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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57-62
미국 웨스턴 대학에 다니던 한 학생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가지고 자기 애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나를 미치게 할 만한 사상을 발견했노라. 지금까지는 너를 나의 신처럼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신이고, 나의 생명이고, 나의 조국이고, 나의 모든 것이며, 밤에는 그것에 대하여 꿈을 꾸고, 낮에는 그것을 위해서 일을 한다. 어느 시간이고 어느 장소에서든지 이 일을 위해서는 내 생명을 기쁘게 내어버릴 용의가 있다. 나는 그것을 떠나서는 애정도 생각할 수가 없노라.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너를 버리고 공산주의 운동을 하기 위하여 멕시코로 떠난다."
이런 편지를 써놓고 그는 애인을 버리고 가 버렸다. 이것이 공산주의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적어도 애인도, 자기 조국도, 자기 부모도 버릴 줄 알고, 나아가 자기 자신도 버릴 줄 안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4가지 절대가 있는데, 첫째 절대는 절대 신앙이다. 칼 막스나 모택동의 어록을 송두리째 외운다. 우리가 성경을 외우듯이 그것을 외우고, 밤중에도 그것을 배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잘 때도, 마취를 당했을 때도, 술에 취했을 때도, 꿈속에까지도 모택동을 찬송하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그런 사람이 된다.
둘째 절대는 절대 헌신이다. 언제든지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부모까지도 죽이고 자기 처자까지도 버린다.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것이다.
셋째 절대는 절대 훈련을 받는 것이다. 저는 기독교인들의 시취 문제를 종종 취급해 보는데, 집사, 장로들의 시취를 해보면 80%가 전부 낙제 점수이다. 기독교인들은 성경공부를 안 한다. 요즘 사이비 이단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자기들의 교리를 거의 다 줄줄 외우고 다니는데 비해 기독교인들은 공부를 안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필요하다면 며칠을 잠을 안 자고서도 공산주의 훈련을 받는다.
넷째 절대는 절대 행동이다. 기독교인은 말이 앞선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말보다도 행동이 앞선다. 행동하고 말한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자,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절대 제자인가?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고 어디까지 버릴 수 있는가? 깊이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다른 말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적어도 이것 정도는 각오하고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1.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각오해야 한다(57-58절).
57절을 보십시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은 것 같다. 그래서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을 좇으며 살고자 했다.
예수님은 수천 수만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다. 예수님을 따라 가면,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자기도 예수님과 같은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제자로서의 삶이 아주 고상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또, 메시아 왕국이 건설되면 한 자리 할뿐만 아니라 장래가 보장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예수님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래서 말한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을 것이라고,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하셨다.
산에 사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도 집이 있다. 굴은 여우에게 피난처가 된다. 새의 집은 새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 비가와도 피할 피난처도 없고 아무리 피곤해도 쉴 만한 그늘진 곳이 없었다. 계속되는 사역 속에서 매일매일 피곤하시고 지친 삶을 사셨다. 너무 피곤하고 잠이 부족하여 배를 타고 가시다가 큰 풍랑을 만나셨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주무셨다. 밤늦도록 따르는 사람들을 섬기시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생활이 없으셨다. 24시간 긴장을 풀고 사실 수 없었다. 양들이 병들거나, 아프거나 위험에 처하면 자다가도, 기도하다가도 가셔야 했다. 예수님은 제자더러 바다를 건너가라 하시고 기도하시다 바람이 부니까 제자들이 걱정되어서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해 주셨다. 여러분,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드는가?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하셨다. 또,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목자의 심정 때문에 밤이 되어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이 양 떼를 어떻게 도우며, 어떻게 방향을 잡아 줄까 하는 것으로 밤새 기도하셨다.
이렇게 사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과 같이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롬 8:17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 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막연한 꿈과 이상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했다. 그 이상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아픔이 따르는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고달픈 삶인가를 깨우쳐 주심으로 분명한 각오를 하고 따르도록 일러 주셨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막연한 꿈과 이상만으로 제자가 되고자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영광의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라 온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말하면, 고난 다음에는 반드시 영광이 오게 되어 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고난이 있음을 알고 좇아가자. 고난을 당할 때에 주어질 영광을 생각하며 능히 감당해 나가자.
2.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최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한다(59-60절).
