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42
행복하게 살자 (신명기 10:13)
오늘 이 시간에 "행복하게 살자", 이런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행복하게 살자", "행복하게 살자."
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행복을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행복을 주셨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행복은 잊어버리고 행운만을 찾으려고 방황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아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다가 네 잎 클로버를 찾게 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올 행운을 기대하며 책갈피 속에 소중하게 보관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것을 한번쯤 안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흔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바로 "행복"입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복", "행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온갖 행복을 그냥 지나쳐버린 채, 행운만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이 나는 아닌지, 각자 자기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소원이 있다면 인간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 보니까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랬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네 행복을 위하여}.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행복을 위하여 소원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행복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행복을 더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행복인지 깨닫지 못하면 행복하게 살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을 합니다. 시편 49편 20절 말씀입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존귀한 자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왜요? 예수님의 신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왜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신 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성경은 말합니다.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의 가치를 모르면 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행복은 "소유"가 아닌 것입니다. 부나 권세나 명예나 건강이나 아름다움을 소유했다고 그래서 그것이 행복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돈을 주고 좋은 집은 살 수 있으나, 행복한 가정은 돈주고 못 산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복권 당첨과 같은 "행운"도 아닌 것입니다.
이 시간,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봄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다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복하게 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정직할 때
첫째로, 우리는 언제 행복하냐? "정직할 때" 행복합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살면 행복하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떳떳하고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반면 거짓말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가진 게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도적질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IMF를 당한 우리나라인 것입니다. "투명성" 없는 경영과 정치 때문에 수많은 대기업이 무너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직하지 못합니다. 2001년도 국가별 부패지수를 보니까 OECD나라 중 어느 나라가 제일 부패지수가 높으냐? 한국인 것입니다. 한국이 제일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부패지수가 낮은 나라, 부패가 제일 없는 나라는 핀란드인 것입니다. 부패가 제일 많은 나라, 42나라 중에 42번째가 한국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웃을 일이 아닙니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한국에 1천 2백만 신자가 있습니다. 4만 5천 교회가 있습니다. 10만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제일 부패한 나라, 부패가 제일 높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목사는 목사 책임, 장로는 장로 책임, 권사는 권사 책임, 집사는 집사 책임, 평신도는 평신도 책임인 것입니다. 이런 나라가 되지 아니하고 우리가 정직한 나라가 되어지기 위해서는 나부터, 우리부터 정직을 말하고, 정직을 가르치고, 정직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직을 말해야 됩니다. 정직을 가르쳐야 됩니다. 정직을 행해야 됩니다. 가정에서 정직을 가르쳐야 됩니다. 교회에서 정직을 가르쳐야 됩니다. 학교에서 정직을 가르쳐야 됩니다. 이 사회에서 정직을 가르쳐야 됩니다. 나라도 정직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할 때, 하나님은 복 주십니다. 잠언서 14장 11절입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로 '복'은 '에쉐르'입니다. 이 말은 뭐냐? '아솨르' 즉 '정직하게 행하다'에서 온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복'은 뭘 말하냐? '정직하게 행하는 데서 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복'은 '정직하게 사는 거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복'='정직하게 사는 것',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 하더라도, 예수 믿었다 하더라도,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정직하지 못하면 사울 왕처럼 버림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헌금을 했다 하더라도, 정직하지 못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벌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정직하면, 솔직하게 죄를 고백하면, 자백하면, 잘못했다고 말하면, 회개하면, 용서를 받아서 다윗 왕처럼 회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15장 8절입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직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얻는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의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84편 11절에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일평생 행복하게 사는 비결.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루를 행복하려면 목욕을 하십시오. 1주일을 행복하려면 새 옷을 사 입으십시오. 3개월 행복하려면 말을 타십시오. 3년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십시오. 그러나 일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하십시오." 아멘 입니까? 일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 하라고 말합니다.
