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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성탄절 (요일3:13-18)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인간은 본성적으로 욕심꾸러기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불평 불만으로 시작하고, 크고 작은 욕심들의 포로가 되어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 뒤에는 숨은 이기적 동기와 목적이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진짜 순수한 사람의 진짜 순수한 일을 보아도 먼저 속 진실이 무엇인지 의심부터 하게 됩니다. 남편의 갑작스런 친절에 "혹 바람을 피우지 않나?" 의심이 가고, 갑작스런 친구의 선물에 더 큰 무엇을 달라고 하지 않을까 염려스럽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은 이기심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자기를 생각하기 전에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내 이익을 취하기 전에 너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은 목적과 동기가 없어야 합니다. 구제를 생각하면 구제만 생각해야 하고, 선교를 하려면 선교만 생각해야 하고, 충성을 하려면 충성만 생각해야 참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사랑에는 이기적 동기와 목적이 있습니다. 한 한국 여자가 애인을 위하여 온갖 헌신을 다 하여 성공시켰는데 그가 변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미국 언론들은 그 여인을 이기적 사랑을 했다고 평가하였다고 합니다.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자살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사랑마저도 이기심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원하시는 사랑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 것이지 알게 되면 차라리 사랑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마치 숫자도 세지 못하는 아이에게 2차 방정식을 풀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이 느껴지고, "도레미파"도 모르는 아이에게 챠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3-45)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보다 오늘 본문 말씀은 더 높은 사랑의 행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먼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자이니 영생이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보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점입니다. 버리는 것을 고려해 보라는 말도 아니고, 노력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아예 단정적으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틀림없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데 왜 그렇게도 부담스러울까요? 그만큼 우리 인간은 참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실천하기는 더 어렵지만 그 전에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탄절은 무슨 절기입니까? 사랑의 절기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고 했습니다. 독생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감사하고 그 사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또한 그 사랑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고아원도 방문하고 장애인도 방문하고 또 구제도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탄절에는 원수끼리 전쟁도 하다가 휴전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며,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려야 할까요?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이미 주님에게 큰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자마다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반사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스데반을 보면 그가 돌아 맞아 죽어가면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으로 하신 기도와 닮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했습니다. 바로 스데반의 가슴에 예수가 있고 그리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알았기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에게 배운 사랑이었습니다.
영국 교회가 뉴질랜드에 헌신적인 한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성찬식이 있는 어느 안식일에 야만스럽게 살던 한 사람이 회심하여 그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성찬식을 인도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막 무릎을 꿇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분노심이 서린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밖으로 황급히 가더란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다시 돌아와서 조용히 제자리에 가서 앉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느낀 선교사는 예배 후에 그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을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내가 막 무릎을 꿇으려고 할 때, 내 다음 사람이 바로 나의 아버지를 죽여서 그 피를 빨아먹은 이웃 종족의 추장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 당시 나의 모든 신에게 맹세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날 때에 반듯이 죽이기로 말입니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처음에는 복수해야겠다는 충동이 거의 나를 압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죽이는 살인자들을 위해서 '아버지여, 그들을 용서하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나이다'라고 기도하시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나는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 옆에 와서 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라고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사랑을 알 때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면 더 잘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라는 큰 빚을 진 자가 갚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그냥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하고 그를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임금이 그를 다시 잡아오게 하고 말하기를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라고 말하고 노하여 그 사람을 옥졸들에게 붙였다는 얘기입니다(마18:23-35). 저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이 비유보다 저 잘 설명하고 있는 예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큰 빚입니다. 아무리 나에게 죽일 죄를 지었다고 해도 사람이 사람에게 진 빚은 주님에게 진 빚보다 더 크지 못합니다. 일만 달란트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인간에게 짖 빚을 말합니다. 그래서 참 성도는 사람에게 어떤 미움이 있다고 해도 조직적으로 복수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100억 탕감 받고, 1000만원 빚진 자를 감옥에 넣었다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까?
