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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 1-13
며칠 전 코리아리서치센터가 전국의 성인 1,543명을 대상으로 전화조사로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삶의 지표, ‘국민체감지표’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조사에서 “우리 사회가 살기 좋은가?”라는 질문에 34.4%는 “살기 좋다”고 답했지만, 64.3%는 “살기 좋지 않다”는 불만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의 기준과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마음 아팠던 것은 그 불만이 그럴 수도 있는 단순한 불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불만이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나라로 이민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10명 중 4사람이 가능하다면 이민 가고 싶다고 응답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민 가고 싶은 사람의 절반 이상이 20, 30대 젊은이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특히, 20대 여성의 경우 3명 중 2명꼴(66.6%)로 이민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3․1절 84주년을 보내면서,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 중국 만주벌판으로, 러시아로, 국외로 나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애국운동 했던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루는 시대적인 변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젊은이들의 불만족과 그로인한 希望移民 정서는, 그래도 저는 그리 큰 위기의 문제라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라 잃은 설움과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참혹상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의 신세대적인 가치관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위기적인 요소는 기성세대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라 잃은 설움도 겪었고, 분단의 아픔과 공산주의자들과의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면서, 그 고난의 과정을 어렵게 극복하고 오늘의 자리에 서 있는, 고난의 痕迹을 가진 어른들의 우리사회 이탈현상입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 젊은이들의 사회이탈현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위기 요소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정보와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 이 땅을 떠난 자들이 있습니다. 또 기회만 되면 지금도 떠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그 수가 소수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현상은 이 나라와 젊은이들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행위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은 우리나라 고난의 歷史의 산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부강하고 발전한 우리나라를 지탱해 주고 있는 주춧돌과도 같은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역사의 아픔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역사교과서가 말할 수 없는 가장 훌륭한 살아 있는 역사 선생님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과 사랑하는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이 생명 걸고 살다가 뼈 묻고 죽을 땅이 있습니까? 3․1절 84주년 기념주일을 맞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늘 우리나라와 세계 역사의 사건들 속에 주시는 말씀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단어를 말하라고 한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갈릴리 북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척박한 사막기후의 땅입니다. 여름 내내 그 뜨거운 태양 볕이 작렬하지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습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저절로 자랄 수 없는 땅입니다. 그런 척박한 사막을 가꾸고, 일구고, 설비를 갖추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의 땅은 1%의 자원과 99%의 땀방울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삭 때에,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흉년이 첫 흉년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든 흉년은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체 정착도 하기도 전에 든 흉년입니다. 그 흉년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땅 가나안 삶에 위기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습니다. 언약의 땅에 믿음으로 들어와 사는 아브라함에게, 적잖은 실망과 절망감을 준 위기사건이었습니다.
고대근동지방의 흉년 든 사정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아마 쉽게 비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식량난을 겪고 있는 요즘의 북한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는 위기라 생각합니다. 이런 기근의 위기가 가나안 땅에 주기적으로 찾아왔습니다. 기근이 들면 아예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사는 삶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기근을 피해서, 그 땅을 떠나는 것이 삶의 지혜였습니다. 양식이 풍족한 애굽으로 내려가서 기근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지내다가 기근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기근 든 가나안 땅을 떠나서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에 내려간 것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서 흉년을 만난 아브라함에게, 힘들었던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는, 하나님께서 명하여 찾아온 약속의 땅 가나안에 어떻게 기근이 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곧 그의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미래와 그의 후손들의 삶에 대한 위기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라 명하신 그 언약의 땅에도 기근이 찾아왔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들었던 그 흉년이, 아들 이삭 때에도 또 들었습니다. 또 한 번의 위기 상황이 닥쳐 온 겁니다. 똑 같은 위기가 두 번 닥쳐왔다는 것은, 단순한 위기상황이라는 以上의 意味가 있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대한 신뢰의 문제일 뿐 아니라, 그 땅에 부르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 되는 겁니다. 이삭은, 그 때 결단합니다. “내가 애굽에 내려가서 이 기근을 피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랬겠지요. “참, 하나님을 알 수 없어! 한 번도 아니고 또 이런 위기가 닥쳐온 거야” 했을 겁니다. 얼마나 절망하고, 힘들어 했겠습니까? 하나님 한 분 때문에, 가나안 땅에 와서 살고 있는데. 가나안 땅에 사는 유일한 이유가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 때문 아닙니까?
