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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효 (요 19:25-37)
최근 방송에서 요즈음 부모들이 자식들로부터 가장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장학금을 받아오는 것이라고 했다는 조사보고를 들었습니다. 자식이 장학금을 받아 오며는 부모는 기쁘기 한량없지요. 더욱이 요즈음처럼 교육비가 많이 드는 시대에는 더욱 그러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 하며는 효가 물질로 평가되는 것 같아서 우려 되는 마음도 있습니다. 자식이 장학금을 타온다 돈 벌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는 아주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노인들이 오시면 용돈으로 몇 천 원씩 주는 교회가 많이 생겨 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늘어 나면서 노인들이 용돈을 받으려고 이교회 저 교회로 뛰어 다니는 것입니다. 이교회는 7시 예배에 용돈을 드리고 저 교회는 9시에 용돈을 드리고 또 다른 교회에서는 11시 예배에 용돈을 드리고 그런가 하면 오후 2시 예배에 용돈을 드리는 교회가 있으니까 그 모든 교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다니기 위해서는 뛰어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잘만 뛰어 다니면 하루 일당을 제대로 버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뛰어 다니는 노인들이 어떤 분들인지 아십니까? 대부분 집에서 자식들로부터 용돈 한 푼을 제대로 받지 못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몇 푼이라도 얻어서 쓸려고 힘없는 다리를 이끌고 이교회 저 교회 기웃거린다니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당신의 부모님 이 지금 이 시간 돈 몇 푼 얻기 위해 이렇게 뛰어 다니는 노인들 틈에 끼어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부모님이 용돈이 필요 합니다.
노인들이 무슨 용돈이 필요하냐. 자식들이 다모시고 사는데 무슨 돈이 필요하냐하면 돈을 벌지 못하는 부모들은 할말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노인들도 돈이 필요 합니다. 몸이 아프니까? 병원에도 가보아야지요. 손자들과 가까이 지내려니 선물도 사주어야지요. 교회에 나가니 헌금도 해야지요. 친구들 만나니 매번 얻어먹기만 할 수 없으니 국수라도 한 그릇사야지요. 쓸데가 많습니다. 사람노릇하려니 어느 정도의 용돈이 필요 합니다. 지위가 높은 공무원이나 회사 간부들에게는 품위 유지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월급과 관계없이 그 회사의 얼굴을 지키기 위해서 책정해 놓은 예산입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사람을 만나고 여기 저기 인사도 하고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품위 유지비가 필요 하다고 봅니다. 부모님의 얼굴은 자식의 얼굴입니다. 그 가문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을 귀하게 하려면 부모님에게 품위유지를 위한 용돈이 필요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 나 먹고 살기도 부족한데 무슨 품위유지비냐 하면 상식이하의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옛말로는 쌍놈입니다. 배운 것도 없고 예의도 모르는 그런 존재일 뿐이지요.
오늘은 예수님의 효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의 아들입니다. 영적으로 부모는 하나님이요. 육적인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효도 한 아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한 자식입니다. 두 가지로 나누어서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늘 아버지에 대하여 효도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공생애를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뜻 곧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래서 막 1장에는 38절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했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복음 전하러 오셨데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 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복음 전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누가 잡아 가는 사람도 없고 돌맹이 질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복음 전하는 것이 어렵다고 꺼리는 사람들이 많은 판인데 예수님 당시는 위협을 받는 시대입니다. 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회당에서 광야에서 장소와 대를 가리시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주님은 아버지에게 순종했습니다. 얼마나 순종했습니까?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공생애로 들어오신 것은 아버지에게 순종하기위하여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 순종이 십자가까지 이어지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십자가까지 순종 하겠다는 것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십자가 지겠다는 것입니다. 3절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효도 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3년 반 공생애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하고확실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효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에게 효를 다 했습니다. 그의 나이 30이 되기까지 그는 어머님을 잘 모시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요즈음 말로 하면 소년가장이었습니다.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홀로된 어머니와 여러 동생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눅 2:51절에는 예수님이 부모를 섬기며 산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 합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자는 부모님에게도 순종하는 자 입니다. 순종할 뿐만 아니라 받드셨습니다. 순종하는 것만 가지고도 부모님들은 자식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받드셨습니다. 진정한 효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받드는 것은 공경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받드는 사람 속에는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정성이 들어 있습니다. 어쩌다 부모님 한 번 찾아보고 용돈 몇 푼준 것으로 자기 할일을 다했다 생각하는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구약성경 룻기서는 우리 모두에게 효에 대한 큰 감동을 주고 있는 성경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으로 나오미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홀로된 시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를 변함없는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고향을 떠나 어머니의 고향으로 이사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여인이 아닙니다. 이방여인이 이스라엘에 들어가서 어떤 수모를 당 할런지 모릅니다.
요즈음우리나라에도 필리핀이나 몽골이나 외국에 여인들이 들어와 사는데 적응하며 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남편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모든 몫이 룻의 몫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서 이국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들에 나아가 이삭을 주워서 양식으로 삼고 어머니를 공양하며 삽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하는 말씀처럼 그녀를 훌륭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다윗왕의 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도 오르는 영광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효의 자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는 주님의 부모님을 향한 사랑이 십자가의 피와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온몸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어졌지요. 등은 채칙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지요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 있지요 옆구리는 창으로 쑤셔 놓았지요. 숨을 쉬는 것조차 힘이든 그 상황에서도 주님은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늙어서 머리가 허연 어머니를 보면서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어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을 합니다. 요한아 어머니 좁 부탁한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겼습니다. 그랬더니 집사하나가 무릎을 탁치며 하는 말이 옳거니 예수님도 힘드니까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겼구나. 나도 힘드니까? 동생에게 어머니를 맡겨야지 그리고 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동생아 내가 너무 힘드니까? 네가 어머니를 좀 맡아야겠다. 예수님도 그렇게 했다고 우리 목사님이 오늘 설교하더라.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그래야지요. 그런데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 예수님이 그 말 하고 바로 죽었데요. 형님 바로 죽을 거요? 안 죽을 거면 모시세요. 하더랍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할 랍니까? 부모님을 다른 형제에게 떠맡기고 죽을 랍니까? 그냥모시고 살랍니까?
중미 카리브 해상에 있는 푸에르토리코의 국립 미술관에는 조금 선정적인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아주 젊은 여인의 젖을 죄수의 복장으로 아랫도리만 가린 한 초췌한 노인이 빨고 있습니다. 처음 이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매우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박물관 안내자로부터 설명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그림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그림의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입니다. 그 과정에서 독재자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 됩니다.
독재정권은 이 노인에게 괘씸죄를 적용하여 음식물 투입 금지라는 형벌을 내립니다. 노인은 음식을 먹지 못하여 기력이 다 떨어지고 서서히 죽어 갑니다. 이 때 해산한지 얼마 안 되는 그의 딸이 면회를 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딸이 웁니다. 아버지 굶주려서 다 죽어가던 아버지를 딸은 그냥 볼 수가 없습니다. 딸은 갑자기 자기 앞가슴을 헤치고 누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자기 젖을 물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사랑으로 아버지를 살렸습니다. 푸에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최고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인정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버이 주일입니다. 당신의 부모는 지금 어디에 모시고 있습니까? 당신이 부모에 대하여 하는 일은 사람이 할 짖 입니까? 짐승들이나 하는 짖입니까? 1분 동안만 묵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설교/김영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