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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5:1-14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중보자의 사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죄를 용납할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 많은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를 보증해주시고 책임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까지 담당하시고 화목 제물로 피 흘려 우리의 죗값을 치러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를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그의 피 공로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를 보증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중보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게 되었고, 천국의 유업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교회에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발소 허가를 얻으려고 했지만 허가 규정이 좀 까다로웠습니다. 좀 시간이 걸리고 경비가 좀 들어도 시설을 규정에 맞추어서 했으면 허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 자유당 때처럼 적당히 해서 허가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참으로 믿는 다는 사람으로써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업은 사업이고, 신앙은 신앙이다’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지금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중간업자를 통해서 허가 담당자에게 돈을 먹였습니다. 자유당 때 같으면 가능하지만 박정희 정권 초기라 어림도 없었습니다. 결국 허가도 나오지 않고 붉은 줄을 받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이발소 허가를 절대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 딱한 사정을 알게된 어떤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당시에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고 인정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그 부끄럽고 딱한 사정을 알았지만 그래도 도울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그 형편을 잘 설명하고 그 사람에 대하여 책임 질 뿐만 아니라 시설을 온전히 갖출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에 붉은 줄은 삭제되고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붉은 줄 때문에 절대로 허가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분의 보증으로 모든 죄를 탕감 받고 그분의 은혜로 붉은 줄은 온전히 삭제되고 정상적인 업자로 허가를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물며 예수님은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영원토록 보증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죄의 은총은 말할 것도 없고 영생의 축복까지 보장받게 되었으니 어찌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성도라면 평생을 주님만을 위하여 살아도 부족할 것입니다.
옛날 다윗 왕도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너무 감사해서 자기 평생에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그는 시편116편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의 은혜를 보답하며 살고저 하는 성도만이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의 하나라도 이러한 감격과 조그마한 헌신조차도 없다면 어떻게 은혜 받은 성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6:1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무익한 종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복된 은혜를 받은 자 답게 감사와 감격과 그리고 주님과 몸된 교회를 위해서 뜨거운 열심과 헌신의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에 보면 구원받은 수많은 성도들이 너무 검격해서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놀랍고도 복된 비밀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오른 손에 책’이라는 것은 세상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것에 대한 그의 주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 밖에 썼다’고 하는 것은 완전하게 기록된 것으로 가감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인으로 인봉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을 교회에 알게 하시고 관계없는 자들에게는 알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교회로 이명증서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인봉을 합니다. 중요한 문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받는 당회장만 보게 하고 관계없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창18: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시는 복된 뜻을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는 숨기지 않으시고 그 비밀을 알려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일곱 인으로 인봉했다고 했으니 완전 인봉을 말하며 계시의 일곱 내막에 대한 엄중한 은닉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철저히 감추시고,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에게는 그 말씀의 내용을 온전히 계시해주시는 것입니다.
사6: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깨닫고 아덴으로 화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관계 있는 그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지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말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의로운 자격자는 천상 천하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4절에 보면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그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고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울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재산상의 손해 때문에 울거나, 자녀들의 입시 때문에 울며, 질병이나 환난 때문에 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더 중요한 자신과 자녀들의 영적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울어보았습니까? 우리의 신앙 침체와 자녀들의 신앙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호소해보았습니까?
사도 요한은 계시의 말씀에 합당한 자가 나타나지 못함을 보고서 울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일을 알고 싶어하는 열망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말씀의 은혜를 뜨겁게 사모하며 열망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사도 요한은 전 인류의 죄와 자신의 죄를 통감하는 회개의 울음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울음소리야말로 하나님의 보좌에 들리는 귀한 울음입니다. 천사의 부르는 소리도 장대했지만 사도 요한의 울음소리야말로 정말로 귀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의 말씀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없을 알고 울고 있을 때에 ‘장로 중에 하나가 울지 말라고 하면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실 것이라’고하였습니다.
이것은 창49:9-10절 말씀을 염두에 두고 쓴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야곱은 유대 지파에서 메시아가 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하나님의 비밀을 다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자’는 이기는 자의 상징이요, 이기는 것은 메시아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기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 승리하시므로 구속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신인간의 중보자가 되시며,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을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계시하시며, 또한 약속대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시와 구원과 심판을 이행하신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 곧 예수님이 서 계신다고 한 것은 바로 그의 중보성을 말합니다. 메시아는 사망권세를 이기심에 대해서는 사자 같다고 말했고, 속죄의 제물로 죽어야 함에 대해서는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사이에 서 계시는데 죽임을 당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전에 죽으셨던 표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순종하여 속죄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공로는 내세에서도 영원히 남아있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속죄요, 성결이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뿔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고, 그 얻으신 완전 무결한 능력을 말하고, 일곱 눈은 성령님을 말하는데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동행하심을 말합니다.
7-8절에서 어린양 예수님께서 책을 취하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잠깐동안 취급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맡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향기는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의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찬양과 기도에 정성과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책을 취하실 때 그들은 너무 감격스러워 감사의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으며 성도들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9-14절에 보면 ‘새 노래’로 그 은혜를 노래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새로운 체험으로 터져 나오는 새로운 찬송을 말합니다. 여기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땅에서 왕노릇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억천만 인생 가운데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은 그저 얻은 습득물이 아니라 그의 값진 피로 사신 고귀하고 성스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10절에 나오는 ‘나라와 제사장으로 땅에서 왕노릇하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교회로써 우리 성도들이 죄의 종이 아니고, 물질의 종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회복하게 됨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왕 같은 권세를 가지게될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택한 백성들이 구원받게 될 뿐만 아니라 왕권을 가지게 됨을 생각할 때에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을 소리 높여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12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찬송과 감사의 제일 되는 제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도 예수 믿게 되고, 구원받게 된 사실에 대해서 뜨거운 감사가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손양원목사님과 같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할지라도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구원의 축복에 대한 감사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 될 때에 범사에 감사하는 복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 때문에 울고 웃는 저급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뿌리깊은 나무는 주변에 감음이 와도 감음을 타지 안는 것처럼, 성도들은 믿음의 뿌리를 생명수 은혜의 강에 깊이 내렸기 때문에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고 흔들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원망하고 낙심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구원의 은총에 감격을 잃지 말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주를 위해서 살고저 하는 아름다운 헌신이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