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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를 활용하시는 하나님 (요 19:25-27)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버이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은 가정입니다. 이점은 말할 필요도 없고 더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정에는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고 부부가 있고 형제들이 있고 동기간들이 있습니다.
“형제” 얼마나 좋은 관계입니까. 형, 동생, 누나, 이 세상에서 이런 관계보다 더 좋은 관계는 없습니다. 이 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요소는 우애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형제가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하고 칭송했습니다. 이 관계에 반드시 우애가 있어야 합니다. 이 우애가 없으면 남남만도 훨씬 못합니다. 그래서 보면 아주 무서운 적이 되고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형제들도 참 너무나 많습니다.
또 “부부” 이 또한 얼마나 감칠맛 나는 관계입니까. 평생 함께 살아가는 관계, 이것이 부부입니다. 비록 남남이 결합되어 함께 살아가지만 이 관계처럼 신비한 관계도 없습니다. 이 관계를 생각해 보면 너무나 신비로운 관계인지라 이 관계를 하늘이 맺어준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부부의 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요소는 사랑입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을 말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서로 마음을 고백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부부입니다. 서양인들을 보면 참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하며 살아갑니다. 말로 마음을 표현하고 입으로 표현하고 몸으로 고백하고 시인하고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것이 진짜 사랑하는 거야 하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표현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속으로 사랑하고 뼛속으로 마음으로만 표현할 뿐 무표정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부부들의 사랑고백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부부들은 너나 할 것이 없이 상대방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평생 입 밖에도 내지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하고 살아간 부부들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불평 없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기적입니다.
목사님들이 어느 가정 세미나를 하는 과정에 집에 있는 아내들에게 전화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고 집집마다 전화를 걸어 “여보 사랑해요”하고 사랑을 고백하도록 전화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젊은 목회자들은 전화해서 순순히 사랑을 고백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나이 많은 목사님 한분은 한사코 전화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던 목사님들이 억지로 전화를 걸어서 바꿔 주었습니다. 전화를 받아든 이 나이 든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요, 사 사 사.... 사찰 잘 있어요?.” 이 문제가 이렇게 힘듭니다.
이것은 평소에 말로 표현하며 고백하며 살아가는 삶이 서툰 결과입니다. 표현하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심하게 살아간 결과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어쩌다 용기를 내서 여보 사랑해요 하고 말하거든 아내들은 그곳이 교회 안이든지 시장바닥이든지 길을 갈 때든지를 불문하고 그 자리에서 까무러져 쓰러져야 합니다. 졸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들이 자꾸만 사랑을 말로 언어로 표현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남편들이 모처럼 용기를 내서 당신 사랑해요 하고 말했는데 하는 대답이 왜 안던 짓 하느냐고 쏘아붙이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잘못 먹었느냐고 말하는 아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멋없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가족 가운데서 또 소중한 사람은 부모입니다. 이 부모처럼 소중한 존재도 없습니다. 부모는 나를 낳아준 생명의 공급자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 소중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자녀들이 부모를 무거운 짐처럼 생각하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노인들이 수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 이 시대는 병든 시대입니다.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그렇게 짐처럼 느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 부모처럼 소중한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이 부모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오늘 사람들이 너무나 모릅니다. 늙으신 부모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 팽팽하던 얼굴이 흉하게 주름살이 지고 그 예쁘던 몸매가 엉망이 되고 꽉 찼던 뇌가 반으로 줄어 치매가 생겨서 분별력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한번 눈여겨보십시오. 그런 부모를 귀찮다고 짐스러워할 일입니까.
오늘 자식들은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모르다가 언제 알게 되는가 하면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 존재의 소중함을 비로소 알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시간이 지나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고 상실한 후에 가서야 후회하고 아쉬워하고 눈물짓는 존재입니다. 지금 부모님이 생존하여 계신 분들은 효도하십시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 것만으로도 복입니다. 지극히 공양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식의 도리이고 사람의 도리입니다.
여러분, 효자동 이야기를 아십니까. 효자동에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아들 내외가 있었습니다. 이 아들 내외는 홀아버지를 참으로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잠을 잡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잠버릇이 아주 험악했습니다. 하루는 이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데리고 잠을 자다가 그만 깔아뭉개서 어린 손자를 죽게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효자 아들이 아침이 되어 문안인사를 드리려고 아버지 방에 가 보니까 그만 아이가 죽어 있고 아버지는 잠에 취해 잠을 자고 있습니다. 오늘 아들들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이름 난 효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효자 아들이 죽은 아이를 조용히 안고 나옵니다.
