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6-9


설교내용    무화과나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서울, 경기지방에는 무화과나무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남쪽지방에는 무화과가 흔히 보입니다. 무화과는 하나도 매력이 없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 자체가 매력이 없습니다. 전혀 쓸모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화과의 잎도 매력이 없습니다. 무화과 나뭇잎 보러 간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열매는 있는데 꽃이 없습니다. 열매가 있는 나무는 꽃이 아름답습니다. 꽃 자랑도 하고 열매 자랑도 하는데 무화과는 꽃 자랑도 없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는 오직 존재이유가 열매입니다. 무화과가 열매가 없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피지의 유명한 코코넛은 하나도 버릴 게 없다고 합니다. 잎도 줄기도 열매도 둥지도 뿌리까지도 전부 원료로 쓰이고 조각목으로도 쓰여서 가장 유용한 사람을 비유할 때 ‘코코넛 나무만큼만 되라’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 열매도 완숙될 때 까지는 맛이 없습니다. 익어야 맛이 있지 그냥 모양이 크고 먹음직해 보여도 익지 않는 무화과는 아무 맛도 없습니다.

   주인의 분노

   본문에 보면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가 있었는데 3년이나 기다렸는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화가 난 것입니다. “왜 땅만 허비하느냐, 찍어버리라” 이 포도원의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화가 나서 하는 말입니다. 내가 3년을 기다렸는데 열매가 없다, 왜 땅만 버리느냐, 찍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주인의 포도원 경영목적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이 무화과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늘 감사하는 것은 음향시설입니다. 스피커나 마이크 등의 음향시설은 기계입니다. 이 음향시설이 없다면 오늘날 목사님들이 예배 인도하는데 얼마나 힘들겠는가? 저는 이 앞에 설 때마다 마이크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합니다. 존재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이크가 예배당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어디든 많습니다. 술집에도 있고 댄스홀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목적이 다릅니다. 창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땅위에 있는 모든 사물은 존재목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나’라는 이 존재는 하나님이 이 땅에 두신 존재목적이 있습니다. 이 목적을 따라 살지 아니하면 포도원에서 3년 동안 기다렸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무화과와 같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 바울의 신앙고백 가운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내가 예수를 만나서 사도가 되어 주님을 위해서 살아보니까 내가 태어난 이것이 어머니의 태로부터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우연히 내가 사도가 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떠서 살아보면 내가 고난당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면 내가 넘어지고 실수하고 상처받은 그것도 하나님이 의도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대목이 옵니다.
   본문에 보면 주인은 할 만큼 했습니다. 주인은 3년이나 기다려 주었습니다. 굉장한 인내입니다. 3년이나 기다린 이 주인의 인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넘어져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을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열매맺을 때까지 인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왔습니다.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우리 주 하나님의 인내의 정점이 어딘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것이 바로 우리 죄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우리 죄를 참다가 참다가, 우리 죄 값에 대해서 하나님이 참으시다가 참으시다가 우리를 치지 않고 자기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치신 것입니다. 우리 죄 값을 자기 아들에게 갚아서 우리 죄에 대해서 속죄하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점입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죽지 아니하셨으면 이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미 끝이 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기회도 없었습니다.

   과원지기의 탄원

   주인의 이 준엄한 심판의 음성 앞에 과원지기가 하는 말을 우리가 주목해야 됩니다. 7절에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의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과원지기는 주인의 분노 앞에 “주인이여 제발 금년에만 참아주십시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어서 다시 한번 돌보겠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열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열매가 안 맺히면 찍어버리시기 바랍니다”라는 이 과원지기의 말이 주님의 십자가의 중보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값에 대해서 심판의 몽둥이를 드셨는데 이것을 누가 말리셨느냐? 예수님이 말리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가 이들의 죄 값을 치르고 내가 이들을 다스려 보겠습니다. 그래서 믿으면 구원해 주시고 그래도 안 믿거든 심판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과원지기가 하는 말 중에 제일 중요한 용어가 “내가”라는 인칭입니다. “주인이여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어서 내가 이 무화과를 열매맺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이 과원지기의 말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주도적 책임성

