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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0:4~9,
오늘은 주님이 공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본 바 주님이 행하신 모든 능한 일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주님이 가시는 길에 폈습니다. 또 어떤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흔들며 주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 사람들은 대체로 주님이 로마의 식민 통치를 종식시키시고 마침내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실 왕이시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과 삼 년 동안이나 함께 지낸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을 감안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주님은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 길은 결코 정치적, 군사적 승리자로 오시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를 지기 위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고난의 길을 걷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종이 어떻게 고난 당할 것이라고 선지자가 예언했습니까?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깁니다. 자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깁니다.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피하거나 얼굴을 가리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이사야 53장 7절 말씀으로 다시 한 번 그 모습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종들로 하여금 그렇게 고난을 당하도록 방치하시는 것입니까? 아니 일부러 고난을 당하도록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을 당하고 비참하게 죽도록 놔 두시느냐는 말입니다. 특히 주님은 너무도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참으로 비참하게 죽지 않으셨습니까? 얼마든지 힘으로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까? 그 까닭을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함께 찾으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강한 것 같지만 실상은 약한 교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지만 진짜 그리스도인은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의 교회를 다시금 바르게 세울 수 있는 방편을 말씀을 통해서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총이나 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폭력을 사용할 것 같으면 결코 폭력을 뿌리뽑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8~39) 하나님의 종들이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 땅 위에 평화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참 평화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그런 방법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오직 비폭력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은 비폭력적인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이치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는 종들의 고통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독특한 면입니다. 다른 신들은 모두 높은 곳에 군림하며 사람들을 멋대로 지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점에서 유대교와 완전히 구별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위에서 들어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그렇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하시며 우리를 구체적으로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병을 앓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고쳐 주는 의사도 고맙지만 곁에서 아픔을 함께하며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더 고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는 바로 그 현장에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입니까? 모두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사 죄인과 같은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처럼 사시고 죄인들과 함께하시며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인 중의 죄인이 되셨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려고 친히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주 잘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약한 우리를 잘 이해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때문에 주님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 주님 때문에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을 견디는 그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을 당할 때 전혀 대항하지 않는 것을 보며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종들은 본문 7절 말씀에 있는 것처럼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을 것이며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 하면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외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8~9)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대적들에게 저항하거나 보복하지 않지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도 바로 그와 같은 확신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때문에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
고난의 종인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본문 4절 말씀에 '학자'라고 번역한 단어는 '배우는 사람' 즉 '제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4절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니 이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오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옛날 선지자들은 자기의 말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전했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쳤던 것처럼 교회는 늘 기도하며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오늘 여기서 우리를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분명히 깨달아야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귀를 열어 그 음성을 듣게 하실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입을 열어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전할 말씀의 대상은 곤고한 자들이었습니다.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이 곤고한 자들이었습니다. 곤고한 자들을 위로하는 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사명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 곤고한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리고, 소외되어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종들이 전하는 위로의 말씀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 위에 참된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은 동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심으로 본을 보이신 고난의 종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해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늘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말씀을 어둠 속에 머물고 있는 곤고한 우리 이웃에게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맡겨진 증인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