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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31~34
3월에는 고난 주간에 이어 부활주일이 함께 있는 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느 때와는 달리 좀더 특별한 자세를 가지고 이 한 달을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주일을 앞에 두고 2~3일 동안 금식했다고 합니다. 이기간 동안 하루 한끼, 혹은 온종일 금식하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경배했다고 합니다. 주후 4세기 경쯤 교회가 굉장히 부흥하고, 교회 제도가 제도화되면서 '사순절'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 직전 40일 동안을 특별한 방법으로 금식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기 위해 하루 한끼나 각자 정한 대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잃어버린 복음을 다시 찾고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사순절이라는 구교의 형식적인 행사를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사순절이라 하여 특별한 행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을 앞두고 우리의 삶이 좀더 경건하고 거룩해져야 겠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욕심을 절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묵상하면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계획을 세우고 생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갖고 이번 한 달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을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을 몇 차례 오르내리셨지만 이번 행차는 단순한 방문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올라가면 선지자들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하고 기록한 대로 인자가 이방인들, 즉 로마인들에게 넘기워져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 그리고 채찍질을 당한 다음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실 것인가를 세세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사람들의 훼방거리와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수족이 못 박힌 채 죽게 될 것이며, 그분의 겉옷과 속옷을 제비를 뽑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상하고 찔릴 것이며, 우리의 모든 죄악을 홀로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그 예언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사건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거나 돌발적으로 일어날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수백 년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각본대로 일어날 사건입니다. 곧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길을 따라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들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손에 칼을 들고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파라다이스를 세울 수 있는 메시야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능력자라고 믿고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하자 '지금이야 말로 그때가 왔구나!' 하고 마음으로 반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예루살렘에 가면 이방인에게 넘겨져서 능욕과 침 뱉음과 모욕을 당하고 채찍질을 맞아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칼을 손에 든 메시야를 꿈꾸던 제자들의 마음에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죽으시는 메시야란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는 귀에 잘 들리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은 아무리 큰 소리로 전해도 다 옆으로 새고 맙니다. 손에 칼을 든 정복자 메시야를 꿈꾸고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에서 죽는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가 들릴 리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3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외에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 없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기로 각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기로 작정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발을 옮기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맡기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퍽 침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이어서 제자들이,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무리들이 따라 갑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 뒤를 따라가면서 심히 두렵고 무서워했다고 말합니다.(막10:32) 여기에서 우리는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금새 느낄 수 있습니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당하는 사람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당하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세밀하게 내다보고 그것을 당하는 자는 그 비극을 겪기 전에 이미 2번, 3번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한걸음씩 발을 옮겨놓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먼저 '내가 큰 죄인이구나.' 하는 사실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 없는 예수를 죽인 죄인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어린양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어린양을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 손을 얹고는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는 기도가 끝나면 그 어린양을 제사장에 맡겼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양은 주인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제단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어린양이 되셔서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놓고 계십니다. 나의 검은 손을 그분의 머리 위에 얹고 내 모든 죄를 그분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내 대신 죽도록 예루살렘을 향해 밀어 내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죄 있는 나를 대신하여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음의 형틀에 밀어 넣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그러므로 저는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가시는 주님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죄인 중의 괴수구나. 정말 이것은 살 가치가 없는 무서운 죄인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 보면, '죄' 또는 '죄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죄라는 말을 듣는 것은 마치 죽음이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우울한 반응을 보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 상당수가 '죄'나 '죄인'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단어쯤으로 생각하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이 말은 고귀하고 품위 있는 모임이나 기쁨의 축제인 예배에서는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로 하나님의 위로를 특별히 기대하면서 예배 드리는 사람들에게 죄, 죄인이라는 어두운 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목사님들이나 교인들도 많습니다. 사랑의교회와 같이 복음주의 입장에 굳건히 서있고, 양질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런 말을 새겨 듣지 못하는 분들이 이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평생 가슴 아프도록 느껴보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죄, 죄인이라는 말을 가급적이면 듣지 않길 원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슨 가책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선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아 내가 선하지 악한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는 데서 우월감을 가지려는 태도는 출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어렸을 때 경험을 이야기한 글을 소개합니다. 그 목사님이 어렸을 때 조금 개구쟁이였는지 자기 방 청소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마다 어머니가 들어와서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냅니다. "너 어떻게 방을 이 모양으로 정리하니? 침대는 이게 뭐니? 양말은 양말대로, 옷은 옷대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되겠어?" 하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이 목사님은 주저하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엄마, 내가 형보다는 나아요. 형 방에 한번 가보세요." 사실 형 방은 자기 방보다 훨씬 더 지저분합니다. 그래서 형과 비교하면 자기 방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두말하지 않고, 아이의 팔을 끌고는 아래층에 있는 엄마 방으로 내려간답니다. 엄마 방에 가보면 침대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화장실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습니다. 무엇 하나 흐트러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큰 소리로 "내가 네 방을 깨끗이 치우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치우라는 거야. 네 형처럼 하라는 것 아니야. 이 방처럼 치우라는 거야." 