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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3:4-6
얼마전에 도올김용옥이라는 분이 '구약 폐기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구약을 왜 폐기하나. 2가지 정도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 구약은 엄연한 유대교 경전이다라는 것입니다.
둘째 구약.신약 할 때의 '약'은 계약인데 구약은 헌 계약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헌 계약을 갱신하고 새 계약을 만들었으면 새 계약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구약은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에게 신앙의 대상일 수 없다. 이에 반기를 들면 그는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정말 단지 유대교의 경전으로만 대해야 합니까? 정말 구약은 더 이상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헌계약입니까? 이미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구약은 유대교의 경전이 아닙니다. 구약은 헌계약이 아니라 옛계약으로서 지금도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 할 중요한 약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구약에 대한 내용의 말씀이 나오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해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올같은 주장을 하게 되면 우리는 정말 그런가 마음의 갈등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은 더 이상 우리가 폐기해야 할 헌계약이 아닙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마치 구약은 이스라엘 역사로만 알고 구약은 유대교의 경전으로만 알고 구약을 인정하지 않고 폐기해야 한다고 한다면 반쪽 기독교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구약의 율법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요 페기해야 할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안내를 받게 됩니다.
과연 구약의 핵심적인 약속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오실 메시야의 약속에 대한 내용입니다. 메시야란 히브리어이고 헬라어는 그리스도란 의미입니다. 이 말은 기름부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기름부름을 받는 직분이 3가지 있는데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부으신 자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응답과 사역과 하신 말씀들이 주 내용입니다. 신약에 오신 예수님은 왕 선지자 제사장의 완성자인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의 39권 내용을 보면 그 핵심 내용이 바로 이땅에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의 내용들입니다.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 메시야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고 그 오신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 메시야는 아울러 아브라함의 후손이면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메시야의 역할에 대한 약속이 소개되는 성경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합니다.
이사야에는 신약에 메시야로 오시는 그 분을 하나님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이땅에 메시야가 오시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사야서 53장에서는 이땅에 오신 메시야가 종으로 오셔서 고난받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인정할 것은 예수님은 구약에 약속하신 메시야로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놀라운 신성과 영광 권세를 내려놓고 이땅에 종으로 오셔서 고난과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오늘 본문은 약속하였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고난당하심과 죽으심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일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의 고난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 예화가 있습니다.
사실 이 예화는 실제로 있을 수 있었던 내용입니다.
어느 교회에 세례를 받기 위해 각기 세례 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공부를 마친 사람들은 드디어 주일날 예배 후 목사님 앞에서 세례 문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시어머니를 전도하여 시어머니가 드디어 세례문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며느리는 목사님의 질문에 시어머니가 어떻게 대답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몇까지 교리적인 것을 미리 가르쳐 줄려고 설명을 했습니다.
‘어머니, 목사님이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물으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대답을 하세요’ 하자 ‘알았다.’고 잘 알아들었습니다. 다음 주일 날 예배 후에 세례문답을 시작합니다. 목사님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하면서 며느리가 가르쳐 주었던 질문을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 하자 이 시어머니는 얼른‘예 그것은 우리 며느리 죄 때문입니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번주간은 2007년도 고난 주간이고 다음 주간은 부활주간입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는 다함께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당하여 주셨습니다.
사53: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여기 예수님께서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 하십니다.여기 질고란 무엇입니까?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질병입니다. 영육간의 고통입니다. 우리의 영육이 질병을 질때 그것처럼 우리의 삶을 힘들게 슬프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위해 고난받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역사는 질병의 역사입니다.그 질병과 함께 슬퍼하고 결국 죽음을 맞습니다.
역사이래로 질병없는 삶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보다 점점 더 많은 질병들이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아무리 불경기가 와도 병원은 불경기가 없는 것같습니다. 요즘 과거보다 더 의약이 발달하고 잘 먹는 데도 불구하고 각종 성인병 치유할 수 없는 에이즈와 같은 병들이 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사람들은 건강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건강의 문제입니다. 유태인의 탈무드에 보면 건강과 관련한 지혜의 글들이 많이 소개됩니다.
