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몹시 날씨가 흐린 어느 날 아침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두 아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현관에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날씨가 흐리니 우산을 가지고 가야 하느냐, 안 가지고 가도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아이는 "오늘 비가 올 테니까 우산을 가지고 가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또 한 아이는 "오늘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니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면서 서로의 주장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의 다툼이 상당히 길어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 우찌무라는 이렇게 판단을 내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가지고 갔다가 비가 안 오면 좀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안 가져갔다가 비가 오게 되면 그야말로 더 큰 낭패가 아니겠니? 그러니까 너희들은 어떤 것을 택하겠느냐? 불편하지만 안전한 편을 택하겠니, 아니면 편하지만 모험적인 편을 택하겠느냐?"
우리들은 항상 선택과 결단이 필요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주어진 여건 속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선택을 하고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때,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까?" 혹은 "오늘은 어떤 넥타이를 매고 갈까?" 하고 거울 앞에서 망설입니다. 또한 가정주부들이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할까?" 시장에 가서는 같은 생선이라도 갈치를 살까 꽁치를 살까 하고 주저합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고 또 사겠다는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선택을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은 재물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 성의 구별과도 관계없는 오직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pattern)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선택의 자유를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는 포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던 한국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여학생은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와서 약혼자가 남자답지 않아서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여학생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느 식당에 가서 무엇을 먹읍시다 하고 자기를 데리고 갔으면 좋겠는데 어디로 가실까요? 무엇을 드실까요? 무엇을 할까요? 라고 일일이 물어 보는 데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어느 때는 내 마음대로 자유를 만끽하고 싶지만 때때로 가지고 있는 자유를 다 포기해 버리고 오직 한 길만이 내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하기보다는 그냥 따라 갔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선택하여 결정한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대한 일일수록 그 책임은 무거워지고 또 그만큼 선택과 결단은 더욱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최고의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자기 백성에게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 24:15)고 말했으며, 엘리야도 온 백성들에게 "너희는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다."(왕상 18:21이하)고 외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머뭇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세월이 가고 늙어지고 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를 자기 구주로 고백하는 일은 자기 중심적이었던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바뀌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결단은 단회적이며 동시에 계속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제 2의 결단이 나옵니다. 제1단계의 결단은 예수님을 믿기로 하며 예수님께 우리의 삶의 목표를 두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예수님께 두었을 때 기독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목적은 예수님인데 살아가는 방법이나 믿는 방법은 자기 방식 대로인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항상 마음속으로 '나는 내 아내를 깊이 사랑하며 또 변함없이 사랑할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은 전혀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자기 방식대로 자기 나름의 습관대로 사랑하고 행동할 때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의심하게 되며 더 심한 경우는 전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신자였던 사람은 불교식으로, 무속 종교를 믿던 사람들은 그들대로 또 다른 방식으로 믿게 된 데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신앙 문제에 있어서 제 2의 결단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었지만 전도 여행을 하는 도중에 때때로 그의 옛 모습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본문에서와 같이 제2 의 결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타난 대로 바울은 아테네로 전도 여행을 갑니다. 그는 당시 이름난 율법 교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또 헬라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헬라 철학의 본산지인 아테네를 항상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철학도가 아닌 그리스도 복음의 전도자로서 아테네를 방문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테네에 들어서자 그는 많은 우상들이 있는 것에 격분합니다. 그래서 그는 광장으로 매일 나가서 거기 모인 철학자들과 옛날 자신의 철학 지식으로 대결을 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보기에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예배하는 대상 중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을 보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알지 못하는 신(Unknown god)을 이제 알게 해주겠습니다." 그러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예수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는 설명을 하고 이제 그 이름 모르는 신을 알고 섬겨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때, 아테네 사람들이 "이름 모르는 신"이라 칭하고 있는 신이 결코 하나님일 수는 없습니다.
