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6:1-7

여성으로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 가슴 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과 동식물을 지으실 때, 저녁 무렵이 되어서 깊은 생각에 잠기신 후에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진홍 가슴 새라고 붙여 주었습니다.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잇는데 어찌하여 진홍 가슴 새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참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진홍 가슴 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매 달렸는데 멀리서 보던 진홍 가슴 새가 그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는지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은 뒤로하고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로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그 사람의 이마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는데 그 가시마다에서 검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새는 그 가엾은 사람의 이마로 날아가서 조그만 부리로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 하나 뽑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 나와 이 작은 새는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그 가시들을 뽑다가 안타깝게 돌아오고 맙니다. 그 사람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묻은 피가 도무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 핏자국이 남게 되었고,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새가 낳는 새끼들마다 다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진홍 가슴 새 이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예수 님은 왜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최대 관심인 영원히 멸망당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건강 문제나 경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독생자 예수 님을 십자가를 지시게 하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 님께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오직 피 흘림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죄 문제 때문이고,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의 영혼과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 님의 십자가 지시는 고통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밖, 믿지 않고 영원한 멸망으로 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렇고, 또 하나는 먼저 구원받았다고 하는 교회 안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답답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습니다. 특히 그 고통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 올수록 더욱 심해지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한편, 참으로 감격스러운 것은 지금 이 나라 곳곳에서는 마치 진홍 가슴 새처럼 주님의 이 고통을 이해하고 동참하고자 결단한,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의 교회들과 성도들이 일어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의 인생 목적은 알고 보면 다 꼭 같습니다. 그것은 지옥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천국으로 구원해 내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천국 생활을 맛보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 교회가 막 부흥하던 때의 일이 기록입니다. 그런데 부흥과 동시에 문제도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어지면 분재가 많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럴지라도 교회는 계속해서 부흥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흥과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헌신적인 일꾼이 절대 필요합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집사들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대접받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는 그런 교인이 솔직하게 요청됩니다. 희생하며 봉사하는 분이 필요합니다. 이름만 가지고 자존심이나 충족시킬 일꾼은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일을 어렵게만 할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준을 정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는 중요한 일꾼들을 뽑기 위해 기도하면서 준비해 왔습니다. 바라기는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하나님 뜻에 합당한 일꾼들을 뽑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인 인연이나 혈연 등에 얽매이지 말고 냉철하게 판단하여 정말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훌륭한 일꾼들을 뽑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뽑을 일꾼들은 어떤 일꾼들을 뽑아야 합니까?

⑴,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도대체 성령 충만! 성령 충만! 하는데,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살아 계신 체험이 날마다 순간마다 생생한 성도를 말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막연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기도 생활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뜨거운 기도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실 지라도 결코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치 못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이 왜 그렇게 필요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 제대로 하고, 성도다운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즉 분노와 욕심과 죄를 이길 힘,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여 결국 그를 구원할 수 있는 힘, 사탄의 불화살 공격과 온갖 시험과 난관을 이길 힘,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기도와 믿음으로 환경과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힘, 복음의 문이 꽉 닫힌 어느 사람이나 지역이라도 뚫고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능력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됩니까? 안됩니다. 오직 생생한 하나님의 체험과 확신 곧 성령 충만 에서만 가능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기도 생활에 힘쓰면 우리는 누구나 성령 충만을 받게 되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신앙생활 하는 데  뜨거운 열정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체험하게  됩니다.