   첫째는 내가 해보겠다는 이것은 주도적 신앙입니다. 근간에 가장 많이 팔린 책 열 가지 중에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코비박사의 책이 있었습니다. 성공하는 일곱 가지 조건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조건은 'Proactivity'라는 말입니다. 내가 주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내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이 습관을 가져야 성공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이 주도적 신앙 아이디어가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쓰시느냐 하면 ‘주여, 내가 갑니다’ ‘내가 합니다’라고 나서는 자기 주도적 신앙고백을 하는 자를 하나님이 쓰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전건축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 “주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 기도를 담아서 하십시오. “주님 성전은 지어야 되는데 나는 빠지겠습니다. 누군가가 하겠죠.” 그런 기도는 백만 마디를 해도 안됩니다. “주님, 나도 성전기둥을 하나 세우겠습니다.” “주님, 나도 성전의 한 모퉁이 짐을 지겠습니다.” 그런 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주님, 이 일은 내가 할 일입니다.” “이건 내가 책임질 일입니다.” 그게 바로 이 과원지기의 기도입니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우리들의 신앙고백 속에 주도적 신앙고백을 강하게 담으시기 바랍니다. 이 주도적 신앙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사장 역할은 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장의 역할 중에 제일 멋있는 게 무엇입니까? 부하들이 서류를 들고 와서 벌벌 떨면서 결재를 받는 장면, 거기에 사장은 목에 힘을 주고는 도장을 꽝 찍어서 “가져가. 됐어” 하는 그런 장면은 근사합니다. 그러나 그게 보통 책임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장이 꽝 하고 결재를 하면 “가져가. 내가 책임지는 거야” 그 말입니다. 그게 멋있는 장면이 아닙니다. 결재했으면 결재자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몸만 좇아가다간 큰일납니다.
   세계적인 언론인으로 성공한 방송앵커 월튼 크로카이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가 미국에 80년대 초에 있을 때 이 사람이 명성을 한창 날리던 때인데 이 사람과 인터뷰를 하면 미국의 명사가 됩니다. 그만큼 유명한 사람입니다. 인물도 잘났지만 인터뷰하는 논리가 비상합니다. 이 사람과 인터뷰를 하려면 대통령도 긴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명사를 인터뷰하는 이 사람이 이제는 성공을 하고 은퇴를 하고 나서 기자들 앞에 인터뷰를 당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성공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때 이 사람이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방송을 위하여 있고, 방송은 나를 위하여 있습니다.” 하도 간단하게 인터뷰를 해버리니까 저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게 유명한 명언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을 할 때 이 모든 방송시스템이 나를 위하여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이 모든 일도 나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방송을 위해서 나는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크론카이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언제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모든 방송시스템이 나를 위해서 있다, 내가 하는 이 모든 일이 이 방송을 위해서 있다, 내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성공자입니다. 과원지기의 “내가 땅을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이 주도적 신앙고백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뢰의 자세

   두 번째, 이 과원지기는 무화과에 대해서 신뢰를 가집니다. 이 무화과가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집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찍어버리라 할 만하지만 나는 이 무화과를 신뢰합니다. 기어코 라도 이 무화과가 열매를 맺을 줄 믿습니다. 내게 한번 맡겨주십시오.’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잠재성을 본 것입니다.
   장애라는 말이 있고 질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장애는 ‘disord’이고 질병은 'disease'라고 나오는데 장애와 질병은 그 개념이 다릅니다. 장애는 끝난 것입니다. 장애는 낫는 게 아니라 그 상태로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은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애자들을 사랑해야 되고 돌봐야 되는 게 그 점입니다. 장애는 더 이상의 기대가 없습니다. 그러나 질병은 안 그렇습니다. 이 무화과는 지금 열매를 못 맺는 그것을 극복하면 됩니다. 이게 지금 영양이 부족해서 그런지 무언가 잘못되서 그런지 몰라도 과원지기가 볼 때는 다시 거름을 주고 가꾸면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18년 동안 귀신에게 시달리는 한 여자가 그 회당문 앞에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니 허리를 펴지 못하는 극한 장애 속에 빠져 있는 이 불쌍한 딸인데 예수님이 그 귀신들린 그 아이를 고쳐주었습니다. “고쳐 펴더라.” 그런데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성경에 보니까 분노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아주 유명한 말씀을 했습니다. 18년 동안 고생하는 이 아브라함의 딸을 고쳐준 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 오늘 본문을 그대로 보면 14절에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님이 말씀합니다. 16절에 “그러면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귀신들려 오그라져 있는 그 불쌍한 여인을 세상 사람들은 쓸모없는 폐인으로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 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땅위에 아무리 쓸모없는 인간이라도 하나님은 그 속에 인간의 가능성을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람들 앞에 버림받을 만큼 망가져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아브라함의 딸이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무화과에 대한 신뢰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함부로 버리지도 말고 물건도 함부로 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딸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딸이 사탄에게서 놓임을 받으면 훌륭한 딸이 될 수 있는 것을 주께서 아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자답지 못한 것은 장애가 아니라 질병입니다. 우리 안에 신자답지 못한 것은 고치면 됩니다. 극복하면 됩니다. 왜 우리가 신자답지 못합니까? 영적인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인격적 책임성