미국 뉴욕 할렘가의 불량 청소년 갱단 두목으로 있다가 회심한 <탐 스키너>라는 부흥사가 있습니다. 하루는 그 옛날의 동료 하나가 <탐 스키너>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의 뺨을 한 대 후려쳤습니다. 그러자 <탐 스키너>가 일어나면서 그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친구여!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나는 너를 용서하노라."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수십 년 동안 미움으로 얼어붙은 인간의 마음도 녹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용광로 앞에 남은 얼음덩이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형제의 미움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우>라는 믿음 좋고 충성스런 노예가 주인과 함께 노예 시장에 노예를 사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 조우가 힘 좋고 젊은 노예를 사려고 하지 않고 굳이 병들고 늙은 노예를 고집하여 어쩔 수 없이 그를 샀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집으로 돌아와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조우>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저 노예는 나를 유괴해서 노예 상인에게 판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 사람도 노예가 되어 병들어 노예 시장에 오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저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저 사람이 하나님께 갈 때까지 그를 돌봐주고 그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를 사자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땅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도 있고, 인간을 사랑하는 박애주의자도 있고, 자연을 사랑하는 자연주의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모를 들짐승도 사랑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봅니다.
구약이 말하고 있는 율법은 613가지라고 합니다. 그것이 그것을 요약하면 10가지가 되는데 바로 십계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또 이 십계명을 두 가지로 압축하자면 곧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마22:37). 그런데 또 이것을 다시 하나로 줄이자면 '사랑'이 됩니다. 구약 613개 율법의 액기스를 뽑아 정제하면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데 바로 그것은 '사랑'이 됩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죄는 어떤 죄일까요? 바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선더 싱의 이야기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티베트의 어느 마을에서 정글에 볼이 났습니다. 그런데 나무 가지 위에는 새의 보금자리가 있고 그곳에는 새끼 새들이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미칠 듯이 새끼 새들을 구하려 안달합니다. 불은 더 맹렬히 타오는데 어미 새는 도망치면 자기만은 살 것인데도, 결국 마침내 둥지 위로 달려들어, 새끼 새를 품고 함께 타죽어 버리더란 것입니다. 왜 어미 새가 죽었습니까?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대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상대를 사랑하면 상대만 이롭고 나는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너만 복된 것이 아니라 나도 복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팀이 "사랑은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시킨다"는 실험결과를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먼저 학생들에게 인자한 얼굴을 한 성직자가 난민병원에서 사랑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기록영화를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조사를 해보니 IG-A라고 하는 '감기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저항력'이 강화되어 꽤 높은 수치를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1주일 후 이번에는 나치가 유태인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기록영화를 보여주고 IG-A 검사를 했더니 감기에 대한 저항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랑하면 건강하게 됩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병에 걸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제일 먼저 가난한 자를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신 10:18)라고 했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라고 했습니다.
어떤 믿음 좋은 교수의 고백입니다.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술에 취해 떠들고 오고 있는 사람이 있어 기분이 상하였는데 한 술 더 떠서 돈을 달라고 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술 먹을 돈이 있으면 밥을 먹어야 할 것이고 막노동이라도 하면 될텐데 멀쩡한 몸으로 거지 행세를 하는 사람이 미워서 오히려 자리를 피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따끈따끈한 호도과자 1000원 짜리 한 봉지를 사서 그 사람에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술에 취한 사람이 고맙다고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 대한 비난과 수치심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너의 수준이 고작 그 까짓 것 밖에 안되냐? 그러면서 교회에서는 성도들한테만 얼굴에 미소를 던지며 사랑이 있는 것처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올해는 내 아이들에게만 싼타클로스가 되지 말고 다른 아이들에게 대하여도 싼타클로스가 되기 바랍니다. 원래 싼타클로스의 시작은 <니콜라스>라는 한 주교가 자기의 모든 것을 불쌍한 아이들과 착한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일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이 <니콜라스>가 죽자 터키사람들은 그를 <성 니콜라스>라 불렀고 그 후 <산타 니콜라스>라는 이름으로 전해내려 오다가 <산타클로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상처를 입은 사람들 누구에게도 이 사랑은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저 술집에도 룸싸롱에도 마약 소굴에도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도덕적 의가 선교적 관심보다 더 크게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술에 만취되어 길거리에서 "왝왝" 거리며 토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 비난과 정죄가 앞섭니다. 그러나 그들도 사랑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유흥가를 찾아가 전도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창녀들에게 전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거창한 장례식도, 긴 찬사도 삼가주시오. 그리고 내가 노벨상 수상자라는 것도 말하지 마시오. 내 학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은 마틴 루터 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다가 갔다고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주기 위해, 헐벗은 사람들에 옷을 주기 위해 살다가 갔다고 말해 주시오. 내 생애에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다가 갔다고 뭇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다가 갔다고 말해 주기를 나는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탄절은 사랑의 절기입니다. 사랑에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