*영국의 어느 극단에 배우가 되기를 갈망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배우가 되는 길은 참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배역을 맡기란 불가능하고 겨우 단역을 하나 맡는 것도 오랜 세월 동안 청소나 잔심부름을 한 뒤에 겨우 발탁되는 것입니다. 이 소년도 연극 배우가 될 꿈을 가지고 시작은 했으나 하는 일은 몇 년 동안 심부름과 청소 잡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무대 뒤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이 소년에게 조연출 자가 와서는 단역 배우 한사람이 사정상 빠지게 되었으니 대역을 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그 역은 임금이 궁중에서 만찬을 베풀고 있는 때에 병사 하나가 뛰어들어와서 전쟁의 급보를 전하는 한 장면뿐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자신에게 주어진 참으로 보잘것없는 이 역을 두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이미 여러 번 보았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동료에게 무대에 올라 갈 시간이 임박하면 연락해 달라고 말한 뒤에 복장을 갖추고 무대 뒤뜰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계속 뛰기 시작했습니다. 땀이 흘러 얼굴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신발이 먼지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숨은 턱에까지 차 올라 금방 쓰러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신호가 왔습니다. 무대에 올라 갈 시간이 된 것입니다. 드디어 이 소년이 무대에 등장했을 때 모든 관객은 정말 먼 전쟁터에서 며칠 밤낮을 달려온 한 병사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영국의 연극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놓았고 후에 작위까지 받은 유명한 연극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 입니다. 열정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자세가 아니고서 우리가 어떻게 악한 사탄과 싸워 나갈 수 있겠습니까?

⑵,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교회 일을 하다 보면 동기는 좋았으나 결과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주님을 위해서 했고, 교회를 위하여 했는데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혜가 없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지혜가 모자란 것은 모르고 엉뚱하게 다른 사람과 교회를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교회 생활을 하는 성도에게는 지혜가 없이 열심만 있어도 문제입니다. 지혜가 모자라면 사탄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되고 자연히 시험 거리만 만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지혜는 어떻게 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게 됩니다.

*구약에 보면 삼손이라는 사사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나귀의 턱뼈 하나로도 블레셋 사람 일 천명을 쳐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웅이었지만 얼마나 문제를 많이 일으켰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자신이 나실 인임을 명심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 많은 능력을 가지고도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몸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으므로 지금까지 저 중동에는 이스라엘과 아랍 족속 사이에 분쟁이 그치지 않고, 세계 전쟁의 불씨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한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세상 적으로는 유능하고 똑똑한데 신앙생활 하는 것과 교회 일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면서 거기서 지혜를 얻는 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신앙생활도 인간 상식 수준에서 하려고 하고, 교회 일도 세상일이나 사업이나 세상 단체에서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탄이 호락호락 넘어가겠습니까? 사탄은 가만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고도 시험에 빠지고, 세상일에는 똑똑하면서도 신앙의 문제는 바보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어떻게 쓰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탄과 지혜의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고도의 싸움입니다. 우리 지혜 가지고는 도저히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지혜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가 왜 필요한 지 아시겠습니까? 잠언 1:7에 "모든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 무장해야 합니다.

⑶,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하는 일은 결국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생활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삶을 통하여 말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정말 당신에게는 신앙 인의 생활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까? 평소의 생활이 중요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 중에 썩은 사과만 골라 사는 아주머니 이야기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느 사과 행상이 있었는데 참 인상적인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더랍니다. 이 아주머니는 사과를 살 때면 꼭 이 분에게 찾아와서 흠나고 상한 사과만 찾아서, 덤도 받지 않고 사가는 분입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나 하고 의아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 아주머니 따라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우는 골치 아프고 궂은 일 많은 통반장을 자청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웃집을 드나들면서 어려운 사정을 파악해서 얼마나 지혜롭게 돕는지 그 주위 이웃들이 이 분에게 홀딱 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왜 이와 같이 하였을까요? 선거에 나가기 위해서 였을 까요? 아닙니다. 전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활로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필요합니다. 아주 사소한 생활 모습에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눅16:10에서 예수 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 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승리로 충만한 성도와 무기력하고 패배 당하는 성도의 차이는 큰 것이 아니라 조그만 일에서 결판이 납니다. 조그만 일, 사소한 문제에서 이기지 못하면 결코 큰 일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 사람들은 우리가 화가 날 만한 일에 부딪혔을 때,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이해 문제가 걸린 문제를 만날 때, 우리를 주목해 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작은 것은 무시하게 합니다. 큰 일에만 전념하게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출저/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