자만 누리지 마시고 이웃과 함께 나누는 축복을 노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마카리오스(μακαριος)입니다.

마카리오스의 독특함은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단어로서 세상적인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축복입니다.
마카리오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아솨르’(רשׁא)인데 이 말은 대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복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 133:1에서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했습니다.

형제라는 단어는 ‘아힘’(מיחא)인데 이 말은 영생이라는 ‘하임(מייח)과 포괄적인 언어 유사성을 갖고 있어서 이 말의 깊은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성도들이 함께 동거하며 영원토록 교제하게 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 믿음 안에 살아가는 성도의 축복입니다.
이처럼 형제가 하나되는 축복을 노래하는 사람에서 서로의 상처가 치료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 약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축복된 사람은 팔레스타인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로 넘어갔습니다. 곧이어 세계로 그 가지가 뻗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샘 곁의 나뭇가지로 묘사된 요셉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축복을 우리 함께 나누는 은혜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만년에 그의 사상과 행복론을 요약하여 쓴 단편 소설 “세 가지의 의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질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현인의 대답은 첫째는 현재요, 둘째는 현재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요, 셋째는 내가 만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중한 ‘현재’를,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는” 아름다운 삶! 그것이 나의 삶, 그것이 마카리오스를 노래할 수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는 그 영광의 소식을 접하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의 고통을 함께 지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 말은 결코 대종상 시상식이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말하는 수상자들의 말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평소에도 함께 일하는 수녀들에게 계속 가르쳐 온 그녀의 신조였습니다.
“여러분! 자랑삼아 일하지 맙시다. 저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은 주님의 배고픔이며 저 아픈 이들의 질병은 주님의 아픔입니다.”
그녀는 언제나 “거기 너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겸손히 그녀의 삶 전체를 통하여 마카리오스를 노래하는 삶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어느 날 웨스트몬트 대학의 데이비드 스워프 학장이 테레사 수녀를 만났을 때 “수녀님은 화 내는 일이 전혀 없으십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대답했습니다.
“사랑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화낼 틈을 찾기가 어렵군요”

말씀을 맺습니다.
헤밍웨이는 “선이란 뒷맛이 좋은 것이고 악이란 뒷맛이 나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뒷맛이 가장 좋은 삶은 무엇인가요?
마카리오스를 노래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의 삶이며, 환난도 축복으로 바꾸는 소망의 삶이며, 이웃과 함께 축복을 나누는 사랑의 삶입니다.

출처/박광현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