일본에는 "야오요로즈노오가미"라고 하는 8백만이나 되는 신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귀신을 만들다 보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아마도 우리가 모르고 빠뜨린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이름이 빠진 귀신이 있다면 그 귀신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 덧붙여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신'(Unknown god)이라고 써 붙인 다음 "인생이 미련해서 이름을 다 못 붙였어도 용서하시고 이 제물을 받으시고 진노를 푸십시오" 하며 섬긴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름 모르는 신'이라고 하는 제단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너희가 모르고 섬기는 신은 곧 하나님이다"라고 외치고 있으니, 이것은 하나의 괴변이요 즉흥적 지혜요 궤사(詭詐)이지 절대로 전도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강연은 멋진 것 같았으나 전혀 열매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루를 전도하였거나 이틀을 전도하였거나 그가 전도하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지만 이 아테네에서만은 교회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는 낙심을 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 내가 실패했던가? 방법이 옹졸하였나 아니면 지식이 모자랐나?" 그는 고민합니다.
그 다음 전도지인 고린도에 가서도 그는 전도하기를 망설이며 두려워하였습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닷가에 나가 천막치는 직업으로 돈을 벌어 생활하며 친구들과 얘기하고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 설교하는 정도의 전도만을 하면서 일년 육개월 동안 그 곳에서 살았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바울아, 두려워 말고 잠잠하지 말며 말하라. 이 성에 구원 얻을 내 백성이 많다. 왜 잠잠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잠잠하였습니까? 그는 본문에 기록된 것같이 고린도에 있는 동안 마음이 약해져서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습니다. 핍박이 있어서가 아니라 두렵고 자신이 없어서였습니다. 왜 그렇게 두렵고 자신이 없었던가? 그는 마지막에 가서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말을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제 2의 결단을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건강이 있는 자는 자신의 건강에 의지하며, 돈 있는 자는 돈을, 또한 지식이 있는 자는 그 지식을 의지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에 의지하고 있는 동안 인간은 큰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언젠가는 낙담하고 절망에 빠져 연약해질 뿐입니다. 두려움 떨었던 사도 바울도 제 2의 결단을 한 뒤에야 새로운 용기를 얻어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부흥시킨 것처럼 우리도 제 2의 신앙 결단을 내려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제 2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신의 지혜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간의 지혜를 포기하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거나 물질을 의지할 때에는 우리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정하기 전에는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물질, 그 외에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만 의지할 때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위로하여 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친정어머니인 권사님께서 딸에게 이렇게 말함으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본래 너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았느냐? 네 아들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셋째로, 예수를 믿되 십자가만 알기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아플 때 병을 낫기 원하여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병이 낫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부인합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면을 믿고 의지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제사적인 의미만을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구하나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의지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어리석은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무능력한 것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십자가가 모든 능력의 근원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병 고치는 의사나 이적을 행하는 마술사나 봉사하는 사회 사업가만은 아닙니다. 그러기 이전에 그는 십자가를 지신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신앙의 초점이며, 그의 모든 능력의 근원이었습니다.
넷째로, 그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온갖 사조가 날뛰고 갖가지 신학 이론이 범람하는 혼란한 시대에 우리는 신앙의 초점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요구된 신앙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말세를 당하여 왜 이렇게 방황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더 많이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고 미련할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와 함께 어리석어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무능해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본문 4절 하반절에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의지할 때에 그는 다시 능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 시에는 많은 정치가들이 모여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많은 정치가들이 주일이면 여러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워싱턴 시에 있는 교회 목사님들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정치가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기 때문에 유식하고 매우 고상한 설교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 설교가 은혜로울 리 없습니다. 이 정치가들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과 오직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십자가의 복음만을 듣고 싶어 차를 몰고 시골 교회를 찾아갑니다. 그러면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것은 시골 교회에서 그 사람이 워싱턴에서 온 아무개라고 소개가 되면 그 다음주부터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유식한 설교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이 정치가들은 "목사님, 저희들은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설교를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메마른 심령에 힘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것이니 예전처럼 설교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한 것이 사도 바울의 제 2의 결단입니다. 그는 빌립보 3장에서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도달하려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의 고난과 그 부활의 능력을 믿고 그와 같은 십자가의 체험을 통하여 죽고 다시 부활에 이르려는 것이 그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이제 귀중한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나약하고 비굴해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 같은 대전도자도 때로는 두렵고 떨릴 때가 있었습니다.
바라옵건대 모든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의 원인이 바로 우리 자신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려고 하는 데에 있음을 깨닫게 하여주옵시고, 이 나약함에서 다시 한 번 구원하여 주옵소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제 2의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에만 우리의 신앙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