그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건강의 규칙 중에서 다음 3가지가 크게 강조되었습니다.
우선 건강하려면 정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결의 예로서 아침에 찬물 한 방울과 저녁에 손과 발을 씻는 것은 세계에 있는 어떤 안약보다 좋은 것이다. 그래서 저도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찬물로 손과 눈을 씻습니다.다음 머리의 불결은 눈을 멀게 하며 의복의 불결은 정신이상이 생기게 하고 신체의 불결은 종기가 나게 하고 몸을 짓누르게 한다. 그러므로 불결하지 않도록 하라.
두번째 건강하기 위해서는 음식물의 절제를 필수조건으로 강조합니다. 배의 용량의 3분의 1을 먹고 3분의 1을 마시고 3분의 1은 비게 하라고 합니다. 식사 할때에는 좀더 먹을까 하는 때에 음식에서 손을 떼고 변기가 있을때에 지체하지말라 합니다. 40세가 되기까지는 먹는 것이 이롭고 40세 이후에는 마시는 것이 이롭다. 그리고 모든 일에도 건강하려면 절제하라고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앉아있지 말라. 치질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서있지 말라 심장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걷지 말라. 눈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앉는데 3분의1을 보내고, 서있는데 3분의 1을 보내고,걷는데 3분의 1의 시간을 보내라고 합니다
셋째 건강하기 위해서는 휴식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밤은 잠자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새벽녘에 잠자는 것은 단단한 강철끝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침잠은 그 자는 사람을 세상에서 내쫓아 버리고 낮잠을 밤잠보다 더 오래 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인간이 연속해서 3일간 자지 못하면 살 수 없다고 믿었다.
물론 이 밖에도 많은 건강규칙들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건강에 좋다고 하면 웰빙음식 웰빙체조 웰빙건강식품들을 동원하여 건강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건강의 주인은 우리 주님이십니다.모든 질병의 근본을 고치시고 치유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실 때 육체의 질병,정신적인 질병을 얼마나 많이 고쳐주셨습니까?
(마8:16-17)“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 인간이 질병에 걸리게 된 것은 죄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후부터 인간은 병들고 늙게 되었습니다. 왜 인간이 병들도 늙게 되었을까요? 사실은 죄로 인하여 땅이 이미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완전한 건강을 땅에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이 땅에 저주를 가져 왔습니다. 이 것은 원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으면 병고침을 받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질병들이 믿음 안에서 고침받습니다. 이미 여러분의 경우도 고침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질병들이 죄로 인하여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죄가 용서받으면 죄로 말미암은 병도 고침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병고침을 받는 자들을 보십시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죄사함을 받았다“라고 선언하면 병을 고침받습니다. 사실 그래서 예수믿으면 질고에서 해방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질고에서 자유한 복을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태어나서 정말 바로 예수믿고 바로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대개 우리는 인생을 죄대로 살다가 어느순간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죄는 용서받지만 죄의 흔적들이 몸에 많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가령 나무에 못을 박았다가 빼면 자국이 남는 법입니다.
물론 모든 질병이 낫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바울같은 이도 질병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안질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위장병이라고하고 어떤 이는 간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가 간절하게 3번 기도하였지만 낫지 못하였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 몸에 질고를 고통을 겪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이 질고를 갖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고보서 기자는 믿음의 기도를 할 것을 권합니다. 야고보서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의 기도를 통한 이적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병낫기를 기도할 때 약5:16“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사실 모든 병이 죄와 관련있다고 할 수 없지만 사실 많은 질병이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유의 은혜는 믿음의 기도와 아울러 회개의 기도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큰 죄이든지 작은 죄이든지 나의 질고를 담당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아뢰며 회개하고 기도하는 삶이 될 때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도 목장에서 서로 병든 자를 위하여 손을 얹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시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질병이 물러가고 치유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예배드리다가 병이 낫습니다. 육체의 질병도 낫고 마음의 질병도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체적인 질병과 마음의 질병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나의 질고와 슬픔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여 주심을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기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하여 주었습니다.
