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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 (눅17:1-19)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
혀 바다에 심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우리는 지난 두 시간을 통하여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하여 재
물을 쓰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과 감사하는 믿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에 어떻게 양들을 섬겨야 하며 어떤 자세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해야 하는가?
또, 열 문둥병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을 통하여 감사하는 믿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
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을 배우고 감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실족케 말 것과 용서하는 믿음(1-4)
예루살렘 부근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단지 짠 소금물로 이루어진 사해(死海)바다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사해 바다는 사람이 들어가면 그냥 물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사람을 사형시킬 때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아서 가라 앉도록 했다고 합니다.
보통 바다에 빠지면 가라앉습니다만, 사해 바다에서는 떠오르므로 연자 맷돌을 달아서 죽이
게 했다는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배경에서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실족케 한다는 말은 영어로(temptions to sin) 곧 <함정을 만들어 죄에 빠지게 한다>는 뜻입
니다. 또, 장애물, 올가미, 미끼, 걸림돌(stumbling-blocks)등이 되어 형제를 넘어뜨려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실족"이란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서 타인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부족한 인간들이 타인을 죄로 이끌지 않은 상황만을 만들 수는 없으나 그런
경우라도 죄를 짓게 한 자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는 화로다 했습니다.
그러면 형제를 실족케 하는 자가 당하는 형벌은 어떤 것입니까?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메이우고 바다에 던지우
는 것이 나으니라" 했습니다. 연자 맷돌은 지름이 15cm, 두께가 10cm나 되는 돌로서 나귀
가 돌리는 맷돌이었다고 합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메이우고 바다에 던지는 것은 고대, 수
리아,로마,그리스 지방에 있었던 사형 제도였습니다.
당시에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한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던져 죽였습
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작은 자(연약한 자, 초신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이보다 더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한 영혼을 죄에 빠지
게 하거나 주를 떠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서 믿는 성도나 직분을 가진 성도는 한 영혼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신을 살피고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3a) 곧 실족시키지 않도록 조심해
야 합니다. 타인을 넘어뜨리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형제를 실족케 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동해 바다나 부산 앞 바다에 가서 빠뜨려 죽여야 합니까? 아닙니
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죄를 변명하지 말고 자기의 연약
함을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열 가지 잘 한 것 보다 한 가지
잘못한 것 때문에 실족하고 주를 떠나므로 먼저 믿는 성도는 피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옛날 베르사이유 궁전에 한 늙은 정원사가 있었습니다. 늙은 정원사는 충성된 성품을 가
진 사람으로서 정성스럽게 정원을 돌보았고, 정원의 꽃과 나무를 가꾸며 아름답게 꽃이 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쁨을 한번도 맛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정원을 잘 가꾸어 놓으면 궁전에서 조신들과 그 부인들이 꽃밭에 몰려와서 마구
밟아 버리는 것이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픈 이 늙은 정원사는 왕에
게 탄원의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정을 받아서 루이 14세는 어명으로 '에티켓'이
라고 쓴 자그마한 팻말을 여러 개 만들어서 꽃밭 사이 사이에 세워 놓고 그 팻말 안으로만
조심스럽게 걷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에티켓은 "a ticket" 곧 "하나의 푯대"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에티켓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히 기대
되는 생활 규범이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생활양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벗어날 때 형제를
실족시킵니다.
그리고 형제가 죄에 빠졌을 경우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3b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여기 경계한다는 말은 영어로는 <rebuke> 곧 책망하라는 뜻입니다. 형제가 범죄 했을 경
우 즉각적으로 찾아가서 죄를 깨닫게 해 주고 회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범죄한 형제
를 책망하지 않으면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죄를 범하고도 죄인 줄 깨닫지 못하고 더
큰 죄에 빠져들게 됩니다. 결국 그 영혼이 실족케 되어 버립니다. 또 주위에 있는 다른 사
람들도 그 죄에 오염됩니다. 죄는 누룩과 같이 퍼져 나가 온 교회를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
다. 형제를 위로하는 일은 쉽지만 경책(책망)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는 집사님이나 장로님에게 새벽기도에 좀 나오라고 책망을 하는 그 작은 일도 힘이 드는
데요. 경책이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참 사람으로 죄를 책망하고 믿음으로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또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했습니다. 하나님
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
다.(15:7)
범죄한 형제를 책망하는 이유도 그를 회개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회개하면
즉시 용서해야 합니다. 회개할 기미만 보여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용
서의 사랑을 깨닫고 더욱 더 진실하게 회개할 것입니다. 회개했는데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불의에 빠지고 사람들에 대한 불신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영혼이 낙담하여 실족
케 되므로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통해서 회개한 자를 용서하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요
셉은 자기를 미워하여 노예 상에게 팔아 넘긴 형들이 회개하기까지 엄하게 다루었습니다.
