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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복음19:25-27)
저희 어머니는 38세에 혼자 되셨습니다. 홀로 아버지가 남긴 전답을 관리하며 농사를 지어 저희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고생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드시고 싶은 음식 한번 잡수시지 못하고, 변변한 옷 하나 사서 입어 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장성해서도 어려운 교회 목회한다고 많이 도와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노년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하셨는데도 병원치료 한번 제대로 받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후회 되는 건, 평생 소원하셨던 성지순례 한 번 못 보내드린 것입니다. 그나마 마지막 가시기 전에 저희 집에 오셔서 잠깐 사신 것에 위로를 받고 있으니 저야말로 불효막심한 자입니다. 매년 ‘어버이날’만 오면 어머니를 위해서 빚이라도 내서 성지순례 한 번 보내드리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떠나신 다음에 후회한들 무엇하겠습니까?
오늘은 ‘어버이 주일’인데,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저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부모님 살아계실 때, 마음껏 부모 공경을 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께 잘해 드리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잘해 드리고 싶어도 잘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직 여러분들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1. 이 시대는 불효의 시대입니다.
얼마 전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 6리 한탄강에서 70대 노인이 숨진 채 물에 떠있는 것을 이곳에서 낚시질하던 사람이 발견하여 신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찰이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눈물겨운 내용의 유서가 들어있는 검은색 손가방을 강가에서 발견했습니다. 틀린 맞춤법으로 편지지 뒷면에 적힌 유서에는, 8년 동안 고국에 남은 모친을 돌아보지 않은 무정한 아들을 그리며 살아온 애달픈 인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보고 싶은 내 아들, 미국으로 떠난 지 8년 세월이 지나도록 소식 한 장 없소. 전화 한통이라도 있을까 하며 기다리다 보니 어미는 70고개를 넘었구나. 모든 것이 이 에미 탓이라... 어디가 살던지 몸 건강하여라... 그동안 아들하나 믿고 살았는데...”
특히 손가방에는 아들의 신원과 아들의 소재지를 파악할 수 있는 아무런 소지품도 없어 경찰은 할머니가 아들을 위해 일부러 신원을 알 수 있는 것들을 없앤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의 형편입니다. 옛날엔 경로사상이 높았는데도 “눕기도 서럽거늘”이라는 싯귀절이 있을 정도로 늙는다는 것은 서럽고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수명도 늘어나고, 의료혜택이 확대된 오늘날에는 어떻겠습니까? 세상이 발전하고 살기는 편해졌다고 하지만, 노인인구의 증가와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노인들의 소외감은 예전보다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이로인한 노인성 정신질환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노인들이 병원치료를 받는 곳이 거의 없어 전체 노인의 25-40%가 정신장애로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노인들이 힘들고 서럽고 외롭습니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무너진 요즘은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교육시켜 주신 부모님들입니다. 특히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를 피와 땀으로 일구어 이만큼 번영하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들에 대해서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고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퇴물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정치인은 공개석상에서 노인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의 노인에 대한 인식이 아닌가합니다.
