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9:9-10, 빌2:5-11, 막11:1-11)

1.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그리스도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 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 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막10:33-34)

  예수께서 이러한 예측을 하신 배경에는 예수님 자신의 활동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일이나,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을 모독한 죄(막2:7)에 해당되고, 거짓을 예언하고(막14:65),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막2:23-28, 3:1-6) 모두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정죄하는 유대인들의 여론을 들어서 알고 계셨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성전을 청결케 하신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상하시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2.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그리스도

  예루살렘에는 중요한 절기마다 모여드는 유대인 순례자들의 소요에 대처하기 위하여 강화된 로마군 수비대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유월절에는 로마 군인들은 총독의 인솔 하에 행렬을 이루어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들은 황제의 권력을 나타내는 온갖 장식들을 갖추고 위용을 과시하는 퍼레이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거리는 로마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의 분위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연출하심으로 자신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슥9:9-10) 예수께서는 당신의 세계를 무력으로 지배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려는 로마의 평화정책(PAX Romana)으로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로마 기마병들의 행차와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행차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평화는 무력으로 만드는 평화가 아니라 겸허한 태도와 희생적인 사랑으로 만드는 평화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3. 평화의 왕을 환영하는 사람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순례자들이 약 20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숫자는 예루살렘 주민 보다 순례자들의 수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추산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들은 대부분 감람산 쪽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순례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무리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이 예루살렘의 지도층과 그 가족들에게와 기득권층에게 충격을 주어서 예수를 나무에 달아서 처형할 죄인이라는 명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모여드는 순례자들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순수한 믿음으로 환영한 사람들은 구원받을 만한 복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4. 우리는 어떻게 영접해야만 하겠습니까?

  ① 제자들처럼 단순하게 순종함으로 영접합시다. 제자들이 나귀주인을 찾아가서 주의 말씀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전함으로 그 주인이 즉시 나귀를 보내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메시야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막11:1-6)

  ② 순례자들처럼 예언자의 말씀을 따라 열렬히 환호하며 나귀타신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갑시다. 예언자들의 말씀을 순수하게 믿으면 메시야가 눈에 보이게 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③ 순례자들과 시민들처럼 정성을 다해서 뜨거운 사랑으로 메시야를 영접합시다. 평화의 왕 그리스도께서 안장도 없는 나귀를 타시고 거친 길을 따라서 당신의 도성으로 입성하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했습니다. 먼 길을 걸어서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순례자들도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도성으로 들어오시는 평화의 왕을 모시기 위해서 겉옷을 벗어 안장과 카페트를 대신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호산나” 노래하면서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의 순박한 사랑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막11:7-10)

  결론. 평화를 만들기 위해 힘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화해와 용서와 양보와 겸손과 희생이 따라야만 가능합니다.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그 몸을 낮추시어 평화를 만드는 왕이 되셨습니다.


출처/손인웅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