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9:23

인생살이는 치열한 생존 경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 경쟁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이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어떤 경쟁에서든지 다른 사람에게 졌을 경우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사시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과의 싸움에서 이기기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또 하나의 자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남을 이기고자 하는 경쟁보다 먼저 자기를 이기는 생활 즉 극기의 생활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주님께서는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는데 자기 부인은 곧 자아를 이기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곧 자기를 이기는 생활이 필수 조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어떤 점을 이겨야 하겠습니까?

⑴,욕심을 이겨야 합니다.
육체의 욕심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합니까? 갈5:19-21절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육신의 욕심이 어떤 것임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육신의 소욕은 조절하지 못하면 인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먹고 싶다고 해서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으면 나중에는 소화불량에 걸리고 위장병이 생기는 것처럼 모든 육신의 욕심을 조절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정욕의 노예가 되고, 갖고 싶다고 해서 절제하지 못하고 다 갖게 되면 나중에는 오만 불손해져서 후에는 인격적으로 파산을 당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롬7:16-19절에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는 이 육체의 정욕이 중생 한자에게 있어서는 성령과 대립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육체는 성령이 거하는 전이요 인격의 도구여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 육신 생활이 정욕이 거점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정욕을 극복하여야 하며, 혈기의 무기가 되지 않도록 언제나 육체의 횡포를 제어해야 합니다.

⑵,마음을 이겨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천태만상입니다. 교만한 마음, 비굴한 마음, 시기하는 마음, 허영을 쫓는 마음, 괜히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 간사함, 이중 적인 마음,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들은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본연의 마음이 아닙니다. 모두다 변질된 마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그러한 마음씨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겸손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 평화한 마음, 남을 축복하는 마음, 아끼고 존경하는 마음, 온유하고 양순하며 단정하고 강직한 마음들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간 본연의 마음들입니다. 약 3:17절에 보면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먼저 내 안에서 작용하는 불량한 마음들을 축출하는 싸움에서 이겨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불량한 마음들을 축출할까요?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다만 성령 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롬8: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는 연약해서 육의 행실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서 그런 간절한 생각이 있으면 롬8:26절의 말씀과 같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악한 생각을 없이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도와주십니다.

⑶,혀를 이겨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세 가지 수단이 있습니다. 이는 말과 글과 동작입니다. 그런데 이중 대부분의 의사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수없이 말을 많이 하고 삽니다. 말과 같이 쉬우면서도 또한 말과 같이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약3:2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하면서 성도들은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성도들은 마땅히 남을 비방하는 말이나, 무려한 말, 더러운 말을 버리고 진실한 말, 뜻 있는 말, 무게가 있는 말, 유익하고 단정한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를 이기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해서는 안됩니다. 말로서 그 사람의 인격을 측정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남의 인격을 무너뜨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⑷,눈을 이겨야 합니다.
눈은 우리 몸의 창문과 같습니다. 창을 통해서 햇빛이 들어오고 공기가 들어오듯이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보고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눈은 본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대로 갖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대개가 사치스러움이란 눈이 짓는 죄입니다. 외식하는 죄는 눈이 범하는 죄입니다. 눅11:33-36절에 보면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막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빛으로 남을 관찰하고 사물을 통찰하면 아름다운 행위와 덕이 나타납니다. 남의 단점을 보는 눈이 아니고 장점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남의 잘못된 과거를 보는 눈이 아니고 남의 유망 성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관찰력과 시각이 흐리고 어둡고 초점이 틀려 있으면 모든 행동은 우매해지고 맙니다. 그런고로 안목의 정욕과 잘못된 관찰력의 충동에서 자기를 이겨야 합니다.  

⑸,귀를 이겨야 합니다.
누구나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지적을 받고 꾸중을 들으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충고를 들으면 더욱더 기분이 상하는 것이 보통의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 지혜와 덕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이간시키는 말, 남을 헐뜯는 말, 남을 유혹하는 말, 무익한 말들은 아예 듣지를 말아야 합니다. 딤후4:3-4절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허다한 이야기를 즐겨 듣던 귀를 이제는 돌이켜 불우한 사람들의 한숨 소리와 고통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봅시다. 좋은 일을 즐겨 하자는 말을 즐겨 들을 수 있는 귀를 갖도록 합시다. 잘못된 말에 귀를 기우리다 보면 큰 낭패를 당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 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언제나 경건하고 예민한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귀를 달고서는 참된 자아 일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분별력이 있는 청각을 가지고 있어야 늘 자기를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육욕과 사악한 마음씨와 부덕한 언어와 잘못된 관찰력과 불실한 청각에서 자기를 이기고 나면 세상 만사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같은 대 사도도 자기 안에는 싸우는 두 세력이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중국 명나라의 유학자요 정치가였던 王陽明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山內의 도적은 피할 수 있으나 心中이 도적은 피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과 은사를 받아 내 안에서 항상 요동하고 작동하는 각종 죄와 육의 세력을 극복하면서 자기를 이기는 생활을 통해 주님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출저/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