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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시편 1:1-6)
모 방송국에 '행복찾기'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제가 한 대목을 보고 저렇게 해서 행복이 찾아질까 라는 의심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방송에서 행복을 주제로 많은 특강을 합니다. 또 행복을 위해서 일하는 기관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행복을 논하는 이론을 보면 성경적인 행복관과는 거리가 먼 측면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부해지면 행복할 줄로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대학입시만 패스를 하면 그 다음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많은 경우에 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취업을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하면, 장수하면, 부유해지면, 명예로우면, 사업에 성공을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조건을 내가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데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것입니다. 어떤 것을 갖추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행복을 찾는 비법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지만 이것이 복이다 라고 붙잡은 것이 내일이 되면 복이 안 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연상하면서 그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그런 개념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행복 자체를 결코 논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복은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가짐으로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세속적 사고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가진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복된 사람으로 만들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복입니다. 그 분이 복의 실체이며 복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복이심과 동시에 우리를 복의 사람으로 만들기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머무는 곳이 복이 있는 곳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복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복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머무는 자리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하려면 식구 중 한 사람이라도 복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 가정이 행복한 것입니다.
복된 정서를 가지자
일반적으로 사계절에 관한 정서가 건전한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사계절은 우리 정서 속에서 가지각색으로 반응합니다. 어떤 이들은 봄을 노곤한 계절, 피곤해지는 계절이라 하고 꽃샘추위가 다가오면 금년 봄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등 봄을 반응하는 정서가 대단히 많습니다. 여름이 왔을 때도 지긋 지긋한 무더위가 빨리 물러갔으면 좋겠다, 장마가 지면 또 장마를 걱정합니다, 가을이 되면 허무한 계절이다, 낙엽이 뒹구는 모습을 보고 처량하다고 느낍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눈 좀 덜 왔으면 좋겠다, 겨울이 되니까 사람이 게을러진다는 등 계절을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생명의 약동감을 느끼고 여름의 녹음을 보면서 성숙함을 보고 가을의 결실과 무르익음을 통해서 어떤 깊은 의미를 느끼고 겨울의 남성다운 당당한 멋을 또한 누릴 줄 아는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정서와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정서는 그 사람의 삶의 질에 있어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때가 좋았어! 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뭐라고 해도 고향에 살 때가 좋았다, 옆에 마누라를 앉혀 놓고도 총각 때가 좋았어! 라고 합니다. 마누라 듣는데 왜 그 소리를 공연히 하느냐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여건은 없다
여러분, 행복해질 수 있는 여건은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건과 관계없이 행복합니다. 바쁘면 일이 많아서 좋다고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해도 하나님과 깊은 기도로 연단 받는 기회로 삼아서 좋고 건강하면 또 열심히 일하고 평소에는 남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 줄도 알고 역경이 오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의 연단을 받는 것은 여건 따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 따라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여건과 관계없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실 때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너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복의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복론은 전부 조건을 말합니다. 가령 하루에 상대방을 향하여 사랑한다는 말을 세 번 하라, 그러면 행복해 질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차적인 방법론이지 여건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살기 좋다해도 에덴동산 같은 환경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담, 하와가 에덴동산의 그 좋은 환경에서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서도 행복했습니다. 요셉은 종살이하면서도 행복했습니다. 요셉으로 인하여 원수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복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머무는 곳에는 원수도 복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머무는 감옥에 있는 사람도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행복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된 사람이 된다는 조건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에덴동산에 가서 살아도 죄를 짓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복의 사람이 되면 악인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배우고 듣고 읽고 즐거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가뭄을 타지 않는 나무, 잎이 청청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복 있는 사람이다 라는 조건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열매맺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복덩어리로 살라
우리 속언에 '복을 받으려면 복 받을 짓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은 행실을 통해서 주어지는 조건이 아닙니다. 복 받을 행실을 하기 때문에 복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행복론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복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복의 사람이 되어야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낳아서 얘가 내 아들 딸이 될만한가, 공부하는 것 봐가면서 아이큐가 높나 안 높나, 행실이 내 마음에 드나 안드나 분석해서 호적에 올립니까? 부모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나면 내 혈육이라는 것만 가지고 아무 조건없이 호적에 올립니다. 인물 따지고 아이큐 따지고 행실 따져서 우리를 입적시키지 않았습니다. 혈육이라고 하는 그 관계 하나 때문에 모든 여건을 초월하는 가치가 혈육이라는 것입니다. 혈육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합니다. 비록 몸이 불편하게 태어났다 할지라도 기꺼이 내 아들 딸로 호적에 올리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우리 집에 이제 9개월 된 손녀가 며칠 머물렀는데 아무리 봐도 못났습니다. 주일날 우리 교회의 아이들을 보지만 우리 손녀보다 잘 생긴 아이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못난 손녀가 가끔 보고싶을 때가 있더라고요. 내 생각 속에서는 그렇게 귀여운 애가 없습니다. 한번씩 인터넷에 들어가서 사진을 보면 잘 생긴 탈렌트들 보다 손녀가 더 귀엽습니다. 며느리와 가끔 전화할 때 막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납니다. 돐도 안 지났으니까 무슨 뜻이 있겠어요. 그저 고함을 지르는 것이지요. 수화기를 대고는 할아버지다 한번 떠들어라 하고 옆에서 엄마가 자꾸 부추기니까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에게 겁도 없이 뜻도 없는 소리로 막 떠듭니다. 그러나 뜻도 없는 손녀의 그 떠드는 소리가 하늘의 어떤 천사의 노래 소리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게 혈육이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이 복이다 라며 복을 주는 관계로 우리를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송두리째 소유하고 싶은 복의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는 복 덩어리가 되도록 원하는 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조건을 가지고 다가갑니다. 내가 이만하면 교인다운 모습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란 것입니다.