둘째, 사랑할 때
두 번째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야 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어떻게 살아야지 행복할까?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나도 행복하고, 남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내들이 들어야 됩니다. 아내가 출근하는 남편에게 "다녀오세요"하고 키스해주면 남편의 사고율이 감소되고, 수명도 5년이나 더 연장됩니다. 여러분, 내일부터 남편이 출근할 때, 현관문에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남편에게 "다녀오세요." 그러고 말만 "다녀오세요." 그러지 말고 키스해주면, 남편의 사고율이, 직장에서 업무 사고율이, 일 현장에서 안전사고 사고율이, 교통사고 사고율이, 그 사고율이 감소됩니다. 수명도 5년이나 더 연장된다, 그 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랑하면 행복한 것입니다. 1세기 카타콤 벽면의 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므로 천국을 경험한다." 여러분, 로마에 가면 지하 땅굴인 카타콤을 우리는 방문합니다. 한 3백여 년 동안 로마 전국의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핍박을 피해서 땅굴을 파고 거기서 생활을 했습니다. 거기서 태어나기도 하고,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하므로 천국을 경험한다." 지하 땅굴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에 살면서도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므로 천국을 경험한다." 사랑하면 어떤 고난과 희생도 행복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사랑하면 행복하게 느끼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아내를 제일 많이 사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누구일까요? 야곱.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14년을 하루처럼 여겼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29장 20절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여러분, 사랑하니까 그렇게 7년이 외아저씨집에서, 외삼촌집에서, 양을 기르고 땀흘리고 애쓰고 수고하는 모든 것을 하는데, 중노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이 며칠 지나가는 것처럼,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면, 어떤 고난도, 어떤 고난도 고난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감사, 감격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제 구세주이신 예수님, 메시아이신 예수님, 하나님 아들 되신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매 맞으셨습니다. 가난하셨습니다. 가시관 쓰셨습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셔서 십자가 위에 죽으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 고통을 고통으로 보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예수님 사랑하고,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될 입니다. 성경에는 613가지의 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또 요약하면 10계명입니다. 또 10계명을 다시 요약하면 두 계명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우리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와 같이 네 이웃을, 사람을 사랑하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요약된 두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사람을 사랑하라." 그것을 하나로 딱 묶으면 뭡니까? "사랑하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면,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고, 하나님 아버지도 더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사랑 받기 원하십니다. 잠언서 8장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그랬습니다. 또 잠언서 8장 21절에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함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랑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절과 2절, 사랑 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그랬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랑을 알고 있지만,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랑을 하지 않는 것, 이게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은 뭐냐? 사랑은 생각하는 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뭐냐? 사랑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괴롭다고 말합니다. 뭐, 이용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면, 사랑하면 남에게 핑계대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그냥 다 좋은 것입니다. 그냥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십니까?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남편이 사랑하는 것만큼 아내도 사랑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 자식도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주가 직원을 사랑하는 것처럼 직원도 사용주를 사랑하고, 또 회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정부가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이 정부를 사랑하고, 국민이 정부를 사랑하는 것처럼 또 정부는 국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사랑하는 것처럼 스승도 제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또 제자도 스승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성도도 목회자를 사랑해야 그 교회공동체가 건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러므로 아름다운 사랑은 뭐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짝사랑은 사랑일까? 여러분, 좋은 것은 뭐가 좋아야 됩니까? 열매가 좋아야 됩니다. 짝사랑은 사랑의 시작일 수는 있지만, 끝까지 그것이 짝사랑이었다면 누군가 말했습니다. 짝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우리가 사랑하면, 사랑하면, 사랑하면, 미움도 시기도 질투도 다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면 그렇게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 속에 뭐가 있습니까? 미움이 있습니다. 시기가 있습니다. 질투가 있습니다. 원망함이 있습니다. 불평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면, 사랑하면, 이런 것들이 다 뽑혀나가요. 다 뽑혀나가서 우리 모두가 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힘든 세상에서 서로 위로가 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서로 힘들다고 말합니다. 남편도 힘들어요. 아내도 힘들어요. 그것뿐이 아닙니다. 어린 자녀들이 학교공부 할 때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부모님들이 나가서 자녀들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돈벌기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사랑하면 힘들게 생각되지 않아요. 사랑하면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도 행복하고,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우리가 믿음은 보이지 않아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랑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인지, 제자 아닌지 몰라요. 그러나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우리보고 믿음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아, 저 사람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구나. 예수님의 제자이구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도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 서로 서로, 서로 서로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셋째, 일할 때
세 번째, 우리가 언제 행복합니까? "일할 때" 행복하다. "일할 때" 행복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안 늙게 보이려고 몸부림칩니다. 뭐, 다이어트 식품을 먹습니다. 뭐, 에어로빅을 합니다.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늙으면, 나이가 많으면 피부가 쳐지니까 쳐지지 않게 한다고 막 올립니다. 여러분, 이거 올린다고 안 늙어지나요? 따라합시다. "놀면 늙어지고, 일하면 젊어진다." 아멘.
놀 때보다 일할 때,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놀면 행복하지 못합니다. 일하면 행복합니다. 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주신 창조 질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놀고 먹었다고만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땀 흘리며 일하는 존재였던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보세요. 창세기 2장 5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그랬습니다.