물론 이들을 편히 모시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녀의 역할이겠지만, 순전히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여 방치한다면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한 우리 나라에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모든 젊은 세대는 이것이 바로 ‘나의 일’이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현명한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또한 ‘실버세대 선교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하여, 어르신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적극적으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우리 교회도 새 성전에서 노인 능력개발 및 복지 프로그램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2. 예수님은 부모공경의 도리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유교적 풍토에서 부모와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공경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문화는 가정의 윤리와 질서의 근본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유교 문화에 젖어있던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제사문제’를 두고 많은 갈등과 긴장이 빚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고, 추도식으로 대체하는 기독교는 부모공경에 관심이 없는 중교라고 몰아붙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오해와는 달리 기독교는 오히려 부모공경을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구약의 근본원리를 정리한 십계명에 보면, 첫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다섯 번째에서 열 번째까지는 인간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계명의 첫 번째가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존엄한 명령입니다. 비록 구약의 계명들이 신약에 와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으나, 그 근본정신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로만 부모 공경한다고 하지 말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모친인 마리아를 제대로 모시지도 못한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부모공경하고는 거리가 먼 분처럼 보입니다. 더욱이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 부친의 장례와 가족들과의 이별도 허락지 않으신 예수님의 말씀도 부모에게 무정하고, 가족에게 무심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마지막 순간을 다루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어머니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느정도 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이제 서른 셋의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비참한 모습을 보는 마리아의 심정이 어떻겠는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어머니를 십자가 위에서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또 어떻겠습니까? 자신이 십자가를 짊으로써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기는 하셨지만, 홀로 남아있을 어머니를 생각할 때, 어찌 인간적인 안타까움이 없으셨겠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어머니 곁에 서있는 요한을 가리키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고 하시고,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 하시면서, 자신이 끝내 모시지 못한 어머니를 사도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이 짤막한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어머니에 대한 예수님의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홀로 남아계신 어머니가 요한을 아들로 여기고, 조금이나마 슬픔을 이겨내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또 그 말을 듣는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마지막 가는 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기 위해 눈물이 가득 고인 채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곁에 서있던 요한도 예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나마 홀로 남은 스승의 모친을 잘 모시겠다고 다짐하며 눈물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짧은 순간이요, 짧은 대화이지만 참으로 눈물겨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인류구원의 대역사가 절정에 이른 그 때, 그 자리에서 예수는 어찌보면 사사로운 일일 수도 있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애틋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에서 부모공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고백한 사람이라면, 이와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바쁘다’, ‘힘들다’는 핑계로 부모님께 소홀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효자나 효녀들이나 해야 할 일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며, 부모 공경을 소홀히 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1950년,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눈이 내려 하얗게 되었는데,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아 포탄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포탄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무위에 놓인 눈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칼바람은 쌩쌩소리를 내면서 거침없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뼈 속까지 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늦은 밤에, 만삭의 한 여인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피난을 가던 그녀는 가족과도 헤어지고 방황하다가 더 이상 발걸음을 재촉할 수가 없어, 다리 밑에 웅크리고 앉아 산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나 매서운 겨울 추위는 아기의 울음소리조차 얼려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막 아기를 낳고 기진 맥진한 산모는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겉옷을 벗어 그 아이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체온이 낮아질 때마다 여인은 자기의 옷을 하나씩 벗어서 아기를 덮어주었습니다. 칼바람은 더 심해졌고 마침내 여인의 치마와 저고리마저 벗어 아기를 덮어 주었습니다. 온 몸으로 아기를 감싸 안은 여인의 몸은 점점 얼어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다리 위를 지나가던 선교사 부부가 다리 아래에서 들리는 아기 울음 소리를 듣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선교사 부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소스라치며 놀랐습니다. 다리 밑에는 거의 벌거벗다시피한 여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돌처럼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 아기를 살리기 위해 그 엄동설한에 다리 밑에서 자기 옷을 다 벗어 아기를 감싸고, 자신은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그 후 세월이 지나 그 아이는 청년이 되었고, 어느 날 선교사를 통해 자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간 청년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금도 그 차가운 무덤 안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자기의 옷을 하나씩 벗어 어머니의 무덤을 덮었습니다. 맨몸이 된 그 청년은 그 무덤을 감싸 안고 통곡 했습니다.
“어머니! 그때 어머니는 저보다 훨씬 더 추우셨지요?”