사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 보면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찔리시고 상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죄의 삯인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습니다.
이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조차 그런 말을 합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집안에 매일 열심히 청소하고 깨끗이하여도 아침에 유리창으로 햇빛이 비치어 보면 너무도 많은 먼지가 방안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부패하고 가장 더러운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부패한 마음에서 부패한 말이 나옵니다. 부패한 마음에서 부패한 행동이 나옵니다. 그 허물과 죄악으로 이땅에서 부패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 마지막 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그 부패와 허물을 해결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이 세상은 부패와 허물을 공격하고 정죄합니다. 매일 우리가 대하는 신문 티비뉴스는 대개 부패와 허물을 까발리고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대부분 이 세상 사람들은 허물과 부패를 밝혀내는 데는 너무나도 도가 텄습니다. 그런 허물과 죄를 찾아내서 벌금으 물리고 감옥에 넣고 여러 가지 징계를 주는 법과 제도가 너무나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남편을 6명 둔 여인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3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한 제자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교회를 앞장서서 핍박하고 심지어는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악과 허물에 대하여 용서받습니다. 아담안에서 물려받은 원죄가 용서받습니다. 조상때부터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내가 이땅에서 살면서 지은 모든 자범죄를 용서받습니다. 주님이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 죄가 해결받을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누리게 된줄 믿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세상에서 현실적으로 누리는 많은 복 중에서 심령의 복 처럼 큰 복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물질의 복을 많이 강조하지만 신약으로 올수록 성경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복을 보면 심령의 복이 더 강조되는 것을 봅니다 왜 구약에서는 물질의 복을 많이 강조하고 신약에 들어와서는 심령의 복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구약을 성취시키고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라고 봅니다. 물질의 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심령에 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안에서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귀한 복 평화의 복 심령의 복모두가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주님이 용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결국 죄책감의 포로가 됩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용서를 나의 용서로 확신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놓아주어야 합니다.주님은 우리의 심령에 평화가 있기를 소원하십니다.
상담을 하면서 맣은 분들에게 “예수믿고 가장 변화된 것이 무엇입니까?” 하면 이구동성으로 가장 많이 하는 답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라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합니다. 요한복음16: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합니다.
예수안에 있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얻습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자유함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여러분 누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마음의 평화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마음에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미워하면 가장 손해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주님이 나의 허물과 죄를 무조건 용서하심같이 우리도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 사람이 허물과 죄가 없어져야 용서하고 그 사람이 완전해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생각입니다.중요한 것은 마음과 생각을 조그만 바꾸어도 인생은 행복하고 자유하고 즐겁습니다.
죤웨슬레의 전기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존웨슬레가 미국 조지아주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그 배에서 한 장군과 무척 친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그 배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가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러자 이 장군이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를 향해 “저 놈은 내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웨슬레는 친구인 장군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장군님 장군님이 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장군께서도 결코 실수함이 없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도 실수할 가능성이 있고 그도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그 장군은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 앞에 베드로가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베드로는 7번까지만 용서하면 큰 용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 지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용서하지 않을때에 큰 책망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일만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를 하십니다. 만달란트의 빚을 진 사람이 있습니다. 만달란트의 빚은 이 사람이 평생 갚을 수 없는 큰 빚이었습니다. 주인이 명하기를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종이 엎드려 말을 합니다.“ 내게 참아주소서 다갚으리이다”라고 합니다. 그 종의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만달란트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 종이 나가다가 백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합니다. 그 친구가 간청하기를 ”참아주소서 갚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허락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 동료들이 그 일을 보고 주인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탕감하여 준 종을 불러다가 꾸중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 그리고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여기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만단란트 종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갚을 수 없는 큰 은헤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주님은 서로 긍휼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 것같이 그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를 내 힘으로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허물과 그의 약점과 부족함을 위해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내 심령이 오히려 주님의 위로와 복을경험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는 믿음의 사람에게 진정한 주님의 평강과 자유의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세째 이 모든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 같이 잘못된 길을 같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악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을 시키신 것입니다.