   세 번째, 주도적 신앙은 책임을 함께 진다는 뜻입니다. 과원지기는 무화과가 열매를 못 맺는 것을 보고 무화과나무의 책임도 있지만 잘못 가꾼 나도 책임이 있다는 심정으로 지금 주인에게 애걸하는 것입니다. ‘나도 함께 책임이 있습니다. 한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내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이렇게 애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원지기의 주도적 신앙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비유입니다만 이 과원지기는 성공한 과원지기입니다. 이 과원지기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고 죄 가운데서 부활하시므로 우리의 영원한 구속주가 되셨습니다. 그 과원지기 예수님은 성공하셨습니다. 그 예수로 말미암아 많은 죄인들이 믿고 구원을 얻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메시야의 최선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최선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구속사역이 성취된 것입니다. 최선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모 신문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6년 동안 어머니가 노를 저어서 딸을 통학시키면서 공부시킨 이야기입니다. 6-7시간 노를 저어서 통학시키는 노고를 했는데 박정희대통령 시절에 이 미담이 알려져서 대통령이 하사금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딸 애가 여수여고를 나오고 성균관대를 거쳐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지금 나이가 80세로서 강남에 지금 살고 있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어머니를 보면서 이 세상의 어떤 일도 ‘이건 내가 해보겠다’ ‘내가 해내겠다’ ‘이건 내가 할 책임이다’라는 집념을 가질 때 그 어려운 여건들도 극복이 된다는 실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불가능한 환경에서도 딸을 키워낸 그 놀라운 집념, 이 어머니의 주도적 교육열, 그것이 오늘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요즘 우리 세태 가운데 아주 한심한 것은 제 할 일은 안 하고 남 할 일만 간섭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에, 내가 할 내 책임, 내 주도적 삶에 몰두하기 바랍니다. 요즘 인터넷 문화는 남 헐뜯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익명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남을 너무너무 간섭하고 있습니다. 허송세월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느 동네에서 몇 분과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젊은이 몇 사람이 식사를 하고 나오더라고요. 내가 볼 때는 20대 초반의 아주 젊은 아이들입니다. 우리 일행도 마침 차를 타려고 하는데 그 친구들도 차를 타는데 보니까 차 두 대가 모두 BMW였습니다. 그 차는 적어도 1억원 이상 하는 차입니다. 아주 고급 새 차입니다. 자기 아버지차인지 자기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차를 타면서 이런 고급식당에 와서 젊은이들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제가 많은 느낌이 왔습니다. 그것도 간섭하는 일이지만 젊은 시절을 그런 식으로 보내가지고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에 몰두를 해야 될 시기에 정말 몰두를 해야 됩니다.  전력을 다해서 공부하는 기간이 있어야 되고 피와 땀을 쏟아서 훈련하는 인생의 기간이 있어야지 거저 얻는 게 아닙니다.

   맺는 말

   우리는 과원지기의 이 주도적 신앙고백을 배워야 합니다. “주인이여 내가 땅을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이 주도적 신앙이 오늘 우리의 위기를 돌파하는 열쇠입니다. 오늘 이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열쇠입니다. 이 주도적 믿음만 무장이 되면, 우리 자녀들이 그 믿음을 무장하면, 군대에 던져놔도 객지에 던져놔도 외국에 던져놔도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을 키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이제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세상 일에 대해 너무 간섭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만 하시고 간섭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에 몰두해야 됩니다. 내 삶에 몰두해야 됩니다. 내가 주님 앞에 할 일이 무언가 거기에 몰두해야 됩니다. 이것이 성공하는 일곱 가지 습관 중에 첫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귀중한 교훈을 오늘 우리가 가슴에 새기기 바랍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