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6:21-24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21-24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많은 사람이 뒤따르면서 비웃고, 침뱉고, 채찍질하며, 조롱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를 비웃고 조롱하며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그랬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도피하거나 숨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핍박이 뒤따르더라도 넘어지고 깨어지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1. 내 십자가는 내가 지자

십자가는 고난과 멸시를 말합니다. 환난과 핍박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자기가 감당해야 합니다. 첫째로, 인간에게는 육체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육체의 십자가라 함은 질병을 말합니다. 가난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체장애가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남에게 지울 수 없습니다. 누가 대신 져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질 수 있든 질 수 없든 끝까지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마음의 고민이나 고통을 말합니다. 사실 남모르게 밤을 새워 눈물흘리며 탄식하며 괴로워하는 자가 많습니다.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셋째로, 영적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주와 멸망과 형벌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에게나 육체의 십자가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지지 못해서 정신적으로 이상한 증세를 보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집을 나가는 일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살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육체의 십자가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외국에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려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혼해서 아내라는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계약결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을 했으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얼마 기간동안만 살기로 약속을 합니다. 계약 기간만 함께 삽니다. 계약 기간이 만료가 될 때에 함께 살기 싫으면 헤어지고 더 살고 싶으면 또 계약을 맺습니다. 이것은 곧 한 사람에게 얽매이기 싫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결혼을 해도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식을 짐으로 여깁니다.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매이기 싫다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일찍 혼자 됐어도 자식을 자기 십자가로 알고 모두 키웠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 자기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모두가 자기 운명으로, 자기 십자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운명은 내 운명이고 네 운명은 네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빌립보서 2장 4절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고 있고, 또한 져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 우리는 민족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며칠 전 저녁에 뉴스를 보니까 남북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남북 대화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지만 이번 같은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북측 대표가 하는 말이 서울은 멀지 않고 전쟁준비는 다 되어 있다고 하면서 엄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엔 핵사찰 문제로 국제적으로 고립이 되니까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 그런 줄로 압니다만 우리가 가볍게 생각할 것은 아닌 듯 했습니다. 우리는 민족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 유관순이나 안중근 같은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운명을 자기 운명으로 생각했습니다. 민족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형제 친척 골육을 위한 마음의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롬9:1-3).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있어야 합니다(출32:32).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모두가 구원받고 함께 살아야 하겠다는 남의 운명을 자기 운명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다.

나의 십자가라 하더라도 감당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의 가정의 십자가도 지셨습니다. 민족의 십자가도 지셨습니다. 인간의 그 모든 짐(십자가)을 지셨습니다(갈3:13).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죄가 있으신 것도 아닙니다.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 분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가 멸시를 받은 것은 내가 받을 멸시를 대신 받으신 것이요, 그가 침뱉음을 받은 것은 곧 내가 침뱉음을 받을 것을 대신 받으신 것이요, 그가 채찍에 맞은 것은 내가 채찍에 맞을 것을 대신 맞은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곧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져야 했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롬6;23).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나의 십자가입니다.

4. 십자가를 지고 따르자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아무 의미 없이 따른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군중심리에 의해서 따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흥미를 갖고 따랐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당시에 최고의 형으로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승리감을 갖고 따랐습니다. 바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입니다(21). 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십자가에 못박을까 하고 고민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자 얼마나 통쾌하고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 승리감을 갖고 따른 것입니다. 반면에 두려움으로 따라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할 때에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뒤에는 제자들이 따랐어야 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보이지 않고 멀리 뒤에서 두려움으로 따랐습니다. 참된 제자라면 십자가를 지고 따랐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 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24).

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까? 첫째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따르면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4:27). 둘째로, 십자가를 져야 영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십자가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지고 따릅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이기 때문에 지고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가 무겁고 힘들수록 은혜가 클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보람이 클 것입니다. 우리는 자원함으로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되 내가 선택해서 지지 맙시다. 십자가는 고난이요 멸시요 천대입니다. 그 어떤 십자가도 주님이 내게 지워 주시는 것이라면 기쁨으로 집시다.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나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기 때문에 질 수 없고 내가 원하는대로 선택해서 십자가를 진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좀 더 가볍고, 좀 더 쉬운 십자가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여 지는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택을 한다면 오히려 더 무겁고, 더 힘들고, 그 누구도 지지 않는 십자가를 선택하는 성도가 됩시다.

또한 십자가를 내가 만들지 맙시다. 바울이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빌3:18).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는 말은 십자가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쑥덕거리는 것이 십자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비방하고 말을 만드는 것이 십자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에 의해서 주님은 더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올 때에 무감각하지 맙시다. 외면하지 맙시다.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십자가를 허락하심은 또한 질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그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동정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면서 책망하셨습니다(마16:21-23). 동정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고통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난 후에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고난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고난은 잠깐입니다. 후에 그 영광은 영원합니다. 바로 그 영광 때문에 고난을 이깁니다. 부활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담대히 나아갔던 것입니다(히2:6-10). 무거운 십자가를 지면 영적으로는 더 가볍게 됩니다. 큰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김충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