나오면서 그 죽은 아이에게 “이 불효막심한 놈, 네가 죽었으니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상하겠느냐”며 그만 아이의 따귀를 때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잠버릇이 험해서 깔아뭉개도 죽지 말아야지 네가 죽어서 할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속상하시겠느냐, 너 때문에 아버지께 불효하게 되었다“며 따귀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따귀를 얻어맞은 아이가 너무나 놀라서 재채기를 하더니 마침내 죽은 아이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얼마나 극적인 이야기입니까. 그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님이 그 효자에게 상을 내리고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효자동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효자동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들어서 흐뭇하고 전해서 흐뭇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오늘 같은 인륜이 무너진 험악한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가 청량음료처럼 상쾌한 맛까지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합니다. 성경은 부모공경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공경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공경의 대상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또 하나는 부모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아래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영의 공급자시고 내 부모는 육신의 공급자이십니다. 그래서 부모는 공경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나를 낳아준 생명의 공급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주어지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복을 받는다”
성경을 보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 복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으로부터 받는 복”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여러분, 양심은 자기 자신에게 가감 없이 진솔하게 속삭입니다. 사람은 떳떳한 일을 하면 양심이 자기 자신에게 상당한 칭찬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떳떳한 일을 하면 용기 있게 하고 당당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세상을 자신 있게 살게 하고 당당하게 살게 해 줍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며 살게 되면 매사가 당당해 집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또 하나의 복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음의 복”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다는 것은 상당한 복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세상이 인정해 줍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은 일단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사기가 없습니다. 믿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기본이 서 있는 사람은 다른 면에서도 하자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복”입니다. 성경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이같이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경하지 못하면 반대로 잃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질책”을 받습니다. 양심이 그냥 놔두질 않습니다. 양심이 자꾸만 자신을 고발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내가 나 자신은 결코 속일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떳떳하지가 못합니다. 행복하지 못합니다. 기쁨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불효하다 그 부모님이 돌아가셔 보십시오. 장례식 때 정말 떳떳하지 못 합니다. 형제들 보기가 부끄럽습니다. 이웃 사람들 보기도 부끄럽습니다. 평소에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고 잘 했어도 장례식 때는 후회밖에 남는 것이 없는 법인데 오죽하겠습니까. 그것이 벌입니다. 또 하늘로부터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공경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효자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효자를 활용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효자들을 택해서 크게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말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들 가운데서 다윗이 가장 부지런하게 일했습니다. 형들은 집에 있었지만 다윗은 들에서 양을 쳤습니다. 사무엘이 집에 와 기름을 부을 때도 형들은 집에 있었지만 다윗은 들에서 양치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양을 치는데도 책임감 있게 했습니다. 짐승 떼가 와서 양을 물어가려고 하면 쫒아가서 뺏어왔다고 합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양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효도입니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책임 있게 살아가는 삶이 바로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효도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택해서 마침내 그 나라의 백성을 책임지도록 목자장으로 삼고 임금으로 삼으셨습니다.
또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도 아버지 야곱에게 가장 효성스런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색동옷을 지어 입힌 것은 그 형제들 보다 더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은 사랑받을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 여러 아들들 가운데서 요셉에게만 색동옷을 지어 입혔겠습니까. 사람이 감동을 받으면 하늘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 조상들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우리민족은 이렇게 예부터 이 땅에서 감동스런 삶을 살면 하늘에서도 들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룻을 보십시오.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룻기를 읽어보면 룻은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생각과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룻이 볼 때 시어머니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여인입니다. 아주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에게 기댈 어떤 조건이 한 가지도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아무 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미래를 내다보면 희망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는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 시어머니를 따라 낫선 이국땅으로 주저하지 않고 따라갑니다. 그런 룻을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하고 칭찬해 줍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 후 룻이 얼마나 많은 복을 받습니까. 그의 자손에게서 다윗이 태어나고 그의 혈통에서 예수님이 탄생하게 됩니다.
또 요나답의 자손들을 보십시오. 요나답이 자손들에게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가훈으로 가르칩니다. 그랬더니 그 자자손손이 그 가훈과 전통을 존중해서 그것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 이야기가 마침내 하나님께 까지 전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 요나답의 자손을 얼마나 칭찬합니까(렘35;14). “너희들은 내 말을 어기고 순종하지 않지만 요나답의 자손은 그의 조상의 말을 순종하고 있다”고 칭찬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불러서 사용하시고 활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부모 공경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불러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남기신 말씀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눈물짓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내려다보시고 곁에 섰던 제자 요한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로다” 이 짤막한 말씀 속에 예수께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다 들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짤막한 구절들이 있는데 그 말씀들은 대부분 내포하고 있는 함축된 메시지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 짤막한 말씀 속에도 전달하고 져 하는 메시지가 참 많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요한이 마리아를 평생 모셨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시간에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고 탄식할 어머니를 생각하니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위로하고 보호하고 공경할 것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예수께서 당부하신 일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끝날 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고 또 한 가지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먼저 공경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부모에게 효도하십시오. 부모라는 존재는 살아계심 만으로도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고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부모들이 오늘에 와서는 부담스런 존재들이 되어 버리고 외면당하고 밖으로 내 몰리는 신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이 세상이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불효하다가 그 부모가 돌아가셔 보십시오. 그러면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그러면 그 자식들은 또 자신이 행한 대로 갚을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본 것이 그것뿐인데 아이들이 무슨 마음으로 그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공경하겠습니까. 그래서 예부터 심는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고치고 치유하고 바로잡아 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도 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가정을 건강하게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이고 내용이고 사명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주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