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20:19-31

출처/옥한흠목사 설교 중에서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 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 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 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 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 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 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 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 으리라 하시니라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 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 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 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 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 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 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 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 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 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 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 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 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 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 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 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 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 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 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 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 려 함이니라


'예수 부활'과 '부활의 주님'
부활주일이 되면 우리 모 두가 다른 주일보다도 특별히 기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 셨다고 서로가 고백하고 증거 하고, 또 우리 어린 자녀들이 달걀을 삶아 가지고 전해주면 서
"예수 부활하셨습니다."
하는 이야기 들으면 뭔가 새 로운 감회가 일어나는 것입니 다. 그러나 저는 이런 부활 주일을 맞아서 한편으로 참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는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연례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하는 걱 정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볼 때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부활 주일을 그저 1년에 한번 있는 연례행사 정도로 생각하 고 그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 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 하셨다고 찬양을 하고 말씀도 듣고 하지만 나머지 기간 동 안은 예수 부활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던 시대를 보십 시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 시 사셨다는 이 메시지가 부 활주일을 위해서 읽어야 하는 하나의 대사로 전락해 버린 시대를 보십시오. 그런 시대 에는 교회의 등불이 가물가물 하게 꺼져 갔고 많은 성도들 이 세상에 유혹되어서 하나님 의 자녀로서의 생명을 상실한 어두운 시대가 이어졌다는 것 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예수 부활'을 외칠 뿐만 아니 라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고백하고 자랑하고 찬송하며 그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 지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일 어났던 시대에는 교회의 등불 이 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대부흥의 역사들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살아 계신 주 님을 믿음으로 만나고 느끼고 감격하는 체험적인 부활 신앙 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 연례 행사처럼 치르고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우 리 모두가 우리의 믿음을 다 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고 생각합니다. '예수 부활'을 고백하는 나의 믿음이 '부활 의 주님'을 고백하는 나의 믿 음과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역사 적인 사건입니다. 여기에 비 해 부활의 주님은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부활은 지 적인 내용인 반면에 부활의 주님은 체험적인 실존입니다. 예수 부활을 이야기하는 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 에 강조점을 두지만 부활의 주님을 이야기하는 자는 예수 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둡니다. 예수 부활 은 주님이 묻히셨던 무덤을 주목하게 만들지만 부활의 주 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는 주 님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그 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 둘은 절대 분리된 것이 아 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부 활과 부활의 주님은 하나입니 다. 우리의 믿음의 양면인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칫 잘못 하면 예수 부활만 믿고 예수 부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 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 을 보면 대부분이 주지주의자 가 됩니다. 성경을 잘 압니다. 내용을 환히 꿰뚫고 있습니 다. 예수 부활에 대해서 성경 어디어디를 찾아보라면 불을 안 켜고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예수 부활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역 사적인 사건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자칫 입 술만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형식적인 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대단 히 불행한 일입니다. 입으로 는 예수 부활을 말하지만 실 제로는 예수님이 아직도 무덤 에 누워 있는 것처럼 생각하 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님을 자기와 아무 교제도 안 나누고 자기 삶을 다스리지도 않으며 간섭하지도 아니하며 자신에게 어떤 헌신도 요구하 지 않는, 무덤에 누어있는 시 체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진정한 기독교의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셔서 살아 계 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 따라 와야 합니다. 그를 날마다 만 나는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 음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 려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귀가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영 광을 느끼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 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못 박히신 그 손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의 손 으로 만져야 합니다. 부활하 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 과 사랑을 속삭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에 놀라운 변 화가 일어납니다. 성경을 보 십시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안 변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 십시오. 아니 가깝게 우리 교 회 안을 보십시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지 않 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금 시중 극장가에는 라는 영화가 재개봉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 데는 이 영화를 보신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꼭 한 번 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소설 을 쓴 월러스(Wallace)라는 사람은 그 소설을 쓰기 시작 할 무렵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무 식자였습니다. 그가 알고 있 는 것이라고는 그의 친구가 들려준 한 마디 뿐이었습니 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 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 다."
