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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01-20
지금부터 2000년 전 거라사라고 하는 지방에 어떤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 가정에는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라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이 자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는 많은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녀를 보면서 여러 가지 미래를 마음 속에 그려보게 됩니다. 물론 자녀의 미래를 생각할 때에 최고의 미래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 최악의 미래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자녀에 대한 최고의 기대는 그 자녀의 미래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다른 사람보다 공부를 잘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 가문을 빛내는 사람이 되는 상상은 어떤 부모라도 할 수 있는 상상입니다. 아니면 자녀가 돈을 많이 벌어서 다른 사람에게 부러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미래도 부모라면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의 미래에 대해서 최악의 상상도 할 수 있습니다. 내 자녀가 혹시 공부를 못해서 취직도 못하고 고생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상상도 부모라면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녀가 혹시 살아가면서 사업에 실패를 하고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상상도 부모라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현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라사 지방에 살았던 한 가정에서 부모는 자기 자녀가 귀신이 들려서 폐인이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과 관심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부모가 대신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더 절망감에 빠져 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 부모로써 힘이 든 것은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하면 찾아 갈 곳이 있는데 이 일은 찾아 갈 곳도 없기 때문에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할 때에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첫째 장래가 창창한 청년에게 어떤 불행이 찾아왔을 때입니다. 장래가 시작되는 젊은이에게 일어난 불행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다음으로 해결의 방법이 없는 일을 만날 때에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큰 불행도 해결의 길이 보이면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일에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운 현실은 하나의 불행이 계속해서 불행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거라사 지방의 한 사람은 더러운 귀신이 들린 것은 하나의 불행이 아니라 계속해서 가족에게나 이웃에게 불행을 만들어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영의 붙잡힌 사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점점 사람의 인격과 영혼을 파괴해 가기 때문에 참고 견딘다고 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영적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설명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도 있고 직장에서도 동료가 있고 군대에서 인간관계는 전우라는 이름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지 못하는 관계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관계입니다. 영적인 관계는 실제로 모든 관계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혈육적인 인간관계도 있지만 영적인 관계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도 영적 관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는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관계를 영적으로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해답이 항상 영적인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영적인 관계를 보여 주면서 먼저 악한 영이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악한 영은 더럽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더럽다는 말은 청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더럽다는 말은 그 육체가 더럽다는 의미도 되지만 영혼이 더럽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더럽다는 말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사람 마음을 더럽게 만듭니다. 그 생각을 더럽게 만들고 그 삶을 더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라사 인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이 타인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부끄러운 말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 마음에 악한 영이 인격을 지배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악한 영은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오늘 말씀에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했습니다 집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이웃도 없이 무덤 사이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악한 영에 지배받는 사람의 가장 뚜렸한 특징은 단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모든 교제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친구도 없고 이웃도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영적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상황을 볼 때 그 배후에 악한 영이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영적인 교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악한 영이 역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들이 문제가 생길 때 내가 악한 영의 시험에 빠진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악한 영이 관계를 단절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모든 관계가 다 깨어집니다. 성경에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니 그 아내와의 관계도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관계가 잘못되니 그는 자식에게도 쫓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악한 영은 사람을 거칠게 만듭니다. 폭력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오늘 말씀에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 할 힘이 없는지라” 했습니다. 그리고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고 했습니다. 악한 영은 그 인격을 폭력적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인격을 폭력적으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요한 복음 8장에서는 예수님이 유대인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했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지배하면 폭력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가게 됩니다. 그래서 남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되고 자신에게도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 품성에서 폭력이 있다면 그 순간 악한 영의 음성을 따라 가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사울 임금도 그 마음에 악신이 들어갈 때 그는 폭력적인 인생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력은 주님의 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가 폭력적이 되어 가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현상입니다.
그 다음으로 악한 영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영적 세계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을 향해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했습니다. 악한 영은 항상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먼저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두려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두려움이 많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악한 영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악한 영은 예수님의 권세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에게서 더 이상 주인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군대 귀신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군대는 원어로 레기온이라는 말로 군대로 말하면 3천명에서 6천명 정도 되는 군대를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악한 영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예수님의 말씀에는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단이 결코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경에 보면 악한 영을 대적할 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들을 굴복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음으로 악한 영의 지배를 받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를 받고 난 이후에 한 인생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거라사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말세가 되면 악한 영의 역사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더 적극적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영적 배경이 바꾸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이 영적 배경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적 세력은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악한 영이 두려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첫째 영적 배경이 달라지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거라사 사람들은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영이 떠나간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변화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있고 싶은 삶, 주님의 몸된 교회가 함께 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무엇과 함께 하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왕궁의 천 날 보다도 주의 전에서 하루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주어지면 상대적인 가치는 의미가 적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이 폐하리라 고 했습니다.
둘째 그 삶이 순종적이 됩니다.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쇠고랑과 쇠사슬에 매어 두어도 저를 제어할 수 없었다는 말씀과 대조가 되는 모습입니다.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라고 했는데 여기 온전하다는 말은 “숍호르네오”라는 단어로 자제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전해 지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사람의 마음에 오시면 그 사람은 자신을 다스리게 됩니다. 자기 마음을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해져 가는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분이 가득찰 때 기도하면 무엇보다도 자신을 자제할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자신이 자제하지 못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 고 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했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나면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사람 가운데 거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수가성의 여인도, 안드레도, 빌립도, 그리스도를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증거했던 것입니다.
출처/조병우 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