그 뒤 그 청년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노인을 섬기는 일로 대신했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어머니를 대하듯이, 갈 곳 없고 돌 볼 이 없는 노인들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우리 부모님들 또한 그 어머니 같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에 대한 마음도 그 어머니와 같을 것입니다. 자신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 이라고 합니다. 그런 부모님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하며, 존경하고 또 존경해야 합니다. 병들고 연약하더라도 공경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이 직접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때때로 부모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녀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회가 있을 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그 기회를 놓치고 나서 반드시 땅을 치며 후회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이런 후회를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부모님께서 아직 살아계실 때, 더 존경하고 더 사랑하고 더 정성껏 돌봐드려야 합니다. 여기에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
저희 어머니는 38세에 혼자 되셨습니다. 홀로 아버지가 남긴 전답을 관리하며 농사를 지어 저희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고생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드시고 싶은 음식 한번 잡수시지 못하고, 변변한 옷 하나 사서 입어 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장성해서도 어려운 교회 목회한다고 많이 도와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노년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하셨는데도 병원치료 한번 제대로 받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후회 되는 건, 평생 소원하셨던 성지순례 한 번 못 보내드린 것입니다. 그나마 마지막 가시기 전에 저희 집에 오셔서 잠깐 사신 것에 위로를 받고 있으니 저야말로 불효막심한 자입니다. 매년 ‘어버이날’만 오면 어머니를 위해서 빚이라도 내서 성지순례 한 번 보내드리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떠나신 다음에 후회한들 무엇하겠습니까?
오늘은 ‘어버이 주일’인데,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저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부모님 살아계실 때, 마음껏 부모 공경을 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께 잘해 드리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잘해 드리고 싶어도 잘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직 여러분들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1. 이 시대는 불효의 시대입니다.
얼마 전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 6리 한탄강에서 70대 노인이 숨진 채 물에 떠있는 것을 이곳에서 낚시질하던 사람이 발견하여 신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찰이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눈물겨운 내용의 유서가 들어있는 검은색 손가방을 강가에서 발견했습니다. 틀린 맞춤법으로 편지지 뒷면에 적힌 유서에는, 8년 동안 고국에 남은 모친을 돌아보지 않은 무정한 아들을 그리며 살아온 애달픈 인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보고 싶은 내 아들, 미국으로 떠난 지 8년 세월이 지나도록 소식 한 장 없소. 전화 한통이라도 있을까 하며 기다리다 보니 어미는 70고개를 넘었구나. 모든 것이 이 에미 탓이라... 어디가 살던지 몸 건강하여라... 그동안 아들하나 믿고 살았는데...”
특히 손가방에는 아들의 신원과 아들의 소재지를 파악할 수 있는 아무런 소지품도 없어 경찰은 할머니가 아들을 위해 일부러 신원을 알 수 있는 것들을 없앤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의 형편입니다. 옛날엔 경로사상이 높았는데도 “눕기도 서럽거늘”이라는 싯귀절이 있을 정도로 늙는다는 것은 서럽고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수명도 늘어나고, 의료혜택이 확대된 오늘날에는 어떻겠습니까? 세상이 발전하고 살기는 편해졌다고 하지만, 노인인구의 증가와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노인들의 소외감은 예전보다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이로인한 노인성 정신질환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노인들이 병원치료를 받는 곳이 거의 없어 전체 노인의 25-40%가 정신장애로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노인들이 힘들고 서럽고 외롭습니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무너진 요즘은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교육시켜 주신 부모님들입니다. 특히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를 피와 땀으로 일구어 이만큼 번영하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들에 대해서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고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퇴물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정치인은 공개석상에서 노인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의 노인에 대한 인식이 아닌가합니다.