여기 “담당”이란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대신하여 당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여 담당하여 대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값인 사망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값인 지옥의 심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10장 45절에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한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복음 중의 엑기스로 여기는 성경요절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합니다. 그것을 바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독생자를 어디에 주셨습니까?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인류에게 수치스러운 제도가 있다면 그 중에 하나가 노예 제도 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노예 제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까? 성경에 “종”이란 말은 다른 말로 “노예”라는 말입니다. 노예는 그 부모도 그가 난 자식도 노예입니다.
미국에서 노예가 매매되던 때의 일입니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 태어난 한 혼혈 여성이 있었는데, 20세 때 그의 소유자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노예 시장에서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100달러로 시작되어 점점 올라가서 1000달러가 되고 다시 1100달러까지 올라 갔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있던 한 신사가 1200달러에 그녀를 샀습니다.
그 신사는 그녀를 자택으로 대리고 와 즉시 ‘자유증서’를 작성하여 건네주며 “너는 이제 자유의 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노예를 어떻게 가지고 놀거나, 어떻게 대하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쳐다보지도 않고 “거짓말이겠지요.” 라고 응답합니다.
그러다 잠시 신사와 승강이를 벌입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자신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기뻐서 집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크게 소리를 쳤습니다.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중에 그녀는 후에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는 감격을 꼭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의 심정과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이 세상의 노예보다도 더 비참한 죄의 노예에서 자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셔서, 그 핏값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전혀 어떠한 공로나 인간적인 조건이 없었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우리 주님의 이 사랑에 감복하여 이제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 나를 위한 고난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위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나를 위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질고와 슬픔을 이기고 허물과 죄악을 이기시고 참자유와 기쁨을 날마다 누리시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나를 위하여 고난받으신 주님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제자로 승리하시는 한주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춘수목사 설교 중에서
얼마전에 도올김용옥이라는 분이 '구약 폐기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구약을 왜 폐기하나. 2가지 정도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 구약은 엄연한 유대교 경전이다라는 것입니다.
둘째 구약.신약 할 때의 '약'은 계약인데 구약은 헌 계약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헌 계약을 갱신하고 새 계약을 만들었으면 새 계약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구약은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에게 신앙의 대상일 수 없다. 이에 반기를 들면 그는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정말 단지 유대교의 경전으로만 대해야 합니까? 정말 구약은 더 이상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헌계약입니까? 이미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구약은 유대교의 경전이 아닙니다. 구약은 헌계약이 아니라 옛계약으로서 지금도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 할 중요한 약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구약에 대한 내용의 말씀이 나오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해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올같은 주장을 하게 되면 우리는 정말 그런가 마음의 갈등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은 더 이상 우리가 폐기해야 할 헌계약이 아닙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마치 구약은 이스라엘 역사로만 알고 구약은 유대교의 경전으로만 알고 구약을 인정하지 않고 폐기해야 한다고 한다면 반쪽 기독교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구약의 율법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요 페기해야 할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안내를 받게 됩니다.
과연 구약의 핵심적인 약속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오실 메시야의 약속에 대한 내용입니다. 메시야란 히브리어이고 헬라어는 그리스도란 의미입니다. 이 말은 기름부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기름부름을 받는 직분이 3가지 있는데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부으신 자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응답과 사역과 하신 말씀들이 주 내용입니다. 신약에 오신 예수님은 왕 선지자 제사장의 완성자인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의 39권 내용을 보면 그 핵심 내용이 바로 이땅에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의 내용들입니다.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 메시야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고 그 오신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 메시야는 아울러 아브라함의 후손이면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메시야의 역할에 대한 약속이 소개되는 성경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합니다.
