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 주는 의미  (행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2-24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이나 곤충을 통하여 부활의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여기저기서 꽃이 만발할 것입니다. 이 식물들이 겨울에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니까 죽었던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아름답게 꽃을 피워 모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연 미물 하나라도 부활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인간 세계에도 보면 우리 남편이 좀 변화되었다면, 우리 아내가 좀 새로워졌으면, 자녀들이 달라졌으면 하고 기대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것보다 죽었던 삶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종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를 좇던 제자들은 예수가 붙잡혀 가신 것을 보고 생명에 위협을 느껴 주님을 버리고 뿔뿔이 다 도망갔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제자들이 왜 숨었겠습니까?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도 전쟁과 재난과 질병을 싫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죽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단어입니다. 인간이 겪는 죽음 앞에는 웃음이나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병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사형수들도 죽음을 기다립니다. 이 죽음은 창세기 3장에서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에덴 동산에 심으시고 그 열매를 먹는 자마다 죽으리라고(창 2:17)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니 이 죽음은 인간이 선택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에는 육의 죽음과 영의 죽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육신의 죽음입니다. 그 후에 심판이 있다고 했는데 이 심판은 영의 죽음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죽음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을 해결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은 살아나셔서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안을 빌었고(요 21장),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도 육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2. 부활은 절망에서 소망을 줍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직업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자기 환경에 만족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나라의 원수들도 그 자리가 항상 편하고 좋은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의 생은 만족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자기 일터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그들은 자기의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나름대로 일을 하고 있었지만 항상 고달프고 불만스런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라가면 평안을 얻을 것 같아서 따라 나섰는데,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시며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러던 예수님이 유대 관원들에게 붙잡혀서 치는 대로 매를 맞고 온갖 조롱과 야유 속에서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니 제자들의 실망은 대단했습니다. 실망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잃었다는 슬픔보다는 자기를 잃어버린 괴로움이 더 컸습니다. 3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며 설계했던 삶의 방향이 흔들려서 살 길을 찾아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빨리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미처 도망가지 못한 자들이 골방 속에 숨어서 절망 가운데 숨을 죽이고 공포에 싸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절망중에 있을 때 주님은 살아나셔서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난 제자들마다 다시 힘을 찾았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부활의 변화가 있었으나 자기 하나 용신할 수 없어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갔던 그가 영적으로 힘을 얻어 부활의 소망을 가졌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서 살아나신 것을 보이시고 여러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보내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불안과 두려움을 잊고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도했을 때 사도행전 2장 오순절 날에 성령이 놀랍게 입히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3. 예수의 부활이 우리 자신의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부활을 천 번 만 번 한들 나에게 부활의 체험이 없으면 예수를 믿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26 이하에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의 부활(2:26), 육체의 부활(2;26), 영의 부활(2:27)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해마다 부활절이 오면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나셨구나”하고 관념적으로 그냥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부활절을 맞아 항상 우울하고 마음에 평강이 없는 자는 마음의 부활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는 건강의 부활이, 교회를 다녀도 아직 거듭남의 체험이 없는 자는 영의 부활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육의 부활입니다. 앞으로 우리 믿는 자들도 영의 부활이 아니라 육의 부활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창 자국, 못 자국을 보이시고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한 것도 육의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육의 부활은 믿는 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육의 부활을 합니다.(요 5:29)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대화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의 부활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영적으로 부활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영적인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에게 영적이 부활이 있으니까,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도망하던 그가 영적으로 부활하여 변화되니까 어디서나 주님을 증거하여 3000명, 5000명 씩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이웃이, 내 남편이, 내 자녀가 어떻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고 부활의 체험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4. 부활은 초자연적인 힘이 있습니다.

많은 제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자신들이 직접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받고 확신 속에서 불가능에 도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활은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부활이 말해 주듯이 우리도 영적인 체험을 갖고 불가능에 도전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가능성 속에서만 살지 말고 전능자 속에 살면서 기적을 체험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욥이 가능성 속에서 살았더라면 아마 자살을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난에서 일어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와 많은 제자들은 오순절의 역사를 체험하고 불가능에 도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을 했습니다. 그들이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니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과거에 이런 힘이 없었습니다. 감히 생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부활의 역사를 체험하고 난 후부터는 알 수 없는 능력이 나가고 힘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들이 능력을 외부로 발산했습니다.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분명코 여러분의 신앙이 불가능에 도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성가대나 구역장이나 교사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가운데 불가능에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안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안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위로부터 오는 힘을 공급받아 불가능한 현실일지라도 담대하게 뛰어들어서 욥과 같이 전능자를 의지함으로 “예수는 살아나셨다. 살아나셨다.”하는 역사가 매일매일 삶 속에서 증거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해방 40년을 맞는 금년도 부활절은 의미가 깊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을 끝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민족도 부활하여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