그러나 그는 를 쓰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 는 시대를 알아야 했기에 성 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런데 성경을 읽던 그에게 놀 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살 아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 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 났던 변화를 고스란히 벤허라 는 주인공 인물에게 투영시켰 습니다. 벤허라는 사람은 원 래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 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이었습 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칼 을 빼앗아간 사람이 누구입니 까?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벤허가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것이 그 영화의 해피 피날레 (happy finale)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치고 변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 픔이 사라진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 음 20장에도 부활하신 예수님 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변화 된 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 합니다. 먼저는 막달라 마리 아라고 하는 부인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몇몇 여인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는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열 명의 제자들 외에도 무명의 제자들 이 여러 명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 막으로는 도마라는 제자가 나 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 활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 났습니다. 만난 다음에 그들 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 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실 을 확인해 보면서 '나는 어떤 가? 나는 입으로 예수 부활은 외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다움이 나에게 있는가? 예수님을 날마다 만나면서 그 분과 교제하면서 사는 증거가 나에게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되새겨보는 시간 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께 서 우리 모두를 도와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봅 시다. 그는 슬픔에 빠져 있었 던 여인입니다. 누가복음 23 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 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그 뒤를 따라간 무리들 가 운데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 는 여자의 큰 무리가 섞여 있 었다고 했습니다. 가슴을 치 면서 슬퍼하는 여자들의 무리 속에 이 막달라 마리아가 끼 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 면서 누구보다도 슬픔을 가누 지 못한 여인입니다. 왜냐하 면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클 수록 슬픔은 더 커진다는 것 은 우리가 상식적으로도 이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흘 전에 예수님을 장례 하는 그 자리에서 마리아의 마음은 퍽 상처를 입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해가 기울 면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한두 시간밖에 안 남았습니다. 아 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또 몇몇 여인네들이 서로 손을 모아 가지고 죽은 예수님의 몸을 씻기고, 향료를 그 몸에 덮고, 베옷을 감고 하는 이런 절차를 다 끝내는 데는 시간 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그러 니 얼마나 서둘렀겠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대강대강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제대 로 하는 사람이면 이틀이나 사흘 걸리는 예식을 한두 시 간 안에 대충 끝내고 무덤 안 에 안치를 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마 리아로서는 그 일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서 이틀 밤을 뜬눈으로 세우다시피 했 습니다. 그리고는 사흘째 되 는 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손에는 향 유가 들려 있었습니다. 장사 지낼 때 좀 미비했다 싶은 부분을 자기 혼자라도 가서 어떻게 해 보려고 향료를 가 지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입 니다. 그러나 마리아 앞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 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 수님의 시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 리아는 간장이 녹아 내리는 것 같은 슬픔을 눈물로 씻어 내며 울고 있었습니다(11절). 그는 슬픔의 여인입니다. 슬 픔이 밀물처럼 그의 가슴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은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 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랬더니 마 리아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당신이 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으면 어디 있는지 가 르쳐 주세요. 내가 가서 다시 가지고 오겠나이다."
그때 예 수님은
"마리아야!"하고 부르 셨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 주 듣던 그 음성이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던 것입 니다.

"마리아야!"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마리아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을 했 을까요? 우리는 감히 상상조 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강 그려볼 수는 있습니다. 슬픔이 가득하던 얼굴이 기쁨 으로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던 그 눈에는 기 쁨이 충만하여 광채가 났을 것입니다.
"선생님"
하는 그 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십시 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마자 마리아의 슬픔은 다 날 라 가버렸습니다. 슬픔이 변 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시 편 30편 11절에 있는 말씀대 로 그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었습니다.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시는 축복을 마리아가 체험한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 예언한 그 대로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 게 화관을 주시는 축복과 희 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 게 하는 큰 은혜를 그가 체험 하게 된 것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은혜를 자주자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슬 픔을 완전히 씻어 버리고 세 상을 사는 자가 아무도 없습 니다. 인생 그 자체가 눈물이 요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저 의 가슴에도 슬픔이 있습니 다. 여러분의 가슴에도 슬픔 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 만 뒤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슬픔은 우리 인 생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솔로몬이 표현했듯이 낮에도 슬픔과 걱정에 싸인 채 살아야 하고 밤에조차 쉬 지 못하고 괴로워 몸부림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 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 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 리아처럼 부활하셔서 살아 계 시고 나를 찾으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만나 서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 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이 슬픔 많은 세상을 이기고 얼 굴에 웃음을 띄고 살 수 있습 니다. 믿음으로 살아 계신 주 님을 만나는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도 딛고 일어나 서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금요일날 우 리 교회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면서 철야 기도회를 가 졌습니다. 그때 이화숙 집사 님이라는 분이 나오셔서 간증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들었 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름다 운 자매가 우리 교회 안에 계 시는 줄 잘 몰랐습니다. 교회 안에 대단한 분들이 많이 계 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그런 분이 계시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는 대학교 교수입니다. 그는 예 수를 오래 전에 믿었기 때문 에 성경에 대해서, 그리고 예 수님에 대해서는 알만큼 아는 분입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 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성 경의 내용을 비판하고 따지는 것을 능사로 알고 있었던 약 간 교만한 크리스천이었습니 다. 이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입으로 고 백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 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고 하는 소위 십자가의 사건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과거형 으로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습 니다. 참으로 교수다운 표현 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형으 로만 알고 있었다는 말이 무 슨 뜻입니까? '십자가 사건을 이천 년 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 나는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나는 그 내용을 다 알고 있다.' 그것으로 끝났지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는 말입니다.