이사야에는 신약에 메시야로 오시는 그 분을 하나님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이땅에 메시야가 오시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사야서 53장에서는 이땅에 오신 메시야가 종으로 오셔서 고난받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인정할 것은 예수님은 구약에 약속하신 메시야로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놀라운 신성과 영광 권세를 내려놓고 이땅에 종으로 오셔서 고난과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오늘 본문은 약속하였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고난당하심과 죽으심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일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의 고난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 예화가 있습니다.
사실 이 예화는 실제로 있을 수 있었던 내용입니다.
어느 교회에 세례를 받기 위해 각기 세례 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공부를 마친 사람들은 드디어 주일날 예배 후 목사님 앞에서 세례 문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시어머니를 전도하여 시어머니가 드디어 세례문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며느리는 목사님의 질문에 시어머니가 어떻게 대답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몇까지 교리적인 것을 미리 가르쳐 줄려고 설명을 했습니다.
‘어머니, 목사님이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물으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대답을 하세요’ 하자 ‘알았다.’고 잘 알아들었습니다. 다음 주일 날 예배 후에 세례문답을 시작합니다. 목사님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하면서 며느리가 가르쳐 주었던 질문을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 하자 이 시어머니는 얼른‘예 그것은 우리 며느리 죄 때문입니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번주간은 2007년도 고난 주간이고 다음 주간은 부활주간입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는 다함께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당하여 주셨습니다.
사53: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여기 예수님께서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 하십니다.여기 질고란 무엇입니까?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질병입니다. 영육간의 고통입니다. 우리의 영육이 질병을 질때 그것처럼 우리의 삶을 힘들게 슬프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위해 고난받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역사는 질병의 역사입니다.그 질병과 함께 슬퍼하고 결국 죽음을 맞습니다.
역사이래로 질병없는 삶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보다 점점 더 많은 질병들이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아무리 불경기가 와도 병원은 불경기가 없는 것같습니다. 요즘 과거보다 더 의약이 발달하고 잘 먹는 데도 불구하고 각종 성인병 치유할 수 없는 에이즈와 같은 병들이 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사람들은 건강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건강의 문제입니다. 유태인의 탈무드에 보면 건강과 관련한 지혜의 글들이 많이 소개됩니다.
그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건강의 규칙 중에서 다음 3가지가 크게 강조되었습니다.
우선 건강하려면 정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결의 예로서 아침에 찬물 한 방울과 저녁에 손과 발을 씻는 것은 세계에 있는 어떤 안약보다 좋은 것이다. 그래서 저도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찬물로 손과 눈을 씻습니다.다음 머리의 불결은 눈을 멀게 하며 의복의 불결은 정신이상이 생기게 하고 신체의 불결은 종기가 나게 하고 몸을 짓누르게 한다. 그러므로 불결하지 않도록 하라.
두번째 건강하기 위해서는 음식물의 절제를 필수조건으로 강조합니다. 배의 용량의 3분의 1을 먹고 3분의 1을 마시고 3분의 1은 비게 하라고 합니다. 식사 할때에는 좀더 먹을까 하는 때에 음식에서 손을 떼고 변기가 있을때에 지체하지말라 합니다. 40세가 되기까지는 먹는 것이 이롭고 40세 이후에는 마시는 것이 이롭다. 그리고 모든 일에도 건강하려면 절제하라고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앉아있지 말라. 치질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서있지 말라 심장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걷지 말라. 눈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앉는데 3분의1을 보내고, 서있는데 3분의 1을 보내고,걷는데 3분의 1의 시간을 보내라고 합니다
셋째 건강하기 위해서는 휴식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밤은 잠자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새벽녘에 잠자는 것은 단단한 강철끝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침잠은 그 자는 사람을 세상에서 내쫓아 버리고 낮잠을 밤잠보다 더 오래 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인간이 연속해서 3일간 자지 못하면 살 수 없다고 믿었다.
물론 이 밖에도 많은 건강규칙들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건강에 좋다고 하면 웰빙음식 웰빙체조 웰빙건강식품들을 동원하여 건강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건강의 주인은 우리 주님이십니다.모든 질병의 근본을 고치시고 치유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실 때 육체의 질병,정신적인 질병을 얼마나 많이 고쳐주셨습니까?