5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복음 역사에 쓰시고자 하셨다. 이 부르심은 참으로 큰 은혜였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무엇인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그리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부친 장사하는 일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사실 윤리적으로 볼 때, 부친을 장사하는 일보다 더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은 없다. 가족 중에 누가 죽었으면 군대에 가 있는 자녀도 휴가를 보내준다. 직장에서 아무리 급해도 부친 장사 지내도록 배려를 해 준다. 이렇게 부친을 장사하는 일은 세상 기준으로서는 가장 우선적인 일이다.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그 어떤 일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부친을 장사하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는가? 60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하셨다. 예수님은 부친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최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
죽은 자를 장사하는 일보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죄로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당연히 장례를 지내는 일보다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최우선으로 감당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주님이 주신 사명을 언제나 핑계되지 말고 최우선으로 감당해야 하겠다. 먼저 핑계되어 죽은 자를 장례 지내고 산 자까지 죽이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주의 주신 사명을 뒤로 미루거나 차선으로 두어 "다음에 하지요"라고 하지 말자. 이것도 잃고 산 자까지 잃는 것은 주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또 참 제자가 될 수 없다.
3.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정과 미련을 버려야 한다(61-62절).
61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마음의 각오가 어느 정도 된 사람이다. 앞으로 다가올 고달픈 삶과 복음 전파의 중요성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주를 좇겠다고 결단을 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했다.
여러분, 구약 열왕기상 19:19-21에서 엘리야는 엘리사를 자기 제자로 불렀다. 그러자 엘리사는 집에 돌아가 부모와 작별 인사를 하고 따르겠다고 했다. 그 때 엘리야는 그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허락하시지를 않았다.
왜인가? 예수님이 보실 때 이 사람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 마음속에 남은 한 가닥의 인간적 정과 인연을 끊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지막 결단을 못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집에 돌아가 가족과 작별하고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셨다(62절).
여러분,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자가 뒤를 돌아보면 밭을 똑바로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쟁기가 넘어져 부러지거나 쟁기가 넘어져 몸을 다치게 된다. 그러므로 손에 쟁기를 잡았으면 앞만 보고 열심히 밭을 갈아야 한다.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마음속에 남은 한 가닥의 인간적 미련과 끈끈한 정을 끊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사랑이 없고 인정이 메마른 분같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을 좇기로 결단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명의 길을 가야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은 부르심을 받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했을 때, 아브람은 순종하여 인연, 지연, 혈연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아브람이 인연, 지연은 떠났으나, 혈연은 온전하게 끊지 못했다. 하나 있는 조카 롯을 두고 떠나야 했는데 혈연을 끊지 못하고 데리고 다녔지요. 그 롯 때문에 아브람은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어느 마을에 예수 믿는 장립집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이 사람이 머리가 좋고 똑똑하다. 그런데 이 분이 사는 마을은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분을 그 마을의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시고자 하는가 생각을 했는데, 이 분이 인정이 많아서 그 인정을 끊지 못하여 신앙이 자라질 못하고 늘 채찍을 맞는 것을 본다.
교회에서는 재정 부장을 맡아서 열심히 하고, 교회 살림을 잘 삽니다만, 집안에 돌아오면 제사를 지내는데 참석을 한다. 물론 절은 하지 않지만, 집안 사람들이 욕을 한다며 참석하여 뒷자리에 앉아 있다. 또 마을에 결혼식이 있으면 참석을 하고 곁에서 누가 술을 한잔 권하면 권하는 그 사람 체면을 봐서 한잔씩 한다.
상대방 생각을 늘 하다가 술도 먹고, 제사를 지내는데 참석을 한다. 그런데 그 자녀들과 몇몇 집안 사람들이 그 사람 신앙을 본받아 또 그렇게 한다. 교인들도 그렇게 닮는다. 이렇게 정에 매여 놓으니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못한다.
쟁기를 붙잡고 뒤를 돌아보면 밭이랑이 바르질 못한다. 꾸불꾸불하다. 이 분 신앙도 꾸불꾸불하다. 하나님 나라에 이런 사람은 합당치 않다고 하신다. 이처럼 부름 받은 성도는 마음속에 남은 한 가닥의 미련과 정을 부인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잔인하고 무자비 한 것 같다. 또 어떻게 보면 인정이 손톱만큼도 없는 냉혈 인간으로 보일 수도 있다. 또 사단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가족과 마지막 인사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여 언제나 인정에 이끌리게 한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이 끈끈한 정도, 혈연도, 지연도 떠나고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살아야겠다. 신앙을 위해 떠나야 할 것은 떠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끊어야 할 것은 끊어야 신앙이 자란다. 이런 자가 제자에 합당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오늘도 우리는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예수님을 본받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조달용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