결국,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먼저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구체적인 기회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명령합니다(창 26, 2).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다시 약속하십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십니다(창 26, 3-4). 하나님은 이삭에게 흉년 든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고, 그 땅에 거주하면서 거기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필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면 가나안 사람들은 어떻게 그 기근을 피했는가 하는 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대부분의 가나안 사람들은 기근이 닥쳐오면 그 기간을 피해서 양식을 구할 수 있는 지역으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사왔습니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흉년 든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흉년 든 가나안 땅을 피하여 지금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거주하면서 기근이 들었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 길을 찾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럴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게 복을 주고,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한 오늘 우리나라와 이 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위기를 푸는 방식을 달리하라는 말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라는 국정지표를 내걸고 「참여의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새로운 장관들도 기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기용된 장관들의 면면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시각에 의해서 기용된 인물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은 두 가지인 듯 합니다. 企待 半 憂慮 半인 듯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이들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우려 속에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을 중심한 世界列强들의 움직임과 남북관계의 문제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누구도 지금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확실한 것을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요즘 같이 불확실한 우리의 미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갈브레이드(John Kenneth Galbraith)는 현대사회를 가리켜 일찍이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그가 우리 시대를 가리켜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급변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국제정세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그 논지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가 우리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겁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바른 길로, 정의의 길로, 평화와 공존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는 가치(價値, Value) 없다는 겁니다. 특별히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과 나라들에게 그렇습니다. 바른 정신이 없다는 겁니다. 얼이 없고, 건강한 삶의 철학이 없다는 이야깁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우리 시대에, 교회 안에, 기독교 안에 세계 속에 진정한 福音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갈브레이드가 우리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우리 시대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이런 方式으로 계속 나간다면 우리 시대는 亡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심각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갈브레이드는 현대사회 속에서, 삶의 길이 없고, 평화와 공존의 길이 없고, 진리가 없고, 생명이 없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H. Nouwen)은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확실하게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불확실한 시대, 영원한 가치를 상실한 시대, 절대적인 윤리가 상실된 시대에 살면서, 영원한 가치를 붙들고 고민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否認하고 자기 十字架를 지고 주님을 쫓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시대의 사람이 될 수 있고(時人),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the Region of God)의 일꾼이요, 사람을 살리고, 역사를 살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가야 합니까? 남북문제, 북핵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지구촌의 문제입니다. 세계사회의 문제입니다. 온 세계가 모두 우리 이웃이 되어야 하고, 적대관계에 있다 해도 우리가 풀어야만 하는 과제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닥친 오늘의 위기를 어떻게 푸느냐, 푸는 方式의 문제입니다. 기근 든 가나안 땅에 살 때, 그 땅을 떠나는 것이 보편적인 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에게 기근 든 가나안 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 땅에 그대로 살면서 기근의 문제를 풀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북핵문제, 한반도 문제를 푸는 미국의 방식은, 전쟁입니다. 문제는 전쟁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북핵문제를 푸는 방식인가?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때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무엇이라 외쳐야 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가리켜 크게 셋으로 불렀습니다. ‘로에(האר)’, ‘호제(הזח)’, ‘나비(איבנ)’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은 크게 3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살고 있는 그 역사의 현장, 곧 땅의 소리를 듣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누구보다도 그들이 살던 시대의 소리를 듣고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땅의 소리를 듣는 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동시에 하늘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자들이었습니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하늘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자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의 역사와 상황, 사건을 해석해 주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이 시대와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고, 길을 제시하고, 진리를 선포하고, 생명을 선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선지자 중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을 때, 그 때 역사적인 의미를 그 누구보다 잘 해석해 준 선지자입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고레스(Cyrus, 539-529 B.C.E.)가 페르시아를 통치하게 되었을 때, 고레스는 자기가 다스리는 일부 피지배 민족들에게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고,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생활을 존중하는 개방적인 페르시아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그 때, 고레스는 기원전 538년에 신년 축하식에서 ‘고레스 칙령(The Edict of Cyrus)"을 발표했는데,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귀환할 수 있고, 가서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지낼 수 있도록 하라는 칙령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고레스의 이와 같은 칙령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특별한 정책이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페르시아 속국으로 있던 피지배 민족들에 대한 고레스의 일반적인 관용정책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관용정책의 대상 중에 유대인들이 포함된 것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레스의 이와 같은 정책을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선지자 이사야였다는 점이 특별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해석으로, 고레스의 칙령과 정책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사건으로 고백되고, 이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라크전쟁 문제나 북핵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한반도 전쟁시나리오 대해서 많은 견해들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은 이 문제를 푸는 방식을 전쟁논리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무어라 말해야 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요, 그리스도인의 역할이요, 교회의 사명이라는 겁니다.