그러나 1년 전에 그의 남 편이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1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 남편 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끔찍한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그는 이렇 게 고백합니다.
"고난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 습니다."
"'고난이 유익'이라 고 외치는 이상한 사람이 되 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 랑에 감격해서 울보가 된 축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 러분, 이 말이 곧이곧대로 들 립니까? 아직 남편은 의식도 안 돌아왔습니다. 저는 간증 을 하시는 그 집사님을 물끄 러미 쳐다보면서 '목사인 나 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 집사님으로 하여금 눈물이 마를 날이 없 을 만큼 슬픔에 푹 젖어 있어 도 남이 욕을 하지 아니할 정 도의 상황인데도 저렇게 슬픔 을 딛고 일어서서 기쁨을 가 지고 간증할 수 있는 사람으 로 만들었을까요? 대답은 간 단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 님이 그를 만나서 자주자주
"마리아야"
하고 불러주신 것 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자기 도 모르게 그렇게 변해버리 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자는 부활의 소망을 가 지고 살게 됩니다. 여러분 가 운데 사랑하는 자를 먼저 잃 어버린 슬픔을 안고 있는 자 들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자식을, 형 제를, 부모를, 친구를 먼저 세 상에서 떠나보내고 5년이 지 나고 10년이 지나도 그 아픔 이 가시지 않아 지금도 자주 눈물을 짜는 슬픔을 안고 있 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러나 여러분이 날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 는 가운데 영의 귀를 열어 놓 고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신앙생 활을 하신다면 그 슬픔과 눈 물을 딛고 항상 기뻐할 수 있 는 독특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슬픔의 골짜기입니 다. 이 슬픔을 우리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 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만나면 이 슬픔 가운 데서도 기쁨을 찾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안에 서는 먼저 보낸 형제 자매나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 내가 다 부활해서 함께 영원 히 사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 세상을 살면서 본의 아니게 거지 나 사로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 니다. 거지 나사로가 어떻게 거지가 되었는지는 성경에 전 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거지로 태어 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 상에 태어날 때부터 거지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역시 보통 사람들처럼 남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다고 하 는 확신을 가지고 인생을 출 발했을 것입니다. 어떤 일에 서는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 고 한때는 성공했다는 소리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자기 인생이 처 절하게 내려앉는 기가 막힌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어 떤 면에서 거지 나사로는 인 생의 실패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인생을 실 패한 것처럼 산 사람도 이 세 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 시게 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니까 결국 나중에 아브라함 의 품에서 얼마나 엄청난 영 광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도 경쟁 대 열에서 밀려나서 이제는 정말 고개 숙인 아버지로, 고개 숙 인 남편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분들이 계실지 모 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마다 슬픔에 잠겨 괴로워하고, 가 족들은 가족들대로 그렇게 밝 고 자신만만하던 아버지가 기 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며 말 못할 비탄에 젖게 되어 온 가 족이 깊은 슬픔에 잠길 수밖 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 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면 이 세상에서 실패했느냐 성공 했느냐를 가지고 따지지 않습 니다. 얼마만큼 하나님을 기 쁘게 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했느냐가 중요한 것입 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 인생 이 어떤 면에서는 내가 원하 는 대로 안되었다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 살아 계신 주 님을 매일 만나면 그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회복할 수 있 습니다. 슬픔을 이기고 매일 매일 기뻐하면서 사는 독특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나 설교를 듣는 중에, 찬양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중에, 예 배를 드리는 중에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 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 포가 사라진다
다음으로 살펴 볼 것은 열 명의 제자들입니다. 가룟 유 다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 어 버렸고, 도마는 외출했다 가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그 곳에 다른 무명의 제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 열 명의 제 자들이 중심입니다. 이들은 모두들 공포에 짓눌려 있었습 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 었던 것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충분 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이 한참 인기를 끌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할 때는 제자들 도 우쭐거렸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때는 겁날 것이 하나도 없 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 고 의지했던 선생님이 처참하 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 았을 때 그들은 자신감과 용 기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 다. 군중은 간사합니다. 한때 는 그렇게
"호산나"하고 열광 했었지만 예수님이 맥없이 십 자가에서 처형되는 모습을 보 자 군중들은 한순간 돌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공포 분위기가 제자들의 주변을 점 점 조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도 저렇게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인 우리를 가만 두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말 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왔 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문 을 걸어 잠근 채 두문 불출하 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 님이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살아 계신 주님이 눈앞에 서 계시고, 그분이
"샬롬"하시는 말씀을 들은 제 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 오. 그들의 축 처져있던 어깨 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가 슴을 가위누르고 있던 공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안 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용기 가 샘솟았을 것입니다. 이것 은 굉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 습니다. 예수님은
"샬롬"
하 시고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살 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유령이 아 니다. 내 손을 보라. 내 옆구 리를 보라."
