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6:1-6

사람의 모든 행동의 기초가 되는 것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이 세 가지가 가장 중하다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에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로 생각하고, 세 가지로 말하고 세 가지로 행동합니다. 사람에게 이 세가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될 수 없고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히 11장에서는 이 세 가지 중에 믿음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근본 되는 자세는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을 전적으로 무엇이던지 신뢰하고 사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몇 가지 강조되는 점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안 계신다고 믿는 것은 기가 막힐 일입니다.

②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요세 비가 오지 아니하니 우리 민족의 미개 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50년 전에나 했던 기우제를 지내고,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고, 절에서는 특별 기우제 염불을 하고, 돈을 가두어 물을 만들자고 하고, 바케스로 물을 퍼서 논에 뿌리고, 헬리콥터를 동원하고------ 정말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아니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 살아 보겠다고 하니 어처구니없는 미개인들이구나 싶습니다.
성경에는 비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창 7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가 그렇고,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 소산의 곡식으로 살찌고 풍성케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너의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밭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육지 창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사 30:23-24]”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쥐었을 때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 3:3]”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말하기를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렘 5:24]”라고도 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란 “하나님께서 목소리를 발하신 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 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사람마다 우준 하고 무식 하도다 금장 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 10:13-14]”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예레미아는 가뭄이 들었을 때 말하기를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여 땅에 앉아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 도다[렘 14:2-4]”라고 하셨습니다.
“열방의 허무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가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렘 14:22]”
오늘 우리들이 할 일은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 옵소서[왕상 8:35-36]”과 같이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이 있으시고 우리들이 이와 같이 심한 고생을 하고 있어도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엉뚱한 짓을 하고 있으니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중요하고 믿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어리석게 하는 것인가를 잘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졌다고 해도 다음과 같은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즉 거짓과 위선 외식은 참 믿음을 가로막는 위선이요 착각이요 형식뿐인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의 결단이지만,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믿음을 증거할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일 뿐이라고 야고보서는 말씀했습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을 의식 주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증거로 언제나 재단을 쌓았고 즉시 순종했으며 바치는 생활을 잘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을 하게 되는데 본문에 세 가지 특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⑴ 은밀한 의를 행하게 됩니다.
선을 행하는 일에도 그렇게 하고, 남을 구제할 때도 그렇게 합니다. 기도를 할 때도 은밀히 하고 심지어 금식할 때도 그렇게 합니다.  의를 행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에게, 기도와 금식도 하나님에게, 구제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인데 모두 은밀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시 사람들이 수재민과, 한제 민 돕기 위해 테레비에 나와 한마디씩 하는 그런 것을 하나님은 상 주시는 것으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베풀면서 잠깐 테레비에 나오는 것으로 이미 상을 다 받아 갔습니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웃기는 짓들을 하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명절 때가 되면 그 사람들은 달고 다니기에도 무거운 훈장들을 가슴 가득히 달고 다닙니다. 그런데 요세 사람들은 그런 낯내기 식 사랑을 많이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상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국 정부는 국가적으로 큰공을 남긴 고든(Gorden, C.G.)을 치하하려 했습니다.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를 세우려 했지만 그는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작위를 수여하고 포상 금을 지급하겠다는 데도 거절을 했습니다.  그는 중국으로 아프리카로 33회나 전진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영국 정부는 그를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조그마한 금메달을 하나 만들어 그에게 주었습니다.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 유품을 정리하는데 당연히 간직해야 할 금메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메달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중에 금메달의 행방을 안 사람들의 마음은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영국의 맨체스터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장군은 그 금메달을 녹여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습니다. 장군의 일기장에는 그 사실을 이렇게 간단히 기록을 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선물을 그리스도에게 바쳤다' 이런 행복을 나만이 가지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많이 가지고 싶어하고 많이 먹고 싶어하는 소유욕이 있고, 두 번째는 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욕망이 이에 속합니다. 세 번째는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욕망이라고 합니다. 인정받으려 하고 칭찬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만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의 무대가 외진 골짜기가 아니라 예루살렘 거리였다면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현대 사람이고, 텔레비전에 방송된 사람이면 그 사람은 갑자기 주체 못할 돈벼락을 받았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더욱 은밀한 중에 아름다운 일을 이룰 줄 알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면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칭찬이나 존경을 선한 일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하다 보니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것일 뿐입니다.
동기나 목적으로 행하는 선은 의미가 없습니다. 때로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도 낙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사람 앞에 은밀한 선이 가장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의 착한 일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망이 진실된 사랑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학술 용어로 ‘주체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면 잘하고 모르면 안한다---- 참으로 타인 의존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사는 부평초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에는 적어도 세 가지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 다른 사람에게, ㈁ 자기 자신에게, ㈂ 하나님에게 비밀스러워야 합니다. 내가 하는 선한 일을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즉 내가 모처럼 선한 일을 했구나 하고 우쭐대지 말아야 한다 이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도 ‘무익한 종이 할 일을 했습니다.’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는 마음이요 말이 되어야 합니다.  

⑵ 아버지께서 보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본다’는 말은 헬라어로 번역하면 ‘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말의 ‘본다’는 개념도 ‘안다’는 개념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보신다’‘아신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큰 용기와 힘을 줍니다.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든 그런 것에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나쁜 짓을 안하는 것입니다.
욥기 23:10절에 욥은 큰 고난 중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모든 사람이 욥을 비난하고 욕하고 정죄할 때 이 믿음 하나 가지고 모든 고난을 극복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정금같이 되어 세상을 빛내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죽음을 지켜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십니다. 막 12:41과 눅 21:1이하에서 부자와 과부가 연보를 드리는 장면을 보신 주님은 그들이 드린 연보가 어떤 것인지를 너무 잘 아시고 과부의 연보를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보는 것을 보시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더 잘 보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중심을 잘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⑶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받으시고, 보시고, 아시고, 체워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그 상을 잃지 않고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20절에도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하셨습니다. 산행을 하는 것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일입니다.
우리말에도 가난은 하늘밖에 구제 못한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하실 일을 사람이 하는 것이 선행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하나님에게 꾸어 드리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신앙 고백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다(시 37:25). 그 심령에, 그 생활에, 그 자손에, 그 나라에,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여러분 세상에 살다가 하나님에게 가셔서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 물으시면 무엇을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야 하나 마나한 이야기지만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이처럼 심각한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세 사람의 종이 있었는데 주인이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고 먼길을 갔다 돌아와 결산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이 주인에게 받는 것을 가지고 결산을 했습니다. 두 종은 칭찬과 안식을 얻고, 축복을 받았으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저주를 받아 버렸습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고, 적게 맡은 자에게는 적게 요구하시지만, 여하튼 우리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했느냐 라는 물음을 받을 것이고,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몸을 죽이지만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 말고, 영과 몸을 죽이는 하나님을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하나님”을 생각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세상을 삽시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