진정한 복의 의미
행복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만 갖추어지면 됩니다. 첫째는 내가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마음을 나눌 사랑의 대상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두번째는 일을 할 때 보람있는 안정된 일을 가지고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날이 밝았는데도 오늘 무슨 일을 할까 하는 사람들은 사실 행복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몰두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번째는 어떤 비전을 걸고 내 앞길은 소망이 있다는 그 소망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만 가지고는 행복의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영원히 사랑할 대상이 과연 무엇일까요? 영원히 가치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영원한 소망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렇게 접근을 해보면 쉽지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불행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붙잡았는데 한 평생동안 보장해주지 못하는 헛된 사랑의 대상이 이 땅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이 세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지 않으면 답이 없습니다. 영원한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아야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가족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영원히 붙잡을 사랑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사랑을 받아 보아야 영원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일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소명감을 느끼고 일해야 그 일이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일이 소명감입니다. 소명감 없는 단순한 돈벌이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못합니다. 복음을 위한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된 구원의 소망을 가진 자라야 영원한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복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복의 책입니다. 그러나 이 복을 근원적인 한 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복 받기를 원하는 거래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얻어야만 복되다는 거래가 아닙니다. 내가 복된 사람으로 살아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가와도 행복을 누리고 여건과 관계없이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임금님이 백성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조사해보려고 사람이 다니는 길목에 큰돌을 하나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돌을 쳐다보면서 누가 이 돌을 길 한 가운데 가져다 놓았나? 왜 그랬을까? 라는 표정으로 돌을 피해서 가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 눈 팔다가 그 돌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누가 돌을 여기에 가져다 놓아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느냐고 욕을 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러나 한 채소장사는 수레를 끌고 가다가 수레를 세워놓고 그 돌을 들어다가 길가로 옮겼습니다. 돌을 옮겨놓고 보니 그 돌 밑에 금화가 수북히 있었습니다. 그 금화를 보니 편지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돌을 옮기는 사람에게 이 금화를 주노라.' 이것이 고사에 나오는 우리 인생살이를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 어떻게 사시렵니까? 복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살렵니까? 돌에 부딪혀서 욕지거리를 하면서 살렵니까? 채소장사는 돌을 옮겨 놓을 만큼 여유를 가진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이 금화를 가져야 됩니다. 그 앞에 가던 사람들이 금화를 가지면 카지노 바로 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복을 감당할 사람을 만들어놓고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복을 무조건 주시고 그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복의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순종의 의무가 없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순종해야 됩니다. 왜냐 하면 구원의 복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지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 안에 주어진 의미는 인생은 복의 길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행복론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의 사람이 되어서 내가 머무는 가정이 행복하고 내가 일하는 일터가 행복하고 내가 섬기는 교회가 행복하고 내가 사는 이 땅과 이 시대가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 있는 사람
성경본문 시편 1:1-6
설교내용 모 방송국에 '행복찾기'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제가 한 대목을 보고 저렇게 해서 행복이 찾아질까 라는 의심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방송에서 행복을 주제로 많은 특강을 합니다. 또 행복을 위해서 일하는 기관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행복을 논하는 이론을 보면 성경적인 행복관과는 거리가 먼 측면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부해지면 행복할 줄로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대학입시만 패스를 하면 그 다음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많은 경우에 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취업을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하면, 장수하면, 부유해지면, 명예로우면, 사업에 성공을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조건을 내가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데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것입니다. 어떤 것을 갖추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행복을 찾는 비법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지만 이것이 복이다 라고 붙잡은 것이 내일이 되면 복이 안 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연상하면서 그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그런 개념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행복 자체를 결코 논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복은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가짐으로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세속적 사고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가진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복된 사람으로 만들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복입니다. 그 분이 복의 실체이며 복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복이심과 동시에 우리를 복의 사람으로 만들기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머무는 곳이 복이 있는 곳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복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복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머무는 자리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하려면 식구 중 한 사람이라도 복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 가정이 행복한 것입니다.