지난 2월 24일자 Newsweek지, 표지 사진으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의 사진을 게재했습니다. 또 한 장의 사진은, 이라크에 파병하는 군인을 위해서 한 사제가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무얼 위해서 기도하고,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부시 미국 대통령이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 사진일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대하여 굉장히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주장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논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세상 사람들의 논리요, 비 복음적인 논리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부시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전쟁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죄악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탄생하신 그 밤, 천군천사들이 노래하여 찬양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 14). 주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셨습니다(마 5, 9). 평화를 창조하는 자가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통해서, 전쟁이 아닌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경제인은 경제활동으로써 전쟁이 아닌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언제나 우리는 평화를 일구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전쟁 논리를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대다수 거대교단들과 기독교인들, 신학자들이 히틀러의 전쟁과 독재를 지지했다는 역사적 과오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극소수의 신학자들과 기독교인들만이 히틀러가 잘 못되었다고 말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흐르는 세상을 만들 때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웃 사랑의 복음으로, 무가치한 이웃에 대한 인정과 존중, 이웃 국가의 아픔을 우리가 함께 짊어질 때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원수 사랑의 복음으로, 증오심을 버리고, 용서하고, 적을 형제로 보고, 둘이 다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원수에 대한 지원과 기도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친미주의자도 아닙니다. 반미주의자도 아닙니다. 미국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자입니다. 그리고 미국을 선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미국과 더불어 이 땅에 진정한 주님의 평화의 복음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은, 극우도 극좌도 아닙니다. 나와 그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 둘이 다 保全되는 길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 평화의 길을 버리지 않고,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시고, 온 세계와 열방을 축복하는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아멘.
출처/박은호목사 설교 중에서
며칠 전 코리아리서치센터가 전국의 성인 1,543명을 대상으로 전화조사로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삶의 지표, ‘국민체감지표’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조사에서 “우리 사회가 살기 좋은가?”라는 질문에 34.4%는 “살기 좋다”고 답했지만, 64.3%는 “살기 좋지 않다”는 불만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의 기준과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마음 아팠던 것은 그 불만이 그럴 수도 있는 단순한 불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불만이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나라로 이민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10명 중 4사람이 가능하다면 이민 가고 싶다고 응답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민 가고 싶은 사람의 절반 이상이 20, 30대 젊은이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특히, 20대 여성의 경우 3명 중 2명꼴(66.6%)로 이민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3․1절 84주년을 보내면서,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 중국 만주벌판으로, 러시아로, 국외로 나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애국운동 했던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루는 시대적인 변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젊은이들의 불만족과 그로인한 希望移民 정서는, 그래도 저는 그리 큰 위기의 문제라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라 잃은 설움과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참혹상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의 신세대적인 가치관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위기적인 요소는 기성세대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라 잃은 설움도 겪었고, 분단의 아픔과 공산주의자들과의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면서, 그 고난의 과정을 어렵게 극복하고 오늘의 자리에 서 있는, 고난의 痕迹을 가진 어른들의 우리사회 이탈현상입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 젊은이들의 사회이탈현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위기 요소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정보와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 이 땅을 떠난 자들이 있습니다. 또 기회만 되면 지금도 떠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그 수가 소수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현상은 이 나라와 젊은이들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행위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은 우리나라 고난의 歷史의 산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부강하고 발전한 우리나라를 지탱해 주고 있는 주춧돌과도 같은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역사의 아픔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역사교과서가 말할 수 없는 가장 훌륭한 살아 있는 역사 선생님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과 사랑하는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이 생명 걸고 살다가 뼈 묻고 죽을 땅이 있습니까? 3․1절 84주년 기념주일을 맞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늘 우리나라와 세계 역사의 사건들 속에 주시는 말씀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단어를 말하라고 한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갈릴리 북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척박한 사막기후의 땅입니다. 여름 내내 그 뜨거운 태양 볕이 작렬하지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습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저절로 자랄 수 없는 땅입니다. 그런 척박한 사막을 가꾸고, 일구고, 설비를 갖추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의 땅은 1%의 자원과 99%의 땀방울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삭 때에,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흉년이 첫 흉년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든 흉년은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체 정착도 하기도 전에 든 흉년입니다. 그 흉년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땅 가나안 삶에 위기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습니다. 언약의 땅에 믿음으로 들어와 사는 아브라함에게, 적잖은 실망과 절망감을 준 위기사건이었습니다.