하고 호통쳤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어린시절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날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기준을 맞추어 '나는 그래도 좀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철없는 어린 애와 똑같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자기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우리도 그만큼 의롭고 선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인정 받을 만한 선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똑 같은 사람들끼리 비교하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비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형편없는 죄인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를 십자가에 밀어 넣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많은 성도들 가운데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될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변화란 철저한 죄인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변화를 위해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이 예수를 내가 죽였다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철저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을 근본적으로 바로 할 때 비로소 그 믿음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을 보면 이런 철저한 변화,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채 교회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주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나의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향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을 거기에 가도록 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나만큼 큰 죄인이 없다는 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램브란트(Rembrandt)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을 그린 다음 그 주변에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조하는 군중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군중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얼굴로 그렸습니다. '이 군중 가운데 내가 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장본인이다.'라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못 박는 이 무리들과 한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겉잡을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대성통곡을 했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오래 믿었든, 늦게 믿었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한두 번쯤은 깊이 실존적으로 인식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부둥켜 안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이런 변화를 전혀 모른 채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십자가를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밀어 넣은 죄인이 아닌가?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닌가?' 하고 깊이 인식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은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또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 너무나 크고 풍성하신 은혜, 내 입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내 죄를 예수님께서 짊어진 대신 자기의 의를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예수님은 죄인이 되고, 죄 있는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신분이 이렇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를 들고 서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로 영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불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흡족한 의가 있는 자만을 받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그 의를 얻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의만 가지면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시고 우리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그 의를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맥스 루카도(Max Lucado) 목사님은 자신이 경험했던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신 이 의의 은혜를 설명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 직원들과 함께 쿠키 파티를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은 각자 자기가 만든 쿠키 한 접시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만든 쿠키든지 간에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쿠키를 만들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교회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나는 쿠키를 만들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서 쿠키 한 접시만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이 파티에 기꺼이 참석할 수 있게 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자 교회 직원 중 한 자매가 정성껏 쿠키 한 접시를 만들어서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 쿠키 한 접시를 들고는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는 파티석상에 놓여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온 다양한 쿠키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에 파티를 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쿠키 파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의 파티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오면 하나님께선 무조건 받아 주시고, 하늘 나라에 있는 모든 행복과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영생할 수 있는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의 파티에 들고 갈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밑에서 나대신 죄인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자기의 의를 나에게 넘겨 주신 예수님, 자기는 죄인이 되고 우리는 의인으로 만드신 이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이 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느냐, 늦게 믿었느냐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무조건 우리를 받아 들이시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자격은 오직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의 소유 여부에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소용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를 내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의를 다 소유한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의를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상식일 뿐, 가슴으로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주님, 머지 않아 십자가 형틀에 그 발을 올려 놓으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는 이유는 나를 의인 만들어 하나님나라의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자격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속에 눈물이 솟고 흥분할 정도로 그 은혜에 깊이 감격하고 있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찬송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자신이 흘린 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 이 은혜 앞에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슴은 반석일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면 그 무릎은 굳은 무릎일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뜨거운 사랑을 바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중생 받은 자의 가슴이 아닐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십니까? 의가 없는데도 나를 의인 만드신 은혜를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이 축복을 주신 은혜를 얼마나 느끼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터치하셔서 식어버린 이 은혜의 마음을 다시 한번 뜨겁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잊어버렸던 이 은혜를 다시 회상할 수 있길 바랍니다.
최근 어느 검사로부터 들은 말입니다. 그 검사가 이렇게 질문 했습니다 "형무소에서 가장 기뻐하는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형무소 시설이 좋다고 해도 거기서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형을 3개월 받고 들어온 사람이 이제 나갈 일이 가까이 왔으므로 제일 기뻐할 것 같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형무소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사형수로 있다가 무기수로 감형된 사람입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사형 집행 날을 기다리던 사람에게, 사형 집행이 중지되고 비록 감옥에서나마 종신 살 수 있는 무기형이 선고되면 너무 기뻐서 소리지르며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나 이제 살게 됐어요. 나 이제 살게 됐어요." 하면서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이 갔습니다.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의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그 의를 들고 하나님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신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으니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한달 동안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으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곳에 가셔서 십자가에 발을 올려놓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자주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릴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내 정성과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의인이 되어 주님 앞에 받아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받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이번 고난 주간을 앞두고, 죄 없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있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이 되심으로 내가 의인이 된 이 놀라운 은혜 앞에 감격하여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 외에는 우리가 자랑할 분이 없고, 예수님 외에는 우리가 찬양할 분이 없음을 믿고 주님을 높이 받들며 사는 귀한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