제자들이 그래도 의심하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 는
"너희에게 먹을 것이 없느 냐? 가지고 와 보라."고 하시 고는 제자들 앞에서 잡수기까 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 도 자신이 부활하신 몸인 것 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 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으 로) 보내노라"(21절). 그 다음 에는 그들을 무장시켰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들이 나 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외치면 그 용서를 받는 자는 용서받 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도 些?아니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22-3절). 그들을 영 적으로 무장시키신 것입니다. 그 결과 제자들의 마음을 무 겁게 짓누르며 고문하던 공포 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담대해졌습니다. 평안 이 찾아왔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인생을 산다는 것 은 어떤 면에선 두려움 그 자 체입니다. 세상은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속에 은근한 공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정 말 무서운 곳입니다. 저는 요 즈음 근대사에 관한 책을 읽 으면서 얼마나 공포를 느끼는 지 모릅니다. 스탈린이 일년 에 칠만 명을 총살시키는 현 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지 옥인지 우리는 여러 가지 사 정을 통해 잘 압니다. 그러므 로 우리 마음에 본능적인 공 포가 있습니다. 공포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욥이라고 하는 위대한 믿 음의 선배는 이렇게 고백했습 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 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 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 나"(욥3:25). 욥은 부자입니다. 성공한 사람입니다. 십 남매 를 거느리고 누가 보아도 부 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동 양의 최대 갑부요, 인격자요,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이 형통한 삶을 살 때 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워 하는 무엇이 있었다고 했습니 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무 서워하고 두려워하던 그것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 다. 사람은 누구나 다 두려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서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 다.
한때 미국 주요 신문에 칼 럼 리스트로서, 상담가로서 명성을 떨쳤던 어느 분이 계 시는데 그분은 한 달에 만 통 이상의 편지를 독자로부터 받 았습니다. 한번은 기자가 그 를 찾아와서 그 만 통 넘는 편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 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 는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습 니다. 그 때 그가 뭐라고 대 답했는지 아십니까? 공포였습 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20대 대학생들과 대학을 졸업한 20 대 후반기에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사역하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 말을 듣고 제가 한가지 놀란 것이 있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에 대해서는 전 문가가 아닙니까? 그는 20대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고 상담 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들에 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 해서는 도사입니다. 그런데 그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 각한 문제 다섯 가지를 꼽으 면서 공포를 제일순위로 꼽았 습니다. 겁 없이 인생을 살 것 같은 젊은이들에게 제일 큰 문제, 곧 가장 많은 젊은 이들이 고심하는 문제가 두려 움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 다.
그 목사님의 말을 따르면 젊은이들은 장래 문제를 놓고 은근히 마음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취직을 해야 되는데 앞으로 어떤 직장에 취직을 해야 되는가?'하고 걱 정하다 보면 불안이 쌓이고 공포가 된다고 합니다. '이 젊 은 나이에 갑자기 암이 걸리 면 어떻게 하나?' '죽으면 어 떻게 하나?' '이렇게 같이 공 부하고 다 졸업을 하지만 나 중에 2,30년 후에 내가 성공 하지 못하고 밀리면 어떻게 하나?' 이런 가지각색의 생각 을 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 게 마음에 불안이 오는 것입 니다. 그래서 공포에 시달리 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이상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는 세계 건강 식품 업계와 보 따리 장사꾼들의 노다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에 좋다 하 면 개똥을 들고 나와도 갑부 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나라가 건강 식 품을 수입하는데 쓴 돈이 1조 원을 넘는다고 합니다. 불로 장생한다고 소문이 나 있는 DHEA같은 약은 미국에서 파 는 소매가 보다 15배나 올려 서 파는 바가지 요금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 을 사먹는다고 합니다. 여러 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 까? 마음에 공포가 있다는 것 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 는 것입니다. '병에 걸리면 어 떻게 하나?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몸이 약해서 내가 하던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 나?' 하는데 대한 불안과 공 포가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 다.