(마8:16-17)“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 인간이 질병에 걸리게 된 것은 죄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후부터 인간은 병들고 늙게 되었습니다. 왜 인간이 병들도 늙게 되었을까요? 사실은 죄로 인하여 땅이 이미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완전한 건강을 땅에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이 땅에 저주를 가져 왔습니다. 이 것은 원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으면 병고침을 받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질병들이 믿음 안에서 고침받습니다. 이미 여러분의 경우도 고침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질병들이 죄로 인하여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죄가 용서받으면 죄로 말미암은 병도 고침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병고침을 받는 자들을 보십시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죄사함을 받았다“라고 선언하면 병을 고침받습니다. 사실 그래서 예수믿으면 질고에서 해방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질고에서 자유한 복을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태어나서 정말 바로 예수믿고 바로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대개 우리는 인생을 죄대로 살다가 어느순간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죄는 용서받지만 죄의 흔적들이 몸에 많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가령 나무에 못을 박았다가 빼면 자국이 남는 법입니다.
물론 모든 질병이 낫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바울같은 이도 질병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안질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위장병이라고하고 어떤 이는 간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가 간절하게 3번 기도하였지만 낫지 못하였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 몸에 질고를 고통을 겪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이 질고를 갖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고보서 기자는 믿음의 기도를 할 것을 권합니다. 야고보서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의 기도를 통한 이적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병낫기를 기도할 때 약5:16“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사실 모든 병이 죄와 관련있다고 할 수 없지만 사실 많은 질병이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유의 은혜는 믿음의 기도와 아울러 회개의 기도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큰 죄이든지 작은 죄이든지 나의 질고를 담당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아뢰며 회개하고 기도하는 삶이 될 때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도 목장에서 서로 병든 자를 위하여 손을 얹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시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질병이 물러가고 치유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예배드리다가 병이 낫습니다. 육체의 질병도 낫고 마음의 질병도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체적인 질병과 마음의 질병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나의 질고와 슬픔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여 주심을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기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하여 주었습니다.
사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 보면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찔리시고 상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죄의 삯인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습니다.
이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조차 그런 말을 합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집안에 매일 열심히 청소하고 깨끗이하여도 아침에 유리창으로 햇빛이 비치어 보면 너무도 많은 먼지가 방안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부패하고 가장 더러운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부패한 마음에서 부패한 말이 나옵니다. 부패한 마음에서 부패한 행동이 나옵니다. 그 허물과 죄악으로 이땅에서 부패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 마지막 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그 부패와 허물을 해결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이 세상은 부패와 허물을 공격하고 정죄합니다. 매일 우리가 대하는 신문 티비뉴스는 대개 부패와 허물을 까발리고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대부분 이 세상 사람들은 허물과 부패를 밝혀내는 데는 너무나도 도가 텄습니다. 그런 허물과 죄를 찾아내서 벌금으 물리고 감옥에 넣고 여러 가지 징계를 주는 법과 제도가 너무나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남편을 6명 둔 여인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3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한 제자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교회를 앞장서서 핍박하고 심지어는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악과 허물에 대하여 용서받습니다. 아담안에서 물려받은 원죄가 용서받습니다. 조상때부터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내가 이땅에서 살면서 지은 모든 자범죄를 용서받습니다. 주님이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 죄가 해결받을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누리게 된줄 믿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세상에서 현실적으로 누리는 많은 복 중에서 심령의 복 처럼 큰 복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물질의 복을 많이 강조하지만 신약으로 올수록 성경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복을 보면 심령의 복이 더 강조되는 것을 봅니다 왜 구약에서는 물질의 복을 많이 강조하고 신약에 들어와서는 심령의 복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구약을 성취시키고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라고 봅니다. 물질의 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심령에 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안에서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귀한 복 평화의 복 심령의 복모두가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주님이 용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결국 죄책감의 포로가 됩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용서를 나의 용서로 확신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놓아주어야 합니다.주님은 우리의 심령에 평화가 있기를 소원하십니다.