고대근동지방의 흉년 든 사정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아마 쉽게 비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식량난을 겪고 있는 요즘의 북한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는 위기라 생각합니다. 이런 기근의 위기가 가나안 땅에 주기적으로 찾아왔습니다. 기근이 들면 아예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사는 삶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기근을 피해서, 그 땅을 떠나는 것이 삶의 지혜였습니다. 양식이 풍족한 애굽으로 내려가서 기근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지내다가 기근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기근 든 가나안 땅을 떠나서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에 내려간 것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서 흉년을 만난 아브라함에게, 힘들었던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는, 하나님께서 명하여 찾아온 약속의 땅 가나안에 어떻게 기근이 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곧 그의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미래와 그의 후손들의 삶에 대한 위기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라 명하신 그 언약의 땅에도 기근이 찾아왔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들었던 그 흉년이, 아들 이삭 때에도 또 들었습니다. 또 한 번의 위기 상황이 닥쳐 온 겁니다. 똑 같은 위기가 두 번 닥쳐왔다는 것은, 단순한 위기상황이라는 以上의 意味가 있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대한 신뢰의 문제일 뿐 아니라, 그 땅에 부르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 되는 겁니다. 이삭은, 그 때 결단합니다. “내가 애굽에 내려가서 이 기근을 피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랬겠지요. “참, 하나님을 알 수 없어! 한 번도 아니고 또 이런 위기가 닥쳐온 거야” 했을 겁니다. 얼마나 절망하고, 힘들어 했겠습니까? 하나님 한 분 때문에, 가나안 땅에 와서 살고 있는데. 가나안 땅에 사는 유일한 이유가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 때문 아닙니까?
결국,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먼저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구체적인 기회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명령합니다(창 26, 2).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다시 약속하십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십니다(창 26, 3-4). 하나님은 이삭에게 흉년 든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고, 그 땅에 거주하면서 거기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필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면 가나안 사람들은 어떻게 그 기근을 피했는가 하는 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대부분의 가나안 사람들은 기근이 닥쳐오면 그 기간을 피해서 양식을 구할 수 있는 지역으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사왔습니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흉년 든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흉년 든 가나안 땅을 피하여 지금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거주하면서 기근이 들었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 길을 찾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럴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게 복을 주고,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한 오늘 우리나라와 이 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위기를 푸는 방식을 달리하라는 말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라는 국정지표를 내걸고 「참여의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새로운 장관들도 기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기용된 장관들의 면면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시각에 의해서 기용된 인물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은 두 가지인 듯 합니다. 企待 半 憂慮 半인 듯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이들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우려 속에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을 중심한 世界列强들의 움직임과 남북관계의 문제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누구도 지금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확실한 것을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요즘 같이 불확실한 우리의 미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갈브레이드(John Kenneth Galbraith)는 현대사회를 가리켜 일찍이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그가 우리 시대를 가리켜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급변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국제정세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그 논지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가 우리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겁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바른 길로, 정의의 길로, 평화와 공존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는 가치(價値, Value) 없다는 겁니다. 특별히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과 나라들에게 그렇습니다. 바른 정신이 없다는 겁니다. 얼이 없고, 건강한 삶의 철학이 없다는 이야깁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우리 시대에, 교회 안에, 기독교 안에 세계 속에 진정한 福音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갈브레이드가 우리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우리 시대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이런 方式으로 계속 나간다면 우리 시대는 亡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심각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갈브레이드는 현대사회 속에서, 삶의 길이 없고, 평화와 공존의 길이 없고, 진리가 없고, 생명이 없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H. Nouwen)은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확실하게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불확실한 시대, 영원한 가치를 상실한 시대, 절대적인 윤리가 상실된 시대에 살면서, 영원한 가치를 붙들고 고민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否認하고 자기 十字架를 지고 주님을 쫓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시대의 사람이 될 수 있고(時人),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the Region of God)의 일꾼이요, 사람을 살리고, 역사를 살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가야 합니까? 남북문제, 북핵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지구촌의 문제입니다. 세계사회의 문제입니다. 