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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4:2
우리의 성경공부는 다니엘 4장입니다. 4장은 두번에 걸쳐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만 오늘은 먼저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찬양하기까지의 그 배경과 과정을 살펴 보고 다음 시간에 느부갓네살이 꿈으로 본 큰 나무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살펴 볼 것입니다. 다니엘을 공부하시는 분들께서는 척스미스 목사님의 싸이트나 또 다른 갈보리채플의 목사님들의 설교를 살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은사를 갖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분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를 4장이나 할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방인의 왕으로 정말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스니다. 그는 신바벨론국을 일으킨 세기적인 통치자로서 부귀와 영화를 한손에 쥐고 있던 우상 숭배자로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우리는 느부갓네살왕의 체험적 신앙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은혜가 이방에 미치는 하나님의 섭리와 믿음의 과정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4장은 다니엘의 생각과 본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따르지 않다가 예고된 말씀처럼 7년동안 짐승의 마음을 받은 느부갓네살 왕이 회복된 이후 그의 체험적 신앙고백을 다니엘이 대서한 것으로 왕의 조서로 백성들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그러니 왕권의 위엄이 하늘과 같은 이 시절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느부갓네살 왕은 1절에서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에게 조서하노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글은 마치 전도자의 말과도 같습니다. 베드로는 아시아 일대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벧전1:2) 기록하였고. 또 예수님의 동생 유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기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유1:2)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를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권면으로 자기 인생의 결말을 추상하며 사용하는 인사말입니다.
먼저 느부갓네살 왕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하였습니다. 이 선언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체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으로 인간은 그 어떤 지식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터득한 지식이 자신의 삶에 체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은 어떤 사실들을 축척해 놓은 것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총명의 토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 왕의 신앙고백은 세계를 제패한 황제로서 자신의 인생 전체를 통하여 도달한 진리의 고백인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을 찬양하여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3절) 선언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포고문이며 거룩한 신앙고백입니까? 이 고백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권병'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성과 통치 권세와 위세를 말한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군주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과 그의 권속들의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오늘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선포한 뒤 2년 후 하나님께 돌아 갔습니다.
우리는 왜 느부갓네살 왕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를 좀더 리얼하게 음미하기 위하여 느브갓네살 왕에 대하여 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신바벨론 제국의 역사 70년 중 45년 동안 통치한 왕이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신바벨론의 역사는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아이러니 하게도 신바벨론 왕국의 멸망은 곧 예루살렘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과 이방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복음이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그 언약의 은혜가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이방 가운데 역사하여 이방의 통치 세력인 신상(神像)이 무너질 때까지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로마서 11장에 기록하였습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곧 느부갓네살 왕이 본 神像입니다. 우리를 통치하는 세상의 신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곧 다니엘이 본 바 금신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신상의 통치 속에 살고 있으며 지금은 열발가락 사이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머지 않아 우리는 다니엘의 말한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이 이 신상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요 이미 뜨인 돌은 믿는자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통치 섭리를 70년이라고 선언하였고 다니엘은 9장에서 그 비밀을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는 지금 69와 70의 수치 사이에 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설 그 시점에 매우 가까이 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한 교만한 이 세상의 신이며 그의 은혜에 설복당한 당신과 나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느부갓네살'이란 '느보신이 국가를 지켜주심'이란 의미로서 그는 태어남으로부터 신적존재를 의식하고 신뢰하고 자랐습니다. 