요즈음 나라 경제가 대단 히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 이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경 제가 밑바닥을 모르는 채 가 라앉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 리 모두 마음에 두려움이 있 습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 주 일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 하 나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 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 하셔서 오늘도 살아 계시고 나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날마다 만나면 그 모 든 공포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 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불안 이나 공포를 극복하고 담대하 게 현실과 직면할 수 있는 용 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 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을 보 십시오.
"나는 부활이요 생명 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 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 리라."
부활의 주님은 병의 공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 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 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십니 다. '어떻게 살까, 앞날이 어 떻게 될까' 하는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에게 주 님은 그 마음에 평안을 주시 고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보십시오.
"세상 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 나."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통 도 당할 수 있고, 실패 할 수 도 있고, 핍박당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공포에 짓눌려 고생할 때도 있을 것이다.'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담대하라. 내 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 가 그 모든 상황에도 담대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예수 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 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인간의 슬픔을 완전히 발로 밟고 부 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 와 함께 동행하시며 날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사람이 된 이상, 우리는 두려움의 노 예가 되어 좌절당할 수 없습 니다.
"샬롬. 평안이 있을 지 어다."
하시는 주의 음성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날마다 듣는다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무릎꿇고 기도하는 가 운데 들을 수 있다면, 살아 계신 그분의 손을 보고 살아 계신 그분의 가시관 쓰시던 그 머리를 우리가 우러러 볼 수만 있다면, 우리 마음에 있 는 공포는 사라질 수밖에 없 습니다. 주님이 그 공포를 흩 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 은 설교를 듣는 것으로 끝나 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자신 의 마음에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체험되는 사 건이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 야!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 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 심이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도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열 명의 제자들이 예수 님을 만났을 때 무슨 일로 나 갔는지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못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고 떠들어댔습니 다. 더욱이 25절을 보면
"다 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에서 '이르되'라는 말은 현재 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헬 라어에서 현재형 동사는 계속 과 반복을 의미합니다. 그러 니까 열 제자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앞 다투어, 거듭해서 그에게 말 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가 볼 때 도마가 약간 기분이 좀 상했던 것 같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필 내가 없을 때 찾아오셨지? 왜 나만 빼놓고 예수님이 찾아오시냔 말이야.'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 는 그런 황홀한 순간에 빠져 있었다는 그것 때문에 약간의 거부 반응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마 음으로는 동의하지만 자기가 좀 피해를 보았다 싶으면 거 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 까? 도마 역시 이와 같은 자 세를 취했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자기가 만 든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이 잣대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자기는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노 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잣대가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의 손 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 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 을 그 옆구리에 집어넣어 보 아야만 믿겠다."
그는 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그 못자국에 손을 넣 어봐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의심하겠다는 것 입니다. 회의주의자의 전형적 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 수록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습 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 있 는 것들 중에 앞뒤가 맞아떨 어지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이 세상에서 공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 은 극히 드뭅니다. 더욱이 예 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더더 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 활하신 자신의 몸을 600여명 의 사람들에게만 보이시고 그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시 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 님은 예수님을 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 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 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 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 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이 왜 요한복음을 기록해 놓고 일일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 까? 자기가 본 그대로 기록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 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 람들의 증거를 듣고 믿어 영 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을 일일 이 개인마다 찾아다니며 보여 주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 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 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듣 고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 의 합리적인 잣대를 고집하며 믿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구원 받기가 어렵습니다.
금주 뉴스위크지에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끝까지 부인 한 어느 과학자의 죽음에 대 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그 는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박사 입니다. 그는 골수암에 걸려 서 투병하다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 소에 하나님의 존재에 관심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 그리고 그가 주는 영생 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나 봅 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더 알기를 원해서 여러 명의 기 독교 지도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병상에 있을 동안에도 여러 교회에서 그를 위해 기 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의 기본 입장은 이것이었습니 다.