상담을 하면서 맣은 분들에게 “예수믿고 가장 변화된 것이 무엇입니까?” 하면 이구동성으로 가장 많이 하는 답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라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합니다. 요한복음16: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합니다.
예수안에 있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얻습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자유함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여러분 누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마음의 평화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마음에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미워하면 가장 손해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주님이 나의 허물과 죄를 무조건 용서하심같이 우리도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 사람이 허물과 죄가 없어져야 용서하고 그 사람이 완전해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생각입니다.중요한 것은 마음과 생각을 조그만 바꾸어도 인생은 행복하고 자유하고 즐겁습니다.
죤웨슬레의 전기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존웨슬레가 미국 조지아주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그 배에서 한 장군과 무척 친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그 배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가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러자 이 장군이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를 향해 “저 놈은 내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웨슬레는 친구인 장군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장군님 장군님이 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장군께서도 결코 실수함이 없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도 실수할 가능성이 있고 그도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그 장군은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 앞에 베드로가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베드로는 7번까지만 용서하면 큰 용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 지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용서하지 않을때에 큰 책망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일만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를 하십니다. 만달란트의 빚을 진 사람이 있습니다. 만달란트의 빚은 이 사람이 평생 갚을 수 없는 큰 빚이었습니다. 주인이 명하기를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종이 엎드려 말을 합니다.“ 내게 참아주소서 다갚으리이다”라고 합니다. 그 종의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만달란트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 종이 나가다가 백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합니다. 그 친구가 간청하기를 ”참아주소서 갚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허락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 동료들이 그 일을 보고 주인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탕감하여 준 종을 불러다가 꾸중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 그리고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여기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만단란트 종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갚을 수 없는 큰 은헤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주님은 서로 긍휼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 것같이 그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를 내 힘으로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허물과 그의 약점과 부족함을 위해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내 심령이 오히려 주님의 위로와 복을경험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는 믿음의 사람에게 진정한 주님의 평강과 자유의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세째 이 모든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 같이 잘못된 길을 같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악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을 시키신 것입니다.
여기 “담당”이란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대신하여 당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여 담당하여 대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값인 사망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값인 지옥의 심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10장 45절에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한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복음 중의 엑기스로 여기는 성경요절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합니다. 그것을 바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독생자를 어디에 주셨습니까?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인류에게 수치스러운 제도가 있다면 그 중에 하나가 노예 제도 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노예 제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까? 성경에 “종”이란 말은 다른 말로 “노예”라는 말입니다. 노예는 그 부모도 그가 난 자식도 노예입니다.
미국에서 노예가 매매되던 때의 일입니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 태어난 한 혼혈 여성이 있었는데, 20세 때 그의 소유자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노예 시장에서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100달러로 시작되어 점점 올라가서 1000달러가 되고 다시 1100달러까지 올라 갔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있던 한 신사가 1200달러에 그녀를 샀습니다.
그 신사는 그녀를 자택으로 대리고 와 즉시 ‘자유증서’를 작성하여 건네주며 “너는 이제 자유의 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노예를 어떻게 가지고 놀거나, 어떻게 대하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쳐다보지도 않고 “거짓말이겠지요.” 라고 응답합니다.
그러다 잠시 신사와 승강이를 벌입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자신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기뻐서 집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크게 소리를 쳤습니다.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중에 그녀는 후에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는 감격을 꼭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의 심정과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이 세상의 노예보다도 더 비참한 죄의 노예에서 자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셔서, 그 핏값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전혀 어떠한 공로나 인간적인 조건이 없었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우리 주님의 이 사랑에 감복하여 이제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 나를 위한 고난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위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나를 위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질고와 슬픔을 이기고 허물과 죄악을 이기시고 참자유와 기쁨을 날마다 누리시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나를 위하여 고난받으신 주님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제자로 승리하시는 한주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춘수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