그는 선왕들의 강력한 중앙집권제의 통치 위력을 힘입어 엘람족이 이끈 바벨론을 멸하고 앗수르 일대의 나라들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는 본래 갈대아 왕조의 창건자인 나보폴라살의 장남으로 왕이 되기 전 선왕 '느부갓네살' 1세와 함께 많은 전쟁에 참여하여 전승하였고, BC605년 갈그미스 전쟁에서 애굽을 제압하여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통치권을 탈취하였으며, BC567년에 두로성과 유다왕국을 멸망시키므로 세기의 군주로서 주도권을 확립하였습니다(열하24:10-17). 우리는 바벨론의 역사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가 하루 아침에 설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민족이 어찌 하루 아침에 서겠느냐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적인 존재를 의식하며 자라 온 군주로서 위대한 영광의 역사 다윗의 왕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종교적 중심지인 하나님의 도성을 멸망시켜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BC588년에 난공불락의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2년 동안의 끊질긴 전투를 통해 예루살렘을 완전히 함락 시키고 시드기야 왕을 위시한 국가의 유명한 자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또한 그는 군사적, 정치적 수완을 가춘 지략과 위엄을 가춘자로서 왕권의 위엄을 가추기 위하여 거대한 왕궁을 세웠으며, 자신을 승리 이끌어 준 '마르둑' 신에게 신전을 봉헌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사랑하는 왕비를 위하여 세기의 불가사이 중의 하나인 '공중정원'을 건설하는 애정을 가진 왕이기도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도전과 신념의 왕으로서 힘과 지략으로 모름지기 신바벨론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위대한 제국 바벨론 왕가와 다윗의 왕국 그리고 최고 문명의 애굽왕가들의 몰락을 목격하면서 영원불멸의 신바벨론 제국의 건설을 꿈 꾸어왔습니다 .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도전 정신에 대해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장래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2장29)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도전은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자기 스스로 영원불멸의 신적존재가 되고자 금신상을 세웠습니다. 다니엘이 "금머리는 왕이니이다"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까지는 군주로서 무단한 노력과 준비를 해왔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찬란한 왕국을 이끌어 나갈 왕의 모사들을 발굴하고, 국가적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갈대아 문명을 일으킨 최고의 학자들과 술사들을 왕의 고문으로 궁중에 두었으며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 다윗왕국을 이룩한 유다지파의 영재들 즉,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이 신의 능력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을 국가 요직에 등용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처음 꾼 꿈을 자기에게 보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여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페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단2:21) 라고 칭송하였습니다.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왕들을 세우시는 기준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잘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 왕이 45년 동안 부귀와 권세를 누리며 열방의 통치자로 태평천하를 이루었던 것도 왕으로서 앞날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최고 통치자는 어떠할까요? 아니 국가 통치 씨스템을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새정부가 들어 설 때마다 얼마나 더 실망을 하여야 할까요? 이승만 정권은 자주독립 이념과 싸우다가 독재자가 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과도적 경제기반을 구축하려다가 독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받은 전두환 정권이나 노태우 정권은 망나니 정권에 불과하였고 그 뒤를 이은 김영삼 정권은 성숙한 자유의 지식을 가추지 못하여 주체성을 상실 하였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어떻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경영이 마치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성취하는 학술장인 것처럼 달려 나가다가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오랜 정치 경력 속에서 나름대로 정치철학과 국가관을 터득한 분으로 많은 지식을 수렴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애통하게 국가통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터득치 못하여 오직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고집에 이끌려 통치의 균형을 잃고 역사의 판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IMF라는 국가 부도 현실 앞에 집권한 김대중 정권은 나름대로 경륜을 가춘 지도자로서 슬기롭게 국가적 재난을 풀어 왔습니다. 한때 그는 세계의 흐름을 간파하여 국가적 지적 정보능력을 확충하기 위한 정책들을 수립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한부 정치 5년이라는 제도적 시스템에 몰려, 자신의 정치신념 조국통일의 과제에 급급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경륜있는 지도자로서 기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조급히 남북관계를 주도하여, 북한의 씨스템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습니다.
각 정권들은 토대없는 경제회복을 조장하기 위해 과도한 부동산 투기 정책과 금융정책을 부추겼으며 심지어 폐광을 카지노로 만들어 국민의 사행성을 조장하고 도덕성을 상실시켰습니다. 그 결과 자기 자식들까지 돈의 노예들이 되어버렸고, 도덕성과 인륜이 망그러진 패역한 정치 풍토는 국가 통치의 기본인 법을 다루는 사람들 마저 동성애자들의 성까지 그들의 요구대로 합법화하는 영적 범죄를 지었습니다.