온 세계가 모두 우리 이웃이 되어야 하고, 적대관계에 있다 해도 우리가 풀어야만 하는 과제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닥친 오늘의 위기를 어떻게 푸느냐, 푸는 方式의 문제입니다. 기근 든 가나안 땅에 살 때, 그 땅을 떠나는 것이 보편적인 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에게 기근 든 가나안 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 땅에 그대로 살면서 기근의 문제를 풀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북핵문제, 한반도 문제를 푸는 미국의 방식은, 전쟁입니다. 문제는 전쟁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북핵문제를 푸는 방식인가?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때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무엇이라 외쳐야 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가리켜 크게 셋으로 불렀습니다. ‘로에(האר)’, ‘호제(הזח)’, ‘나비(איבנ)’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은 크게 3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살고 있는 그 역사의 현장, 곧 땅의 소리를 듣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누구보다도 그들이 살던 시대의 소리를 듣고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땅의 소리를 듣는 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동시에 하늘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자들이었습니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하늘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자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의 역사와 상황, 사건을 해석해 주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이 시대와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고, 길을 제시하고, 진리를 선포하고, 생명을 선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선지자 중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을 때, 그 때 역사적인 의미를 그 누구보다 잘 해석해 준 선지자입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고레스(Cyrus, 539-529 B.C.E.)가 페르시아를 통치하게 되었을 때, 고레스는 자기가 다스리는 일부 피지배 민족들에게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고,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생활을 존중하는 개방적인 페르시아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그 때, 고레스는 기원전 538년에 신년 축하식에서 ‘고레스 칙령(The Edict of Cyrus)"을 발표했는데,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귀환할 수 있고, 가서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지낼 수 있도록 하라는 칙령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고레스의 이와 같은 칙령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특별한 정책이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페르시아 속국으로 있던 피지배 민족들에 대한 고레스의 일반적인 관용정책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관용정책의 대상 중에 유대인들이 포함된 것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레스의 이와 같은 정책을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선지자 이사야였다는 점이 특별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해석으로, 고레스의 칙령과 정책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사건으로 고백되고, 이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라크전쟁 문제나 북핵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한반도 전쟁시나리오 대해서 많은 견해들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은 이 문제를 푸는 방식을 전쟁논리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무어라 말해야 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요, 그리스도인의 역할이요, 교회의 사명이라는 겁니다.
지난 2월 24일자 Newsweek지, 표지 사진으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의 사진을 게재했습니다. 또 한 장의 사진은, 이라크에 파병하는 군인을 위해서 한 사제가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무얼 위해서 기도하고,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부시 미국 대통령이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 사진일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대하여 굉장히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주장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논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세상 사람들의 논리요, 비 복음적인 논리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부시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전쟁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죄악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탄생하신 그 밤, 천군천사들이 노래하여 찬양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 14). 주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셨습니다(마 5, 9). 평화를 창조하는 자가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통해서, 전쟁이 아닌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경제인은 경제활동으로써 전쟁이 아닌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언제나 우리는 평화를 일구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전쟁 논리를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대다수 거대교단들과 기독교인들, 신학자들이 히틀러의 전쟁과 독재를 지지했다는 역사적 과오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극소수의 신학자들과 기독교인들만이 히틀러가 잘 못되었다고 말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흐르는 세상을 만들 때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웃 사랑의 복음으로, 무가치한 이웃에 대한 인정과 존중, 이웃 국가의 아픔을 우리가 함께 짊어질 때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원수 사랑의 복음으로, 증오심을 버리고, 용서하고, 적을 형제로 보고, 둘이 다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원수에 대한 지원과 기도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친미주의자도 아닙니다. 반미주의자도 아닙니다. 미국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자입니다. 그리고 미국을 선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미국과 더불어 이 땅에 진정한 주님의 평화의 복음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은, 극우도 극좌도 아닙니다. 나와 그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 둘이 다 保全되는 길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 평화의 길을 버리지 않고,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시고, 온 세계와 열방을 축복하는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아멘.
출처/박은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