물론 이들을 편히 모시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녀의 역할이겠지만, 순전히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여 방치한다면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한 우리 나라에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모든 젊은 세대는 이것이 바로 ‘나의 일’이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현명한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또한 ‘실버세대 선교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하여, 어르신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적극적으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우리 교회도 새 성전에서 노인 능력개발 및 복지 프로그램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2. 예수님은 부모공경의 도리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유교적 풍토에서 부모와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공경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문화는 가정의 윤리와 질서의 근본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유교 문화에 젖어있던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제사문제’를 두고 많은 갈등과 긴장이 빚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고, 추도식으로 대체하는 기독교는 부모공경에 관심이 없는 중교라고 몰아붙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오해와는 달리 기독교는 오히려 부모공경을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구약의 근본원리를 정리한 십계명에 보면, 첫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다섯 번째에서 열 번째까지는 인간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계명의 첫 번째가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존엄한 명령입니다. 비록 구약의 계명들이 신약에 와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으나, 그 근본정신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로만 부모 공경한다고 하지 말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모친인 마리아를 제대로 모시지도 못한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부모공경하고는 거리가 먼 분처럼 보입니다. 더욱이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 부친의 장례와 가족들과의 이별도 허락지 않으신 예수님의 말씀도 부모에게 무정하고, 가족에게 무심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마지막 순간을 다루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어머니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느정도 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이제 서른 셋의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비참한 모습을 보는 마리아의 심정이 어떻겠는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어머니를 십자가 위에서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또 어떻겠습니까? 자신이 십자가를 짊으로써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기는 하셨지만, 홀로 남아있을 어머니를 생각할 때, 어찌 인간적인 안타까움이 없으셨겠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어머니 곁에 서있는 요한을 가리키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고 하시고,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 하시면서, 자신이 끝내 모시지 못한 어머니를 사도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이 짤막한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어머니에 대한 예수님의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홀로 남아계신 어머니가 요한을 아들로 여기고, 조금이나마 슬픔을 이겨내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또 그 말을 듣는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마지막 가는 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기 위해 눈물이 가득 고인 채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곁에 서있던 요한도 예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나마 홀로 남은 스승의 모친을 잘 모시겠다고 다짐하며 눈물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짧은 순간이요, 짧은 대화이지만 참으로 눈물겨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인류구원의 대역사가 절정에 이른 그 때, 그 자리에서 예수는 어찌보면 사사로운 일일 수도 있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애틋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에서 부모공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고백한 사람이라면, 이와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바쁘다’, ‘힘들다’는 핑계로 부모님께 소홀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효자나 효녀들이나 해야 할 일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며, 부모 공경을 소홀히 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1950년,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눈이 내려 하얗게 되었는데,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아 포탄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포탄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무위에 놓인 눈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칼바람은 쌩쌩소리를 내면서 거침없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뼈 속까지 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늦은 밤에, 만삭의 한 여인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피난을 가던 그녀는 가족과도 헤어지고 방황하다가 더 이상 발걸음을 재촉할 수가 없어, 다리 밑에 웅크리고 앉아 산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나 매서운 겨울 추위는 아기의 울음소리조차 얼려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막 아기를 낳고 기진 맥진한 산모는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겉옷을 벗어 그 아이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체온이 낮아질 때마다 여인은 자기의 옷을 하나씩 벗어서 아기를 덮어주었습니다. 칼바람은 더 심해졌고 마침내 여인의 치마와 저고리마저 벗어 아기를 덮어 주었습니다. 온 몸으로 아기를 감싸 안은 여인의 몸은 점점 얼어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다리 위를 지나가던 선교사 부부가 다리 아래에서 들리는 아기 울음 소리를 듣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선교사 부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소스라치며 놀랐습니다. 다리 밑에는 거의 벌거벗다시피한 여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돌처럼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 아기를 살리기 위해 그 엄동설한에 다리 밑에서 자기 옷을 다 벗어 아기를 감싸고, 자신은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그 후 세월이 지나 그 아이는 청년이 되었고, 어느 날 선교사를 통해 자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간 청년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금도 그 차가운 무덤 안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자기의 옷을 하나씩 벗어 어머니의 무덤을 덮었습니다. 맨몸이 된 그 청년은 그 무덤을 감싸 안고 통곡 했습니다.
“어머니! 그때 어머니는 저보다 훨씬 더 추우셨지요?”
그 뒤 그 청년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노인을 섬기는 일로 대신했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어머니를 대하듯이, 갈 곳 없고 돌 볼 이 없는 노인들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우리 부모님들 또한 그 어머니 같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에 대한 마음도 그 어머니와 같을 것입니다. 자신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 이라고 합니다. 그런 부모님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하며, 존경하고 또 존경해야 합니다. 병들고 연약하더라도 공경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이 직접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때때로 부모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녀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회가 있을 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그 기회를 놓치고 나서 반드시 땅을 치며 후회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이런 후회를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부모님께서 아직 살아계실 때, 더 존경하고 더 사랑하고 더 정성껏 돌봐드려야 합니다. 여기에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