오늘날 그들의 정권은 어떻습니까? 너무 충동적이고 감각적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국가경영을 위한 10년 대계는 고사하고 5년의 임기동안이라도 예비할 지식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까? 마치 술취한 선장처럼 작은 파도에도 휘말리고 있지 않습니까? 직감적이고 편협적인 정책으로 국가 장래를 걸머지고 갈 교육정책이 좌충우돌하고 있고, 기업을 할 수 없는 나라로 전락되고 있지 않습니까? 언론들은 서로 다투어 국가원수의 비리만을 들추어 내어 지도자 불신체제를 조장하고 있으며, 사회단체들은 명분에 휘말려 이념다툼에 앞장서고 있고, 메스콤은 무분별한 자유주의에 표류되어 심지어 동성애자들까지 안방에까지 들어와 우상화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오늘의 이러한 모든 문제가 노무현 정권에서 돌발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국가의 토대의 근본을 어디에 두었는냐는 것입니다. 어느 정권이던 또 이느 대통령이 크리스챤이였던 간에 국가의 근본을 신적토대 위에 세워본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즉위 후 한번이라도 위대하신 하나님의 성호를 입에 올려 본 일이 있습니까? 그들은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망각하고 씨스템으로 정권을 창출하고 씨스템에 의한 정책들을 추진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미국을 위시한 유럽 국가들을 보십시요. 유구한 역사 속에 역전의 투구를 해오면서도 얼마나 성숙한 국가경영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성숙한 국가 경영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겠습니까? 그들의 국가부흥의 역사를 추론하건데 그들의 정책이 하나님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역사 속에 하나님을 배반한 나라와 왕들은 모두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진실입니다.
혹시 일본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일본의 국가부흥의 시대를 돌아 보건데 그들의 군주는 명치유신과 함께 하나님의 신적권위를 인정하고 그 지식을 받아드렸고 그 결과 기독교는 일본 현대문명의 근간이 되어 100년 동안 일본은 동양의 떠오르는 별이 되었습니다. 물론 천황을 신으로 세우는 반역의 역사로 그들 또한 금신상의 씨스템이 되고 말았지만 이제 이후로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르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일에 느니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일어났으며 또 말일에 남방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올라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상의 천국 일본에서 아직 성경이 베스트 셀러인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사실 말입니다만 우리나라가 지금 서울을 옮기는 것을 말할 때입니까? 이 문제는 조국통일 후에나 남북이 하나가 된 후에 결정해도 될 문제가 아닙니까? 강남의 땅값도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제 충청도까지 부동산 투기 바다를 만들어 놓았으니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모두 이민을 떠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사설이 길었습니다만 느부갓네살 왕의 국가경영의 근본적인 틀은 단적으로 말하여 그는 신적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더우기 지도자로 세움을 받는 자가 신적인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민족 지도자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현실 세계 속에서 역사하는 신적인 존재를 인정한 군주가 누가 있었습니까? 나는 이것을 통탄할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목사들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것은 말도 않됩니다.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정치를 하게 하셨겠습니까?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담배 자판기 처럼 나열된 교회들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적 권위 위에 세워진 교회들이 현실 속에 역사하는 신적 존재들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교회들은 지금 유대교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당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소돔성에 나타난 천사들이나 풀무불에 나타난 사자나 옥에 갇힌 베드로를 풀어 준 천사들의 이야기는 성경책에 기록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존재들과 함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셨다"(히1:14)기록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이신 은밀한 일을 해석한 다니엘에게 절하며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신의 신이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2:47) 찬양했습니다. 그는 잠시 자기 교만에 빠져 " 내 손에서 건저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고 말하였지만 풀무불 속에서 자신을 믿는 자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3:28)라고 찬송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보는 4장에서 그는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여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며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낮추심이니라"(37절)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이 고백은 2장이나 3장의 고백과는 전혀 다른 입장입니다.
2장과 3장에서는 그가 눈으로 본 하나님의 이적과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만 오늘 4장에서의 그의 고백은 다른 사람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 친히 나타나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느부갓네살 왕은 오랜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서에서 너로 인하여 이방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유다의 자손을 지키신 풀무불 속에서 소돔성에서 고통받는 의인 롯을 구하로 오신 주님을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위대하신 창조자의 가사와 능력을 보고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던 느부갓네살 왕을 통하여 당신의 불순종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느부갓네살왕의 조서는 이글을 읽는 당신의 고집과 교만을 꺾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이제 더이상 왕노릇 그만하십시요, 우리의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을 더 알기를 힘쓰십시요, 그분을 온전히 알기 전까지 당신의 경영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삶 속에서 살아있는 생명으로 드려지는 찬양을 받기를 기다리십니다.
출처/갈보리 채플 서울교회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