복된 정서를 가지자
일반적으로 사계절에 관한 정서가 건전한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사계절은 우리 정서 속에서 가지각색으로 반응합니다. 어떤 이들은 봄을 노곤한 계절, 피곤해지는 계절이라 하고 꽃샘추위가 다가오면 금년 봄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등 봄을 반응하는 정서가 대단히 많습니다. 여름이 왔을 때도 지긋 지긋한 무더위가 빨리 물러갔으면 좋겠다, 장마가 지면 또 장마를 걱정합니다, 가을이 되면 허무한 계절이다, 낙엽이 뒹구는 모습을 보고 처량하다고 느낍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눈 좀 덜 왔으면 좋겠다, 겨울이 되니까 사람이 게을러진다는 등 계절을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생명의 약동감을 느끼고 여름의 녹음을 보면서 성숙함을 보고 가을의 결실과 무르익음을 통해서 어떤 깊은 의미를 느끼고 겨울의 남성다운 당당한 멋을 또한 누릴 줄 아는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정서와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정서는 그 사람의 삶의 질에 있어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때가 좋았어! 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뭐라고 해도 고향에 살 때가 좋았다, 옆에 마누라를 앉혀 놓고도 총각 때가 좋았어! 라고 합니다. 마누라 듣는데 왜 그 소리를 공연히 하느냐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여건은 없다
여러분, 행복해질 수 있는 여건은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건과 관계없이 행복합니다. 바쁘면 일이 많아서 좋다고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해도 하나님과 깊은 기도로 연단 받는 기회로 삼아서 좋고 건강하면 또 열심히 일하고 평소에는 남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 줄도 알고 역경이 오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의 연단을 받는 것은 여건 따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 따라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여건과 관계없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실 때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너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복의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복론은 전부 조건을 말합니다. 가령 하루에 상대방을 향하여 사랑한다는 말을 세 번 하라, 그러면 행복해 질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차적인 방법론이지 여건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살기 좋다해도 에덴동산 같은 환경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담, 하와가 에덴동산의 그 좋은 환경에서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서도 행복했습니다. 요셉은 종살이하면서도 행복했습니다. 요셉으로 인하여 원수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복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머무는 곳에는 원수도 복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머무는 감옥에 있는 사람도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행복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된 사람이 된다는 조건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에덴동산에 가서 살아도 죄를 짓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복의 사람이 되면 악인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배우고 듣고 읽고 즐거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가뭄을 타지 않는 나무, 잎이 청청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복 있는 사람이다 라는 조건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열매맺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복덩어리로 살라
우리 속언에 '복을 받으려면 복 받을 짓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은 행실을 통해서 주어지는 조건이 아닙니다. 복 받을 행실을 하기 때문에 복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행복론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복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복의 사람이 되어야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낳아서 얘가 내 아들 딸이 될만한가, 공부하는 것 봐가면서 아이큐가 높나 안 높나, 행실이 내 마음에 드나 안드나 분석해서 호적에 올립니까? 부모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나면 내 혈육이라는 것만 가지고 아무 조건없이 호적에 올립니다. 인물 따지고 아이큐 따지고 행실 따져서 우리를 입적시키지 않았습니다. 혈육이라고 하는 그 관계 하나 때문에 모든 여건을 초월하는 가치가 혈육이라는 것입니다. 혈육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합니다. 비록 몸이 불편하게 태어났다 할지라도 기꺼이 내 아들 딸로 호적에 올리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우리 집에 이제 9개월 된 손녀가 며칠 머물렀는데 아무리 봐도 못났습니다. 주일날 우리 교회의 아이들을 보지만 우리 손녀보다 잘 생긴 아이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못난 손녀가 가끔 보고싶을 때가 있더라고요. 내 생각 속에서는 그렇게 귀여운 애가 없습니다. 한번씩 인터넷에 들어가서 사진을 보면 잘 생긴 탈렌트들 보다 손녀가 더 귀엽습니다. 며느리와 가끔 전화할 때 막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납니다. 돐도 안 지났으니까 무슨 뜻이 있겠어요. 그저 고함을 지르는 것이지요. 수화기를 대고는 할아버지다 한번 떠들어라 하고 옆에서 엄마가 자꾸 부추기니까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에게 겁도 없이 뜻도 없는 소리로 막 떠듭니다. 그러나 뜻도 없는 손녀의 그 떠드는 소리가 하늘의 어떤 천사의 노래 소리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게 혈육이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이 복이다 라며 복을 주는 관계로 우리를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송두리째 소유하고 싶은 복의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는 복 덩어리가 되도록 원하는 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조건을 가지고 다가갑니다. 내가 이만하면 교인다운 모습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란 것입니다.
