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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어린이관 (마18:1-10 )
한 사회학자가 지나간 19세기를 여성을 발견한 세기요,20세기를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요, 21세기는 노인을 발견하는 세기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이를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그전까지는 어린이가 하나의 인간이나, 인격으로 간주되기 보다 부모나 사회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되어 왔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이 땅의 현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1920년대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만해도 어린이라는 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어린이들은 이놈, 어린 것, 애새끼라는 말로 불리 우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일본 유학생이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민족의 미래는 다음세대를 귀히 여기는데 있다고 확신한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했을 때 존대 말 쓰기 운동을 벌렸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어린이'(어리신 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임을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1921년의 일이었고 ,다음해인 1922년 5월1일에 처음으로 '어린이 날' 제정을 제안하고, 1923년에는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게 됩니다. 그해 5월1일 아동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어린이날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한마디로 예수 님은 시대적으로 2,000년을 앞서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린이들에 대하여 말하고자하는 모든 것을 이미 2,000년전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던 어느 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유명한 질문을 하신 후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오시던 도중에서 그분은 제자들 사이에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라는 논쟁을 듣게 되셨습니다. 이런 제자들에 대하여 진정한 천국백성의 자격을 가르치기 위한 시청각적 샘플로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 앞에 세우시고 어린이에 대한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님의 어린이 관을,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이를 통한 '천국 백성관'을 들여다보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 님은 어린이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1.어린이는 우리가 배워야만 할 대상입니다.
우리들 어른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생각 할 때에 즉각적으로 우리가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이런 발상을 역전시키는 선언을 하십니다. 우리가 오히려 어린이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에게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어떤 마음의 자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자질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신학자들은 대체로 세 가지 특성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겸손함, 둘째는 단순성, 마지막으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자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겸손을 생각해 보십시오. 겸손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반면에 어린이들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도움을 호소하고 의존할 줄 압니다. 이런 겸허함과 단순함이 어린이들에게 믿음을 가능케 합니다. 그들은 쉽게 하나님을 믿고, 어른들을 믿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어른들의 사고는 경쟁사회를 살면서 이웃을 믿지 못하도록 죄로 길들여져 있습니다. 이웃을 의심하고 믿지 못합니다. 사고가 복잡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요인은 자기가 살기 위한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본질입니다. 이런 교만함과 복잡함으로 인해 이웃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쉽게 누구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믿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로 천국의 문을 두드리려면 이런 어린이의 겸손함, 단순성 무엇보다 믿음을 배워야만 합니다. 3-4절의 말씀이 바로 이 교훈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어린이의 마음의 자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어린이처럼 단순히 주를 의지할 때 그의 마음에 천국이 열립니다.
오래 전 이런 예수님의 생각을 영국의 낭만파시인 윌리암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는 그의 '무지개'라는 시에서 탁월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가슴은 뛰나니/나 어려서도 그러했고/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고/늙어서도 그러할진대/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으리/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a father of a man)/나의 하루하루가 천연의 경건함으로 이어지기를--. 이 어린이 주일에 예수님이 칭찬하신 어린이의 마음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어린이는 우리가 영접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 한국사회의 윤리형성에는 유교가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영향 중에는 여러 긍정적인 요소들이 적지 않습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 유교가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성숙한 미래 사회를 지향해야 할 시점에서 우리는 또한 만만치 않은 유교의 역기능적인 장애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지나치게 어른중심의 사고 즉 권위주의적이고 강자 중심적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사회의 문화적, 윤리적 사각지대는 어린이,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의 천시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유대나라도 동양문화권에 속합니다. 그 사회에서도 어린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당연시 되어온 사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구세주로 문명의 치유자로 오신 예수님은 다시 이런 전통적인 사고를 뒤집어 말씀하십니다. 5절에서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어른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아이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영접함이 예수님을 영접함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린이를 대우하고 영접하는 마음에 천국의 가치관이 들어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계속 본문을 읽어보면(6절이하) 이 어린아이의 개념은 소자의 개념(아이와 다른단어/paidion-mikron)으로 발전합니다. 소자는 사회속에서 약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병자일수 있고, 정신적으로 고독한 사람일수 있고, 영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랑을 경험하고 기쁨을 경험하고 평안을 경험하는 나라--예수님이 설명하신 천국은 그런 나라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선포하시고, 어린이들,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어린이를 영접해 보십시오. 장애인을 섬겨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는 오히려 더욱 영접되고 환영되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3.어린이는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이는 적극적으로 보호되지 않으면 안될 대상입니다.
본문은 소자를 영접하라는 선언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본문6-9절까지에서 예수님은 매우 강경한 어조로 하나의 중요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한마디로 그들을 '실족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실족함이라는 말은 광범한 의미에서의 보호를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10절의 말씀이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기 10절에서 발견되는 매우 흥미로운 표현의 하나는 '저희 천사들'이라는 말입니다. 소자나 어린이들에게는 수호천사가 있다는 암시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지킬 수 없는 자들을 보호하도록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시고 그들에게 보고를 받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저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자기자신을 지킬 수 있기까지 필요한 도움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도움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영적 도움을 베풀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여기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도움이 이 영적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주님은 이 도움을 베풀지 못하고 실족케 하는 것은 영생과 영원한 멸망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이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생 얻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제 우리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의 도움을 스스로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하고도 궁극적인 도움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보호는 잘못된 과보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이 땅에서의 육아문제에 있어서 무관심이상의 큰 문제는 과잉보호라고 생각합니다. 과잉보호는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파멸시키는 길입니다. 아이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주고 아이들이 하고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도록 버려 두는 것은 자라가며 중대한 행동장애나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인기TV드라마였던 아줌마의 주인공 장진구는 과보호 속에 자라난 우리시대의 병리현상을 대표하는 성인아이의 표상입니다.(어떤 주교 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가르치는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자랑을 하면서--너무 잘 해주신다고, 그런데 걱정이 많데요--무슨 걱정이냐? 부모님이 도망갈까 걱정이래요./과보호의 증후군)실패하더라도 실패를 디디고 일어설 수 있는 자율성을 키워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평생 부모를 의존해야 하는 무기력하고 유약한 인간으로 자라갈 것입니다. 부모가 아닌 주님을 의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호를 받고 평생을 살아가게 하는 일--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 대한 영적 보호야말로 우리의 책임인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의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나는 땅에 있는 아버지입니다./나에게 아버지의 특권과 책임을 주심을 감사하나이다./나의 자녀들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그들 곁에 머물게 하옵소서/그러나 나의 자녀들이 스스로 서야 할 때, 그들의 곁에서 떠나 기도하게 하옵소서. 아-멘
그렇습니다. 어린이는 우리들 어른들이 오히려 배워야 할 대상입니다. 조건 없이 사랑 받고 영접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건강하게 보호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려서부터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보호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 아니 이 땅의 어린이들이 이런 어린이들이 되도록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