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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선물 (요20:19-2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첫 날 저녁 그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신 일과 거기서 하신 말씀에 대한 기록입니다. 무덤에서 살아 나오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일반화된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21절에서도 보듯이 예수님께서 그 말을 반복하신 것은 그 말이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 더 깊은 의미를 지녔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우선 제자들은 처참하게 주님을 잃은 후유증으로 두려움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모인 곳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가 소리도 없이 그들 가운데 돌연히 나타난 것은 그들을 크게 놀라게 할 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눅24:36-37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자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모습이 예수님 같긴 했으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었기에 설마 예수님이 들어오셨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유령이라도 보는 줄로 알고 두려워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20절은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곧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유령으로 여기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놀라지 말라. 나다" 하시며 당신을 알리시고 믿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던 흔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인사를 넘어서서 제자들의 두려움을 상당히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두려움은 단순히 그들 앞에 나타난 존재가 걸어 잠긴 문을 통과했다는 사실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을 잠그지 않았었더라도 그들에게는 주님을 다시 뵙는 것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한쪽 구석에 다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었고 다른 모든 제자들도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불쑥 나타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 것은 그들의 배신과 비겁함을 용서하시고 추궁도 기억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평안하냐?"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일방적으로 기원하시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주님으로부터의 용서를 확신하게 할 수 있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용서의 확신, 이것은 주님의 부활이 가져온 선물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그러자 20절에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했다" 했습니다.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오신 주님은 그들의 수치심과 두려움과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16:20-22에서의 예수님의 말씀 즉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하신 약속이 또한 이루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시는 것, 그것이 또한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를 반복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당신께서 붙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또 다른 약속을 상기시키시려는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요14:27-28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또 요16:28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말씀하신 후 33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적이 있음을 봅니다. 부활하셔서 다시 제자들에게로 오신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를 반복하신 것은 바로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신 전의 그 약속이 이제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제자들에게 확인시키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원하신 "평강" 곧 "샬롬"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고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평강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지 못할 때 평강은 곧바로 깨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깨뜨린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그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해와 그로 인한 평강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리시는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의 논리적 귀결이 부활하신 첫날 하신 이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와 평강, 이것이 주님의 부활의 첫 번째이고 가장 큰 선물입니다.
본문 21절은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며 이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덧붙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신 것은 파송의 말씀입니다. 어디로 보내신다는 말씀입니까?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보내진다는 것은 본래 소속이 세상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미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그 본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백성들로서 이 세상에 파송된다는 것입니다. 파송된다는 것은 사명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만나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찾으신 것은 그들과 놀며 즐기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일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무슨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뜻하신 그 일을 제자들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천국복음을 전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로 인한 구원의 도를 증언하는 일일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하셨다고 전합니다. 마가복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하셨다고 전합니다. 요한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다시 고기 잡고 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세 번씩 당부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요21:15-17). 모든 민족과 온 천하에 천국복음을 전할 사명, 우리가 감히 하나님나라의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 이것 또한 우리가 받은 주님의 부활의 크나큰 선물입니다.
그 다음 22절을 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이 말씀을 하시고" 한 것 때문에 우리는 이 22절을 21절에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파송하시는 일과 연관하여 "성령을 받으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행1:8을 봐도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할 힘과 지혜의 원천으로서 성령을 함께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주님의 부활에 이어 우리에게 임한 최대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앞서는 21절에서의 파송의 말씀하고만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는 23절의 말씀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23절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이들이 다 사람들의 죄를 사하거나 그냥 둘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권한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뜻은 앞에서 하신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과 결합해서, "성령충만한 교회, 진정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는 교회만이 권위를 가지고 죄와 죄의 용서와 구원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며 가르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신 말씀은 이전에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의 주제는 "예수님을 누구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고, 교회는 그 믿음의 반석 위에 서야 하는 것이며, 그 믿음만이 우리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과 믿음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전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먼저 바른 믿음 위에 서야 복음전파의 사명도 바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르고 확고한 믿음, 그 믿음 위에서 교회를 튼튼히 지키는 일, 그 믿음 가지고 천국 가는 것, 이것 또한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복된 선물인 것입니다.
오늘 새로이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부활절에 그저 삶은 계란 주고받는 즐거움으로 지내고 말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그 크고 놀라운 선물들을 올바로 나누어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부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반석 같은 믿음,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심을 받았다는 확신, 하나님과의 화해와 평강,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역사, 성령충만, 천하만민을 향한 복음전파의 사명 등을 새롭게 하고 단단히 다지며 이 놀라운 선물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순종과 충성으로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