진정한 복의 의미
행복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만 갖추어지면 됩니다. 첫째는 내가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마음을 나눌 사랑의 대상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두번째는 일을 할 때 보람있는 안정된 일을 가지고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날이 밝았는데도 오늘 무슨 일을 할까 하는 사람들은 사실 행복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몰두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번째는 어떤 비전을 걸고 내 앞길은 소망이 있다는 그 소망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만 가지고는 행복의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영원히 사랑할 대상이 과연 무엇일까요? 영원히 가치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영원한 소망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렇게 접근을 해보면 쉽지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불행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붙잡았는데 한 평생동안 보장해주지 못하는 헛된 사랑의 대상이 이 땅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이 세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지 않으면 답이 없습니다. 영원한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아야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가족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영원히 붙잡을 사랑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사랑을 받아 보아야 영원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일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소명감을 느끼고 일해야 그 일이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일이 소명감입니다. 소명감 없는 단순한 돈벌이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못합니다. 복음을 위한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된 구원의 소망을 가진 자라야 영원한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복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복의 책입니다. 그러나 이 복을 근원적인 한 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복 받기를 원하는 거래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얻어야만 복되다는 거래가 아닙니다. 내가 복된 사람으로 살아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가와도 행복을 누리고 여건과 관계없이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임금님이 백성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조사해보려고 사람이 다니는 길목에 큰돌을 하나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돌을 쳐다보면서 누가 이 돌을 길 한 가운데 가져다 놓았나? 왜 그랬을까? 라는 표정으로 돌을 피해서 가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 눈 팔다가 그 돌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누가 돌을 여기에 가져다 놓아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느냐고 욕을 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러나 한 채소장사는 수레를 끌고 가다가 수레를 세워놓고 그 돌을 들어다가 길가로 옮겼습니다. 돌을 옮겨놓고 보니 그 돌 밑에 금화가 수북히 있었습니다. 그 금화를 보니 편지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돌을 옮기는 사람에게 이 금화를 주노라.' 이것이 고사에 나오는 우리 인생살이를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 어떻게 사시렵니까? 복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살렵니까? 돌에 부딪혀서 욕지거리를 하면서 살렵니까? 채소장사는 돌을 옮겨 놓을 만큼 여유를 가진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이 금화를 가져야 됩니다. 그 앞에 가던 사람들이 금화를 가지면 카지노 바로 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복을 감당할 사람을 만들어놓고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복을 무조건 주시고 그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복의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순종의 의무가 없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순종해야 됩니다. 왜냐 하면 구원의 복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지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 안에 주어진 의미는 인생은 복의 길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행복론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의 사람이 되어서 내가 머무는 가정이 행복하고 내가 일하는 일터가 행복하고 내가 섬기는 교회가 행복하고 내가 사는 이 땅과 이 시대가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