또 창세기 2장 15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그랬습니다. 이 창세기 2장,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은 창세기 3장에서 타락했습니다. 창세기 2장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기록된 말씀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의 "경작하다"와 "다스리다", 모두가 히브리어로는 "아바드"인 것입니다. "아바드"는 "일하다", "경작하다", 그런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은 일 안 한 곳이 아니라, 기쁘고 즐겁게 행복하게 일하는 곳이었습니다. "아, 내 팔자야"하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즐겁게, 일하는 곳입니다. 일할 수 있는 곳이 천국이고, 일할 수 없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IMF 경제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원치 않게 퇴직을 당했거나, 사업이 부도가 났거나, 일할 수 있는 그 건강이 있고 기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터가 없어서 일하지 못한 사람은 돈이 없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마음이 지옥 같음을 체험해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강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는 것, 이것은 큰 은혜요, 큰 행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일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일하십니다. 예수님도 일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일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일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30세가 될 때까지 요셉 아버지, 목수인 요셉 아버지의 일을 도와서 목수 일을 했습니다. 땀 흘리고, 애쓰고 수고하고 목수 일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 4절에 보니까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해야 됩니다. 가정의 일해야 됩니다. 직장의 일해야 됩니다. 학생의 학업의 일해야 됩니다. 군인은 군인의 일해야 됩니다. 경찰은 경찰의 일해야 됩니다. 정치가는 정치의 일해야 됩니다. 성도는 교회 일해야 됩니다. 가정의 일, 직장의 일, 교회 일, 자기 맡은 일의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행복해집니다. 열심히 일하면,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습니다. 보람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또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됩니다. 열심히 일하면, 가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배워라!"(잠 6:6) "일하기 싫은 자여, 먹지 말라"(살후 3:10),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됩니다.
잠언서 12장 27절에 보니까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우리가 부지런하면 부가 와요. 부지런하면 먹고 살 수 있어요. 우리가 부지런하면 굶을 사람 죽은 먹어요. 부지런하면 죽 먹을 사람 밥 먹어요. 부지런하면 밥 먹을 사람 고기도 먹을 수 있어요. 부지런하면 저주가 물러가고, 가난이 물러가고, 우리는 부요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특히 우리는 자기가 먹기 위해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봉사의 일. 이웃과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봉사입니다. 기독교는 봉사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전도를 많이 해도, 교회가 봉사에 등한히 하고 봉사하지 아니하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끼리 봉사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생활보호대상자, 독거노인, 또 소년, 소녀가장, 장애인, 외국인 근로자 중에 고통 당하는 자, 그런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 오래 살기 원합니다. 누가 오래 사느냐? 남을 돕는 사람이 훨씬 오래 산다는 최신 뉴스가 있습니다. 2002년 11월 15일자 뉴스입니다. 미국 미시간 대학 사회연구소의 스테파니 브라운 심리학자는 심리학 전문지 {심리과학} 최신호에 게재된 보고서를 통해서 이 같은 입증을 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부부 423쌍에 대해서 5년 동안 신체적, 정신적 건강상태, 생활습관 등을 조사한 결과 가족이나 친지 등 남에게, 이웃에게 베푸는 사람들의 생존율이 이기적인 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보다 2배 이상 높았다, 그랬습니다. 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만 생각하면 수명과 연관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랬습니다. 이 브라운 박사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하면 스트레스와 관련된 호르몬의 분비가 감소해서 면역력이 높아지고, 생리작용이 활발해진다,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또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 왜 남성보다 여성이 더 장수하느냐? 남성보다 여성이 더 오래 사느냐?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긴 것은 자원봉사활동을 하거나, 손자, 손녀를 돌보는 등 노후에 남을 돕는 일을 남자보다 여자들이 많이 하기 때문에 여자의 수명이 남자보다 길다, 그랬습니다.
목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철학자의 행복 정의를 하나 알려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스위스 철학자 칼 할티는 {행복론}이란 책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인생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인생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5일 근무제라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이제 가자", "자연으로 돌아가자", "스키장으로 가자", "산으로 가자", "바다로 가자", "골프장으로 가자", "가족들 한번 쉬러 가자." 네, 가족 쉬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뭐냐? 가족과 함께 주일날 교회 와서 주일 성수하는 그것,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을 드리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 또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것인 것 아시기 바랍니다. 누가 행복하냐?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이나 저는 행복의 구경꾼이 아니라, 행복의 주체인 것 아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최성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