"증거가 없는 한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요, 확실히 알 수 없는 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지론이 그의 입 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미국의 큰 기독교 단체를 책임지고 있는 어떤 목사님과 믿음에 관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고 있 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는 그 목사님께 너무나 답답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어 떻게 하나님을 믿는가?"
그러 자 목사님은 그의 말을 받아 거꾸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 니다.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 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못 하는가?"
계속 대화를 나누는 중에 목사님이 그에게 또 이 렇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사랑을 믿는가?"
그 러자 그는 아내를 몹시 사랑 하던 사람인지라 사랑을 믿는 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또 질문을 했습 니다.
"사랑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가?"
그는 처음에는 당연히 입증할 수 있는 것처 럼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 다. 그러나 그도 양심이 있는 지라 결국 사랑에는 입증하지 못할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했습니다. 사랑에 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고 입증할 수 없는 무엇이 있습 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부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 합리적인 사고일 것입니다. 그는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주고받는 중에 신앙에 관해서 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 정했습니다. 그리고 입증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고 해 서 그것을 부인하는 것도 바 른 자세가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믿기를 거부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 은 다음에 그의 부인은 이렇 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믿음 을 갖고자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알고자 했을 뿐이다."
알고자 하는 사람과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습니다. 도 마와 같이 의심하는 사람은 만사를 자기 잣대를 가지고 재어보고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절대 믿 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칼 세이건 박사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의 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 니까? 아직도 자기도 모르게 자꾸 회의적인 생각 때문에 끌려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 자 도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 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 님이십니다"(28절). 예수님은 도마보고 이렇게 말씀했습니 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 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믿 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사랑하는 형제 자 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은 도마는 그때부터 믿음의 사람 이 되었고 결국은 수십 년 후 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 다가 순교하는 자리까지 갔습 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회의적 인 사람일수록 이 예수님을 만나셔서
"믿음 없는 자가 되 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에게 변 화가 일어납니다. 의심이 사 라지고 확신이 찾아듭니다. 소망이 없는 자가 소망을 갖 게 됩니다. 방황하는 자가 분 명한 인생 길을 걸어갈 수 있 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믿음 을 가진 자의 세계입니다. 믿 음이 없는 자에게는 온 세상 이 캄캄하고 소망이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 는 그 믿음을 가지고 보는 자 의 눈에는 소망이 있고, 미래 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리 소망이 없어 보이고, 아무 리 여러 가지 면에서 탄식스 러운 일이 많아도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믿으 면서 그분을 통해 이 나라를 보면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 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 분, 부활의 신앙을 이야기하 면서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 으로 인해서 날마다 자신이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하지 못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시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 다.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어떤 때는 의심 때 문에 흔들릴 수도 있지만 예 수님이 나를 꽉 붙들어 주심 으로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은혜를 우리가 체험합니 다. 그런 은혜를 체험하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자꾸 변 합니다.
물론 어떤 때는 별로 달라 지지 않은 것처럼 여겨질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 에 변화가 분명 일어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 다. 우리 나라에는 그런 곳을 찾기가 어렵지만 미국의 아리 조나나 유타주에 가면 거대한 협곡들이 많습니다. 빗물이 모여 가지고 시내를 이루고, 시내가 강을 이루어서 흘려가 면서 바위들과 대지를 침식해 가다 보면 커다란 캐년이 생 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 한 거대한 캐년을 보면 한편 으로는 신기하고도 하도 또 한편으로는 빗물이 어떻게 이 런 놀라운 캐년을 만들 수 있 을까 하고 믿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빗물이 일년 에 1mm씩만 바위를 깎아 내 린다고 가정해도 만 년이면 10,000mm 입니다. 이렇게 생 각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 는 생각이 듭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은혜를 받으며 변화되는 우리 의 모습 역시 이와 비슷합니 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변화 는 눈에 금방 안 띌 수 있습 니다. 1mm 아니 10분의 1mm 정도에 불과할 지도 모 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 서 보면 우리는 누구를 닮습 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은 부활의 주님 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도 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흠이 없고 티가 없고 완전한 하나 님의 아들이 되도록 부름 받 은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살아 계신 주님과 교제하면서 살면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 납시다. 슬픔이 떠나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공 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부활 의 주님을 만납시다. 의심을 물리치고 확신을 가질 수 있 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축복 을 날마다 누리면서 살 수 있 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