일부러 간첩 혐의를 씌워 형들을 감옥에 가두고 가장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도둑으로 만
들어 노예를 삼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건을 만들어 형들이 죄를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동안 요셉은 마음이 너무 너무 아파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형들이 회개했을 때 깨끗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하나님의 편에서 형들이 자기를 판 사건을 해석하고 형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생 동안 형들과 그 자식들까지 보살펴 주었습니다.(창50:21)
그러면 형제의 죄를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
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3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3번까지 용서해 주는 자는 완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
다. 7이라는 수는 완전 수입니다. 그러므로 무한히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형제의 죄를 무한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무한히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
께서 빚을 탕감 받은 자의 비유를 통해서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마18:23-25)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에게 빚을 받기 위해 옥에 가두어 버
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노하여 저를 불러다가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
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빛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
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 너희에게 이와 같이하시리
라"(마18;35)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너무나 큰 죄, 어떠한 죄라도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의 죄를 "회개하노라"하면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
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합니다. 그러나 타인이 죄를 지을 경우 용서하기에 아주
인색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뀌어져야 한다고 신앙합니다. 그리하여야 하나님께서도 우
리의 과신을 용서하실 것입니다.(마6:14,15)
Ⅱ.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구하는 사도들(5-10)
제자들은 실족케 하지 말 것과 또 무한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입이 딱 벌어
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했던 것 같습니다.(5)
아무리 보아도 믿음이 부족해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만큼 사람을 실족케 않을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들도 제자들과 마찬가지입니
다. 육을 가진 존재인지라 형제를 실족시킵니다. 또 무한히 용서하라고 하시지만 용서보다
미움이 앞서고, 준 것 없이 미운 것을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절망하고 어쩔 수 없다고 낙심도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자신들로서는 안되니까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는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6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
혀 바다에 심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예수님은 태산과 같은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
음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겨자씨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란 지극히
작은 믿음을 말합니다. 겨자씨는 지극히 작으나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 이 작
은 씨가 떨어지면 생명이 있으므로 껍질을 뚫고 땅을 해치고 자라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작아 보이는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이 진실할 때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
사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6절에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 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했으나 마태복음에는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했
습니다. 곧 생명력이 있는 믿음은 작아 보일지라도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주께서 빈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우라 했을 때 믿고 순종하여 물을 채웠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습니다. 뽕나무가 옮
겨진 것같이 산이 옮겨진 것같이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투쟁하는 그 "산 믿음""살아 있는 믿음" 그 믿
음이 적은 겨자씨 같은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적은 믿음을 가지고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
으려고 투쟁하고 또 형제를 무한히 용서하려고 투쟁하다 보면 뽕나무가 옮겨지는, 산이 옮겨
지는 것 같은 놀라운 변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사도들에게 자신들이 반듯이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를 말씀하
여 주셨습니다.(7-10) 이런 종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
리는 이렇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에게 밭갈이나 양치는 일을 맡은 종이 있다고 하자 그가 밭에서 돌아
오면 어서 이리 와서 앉아 먹어라 할 주인이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너는 내 저녁부터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시중을 들다가 내 식사가 끝난 다음에 네가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또 시키시는 대로했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에게 고맙다고 하겠느냐? 이
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수행하고 나서 그저 "무익한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하고 말하라 했습니다.
이러 믿음을 소유한 제자, 이런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을 조금하고 나서 보상을 바라고 자꾸만 자꾸만 종의 위치를
떠나서 칭찬을 듣고 대접을 받는 위치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끝까지 지녀야 할 믿음은 이 모든 일을 수행한 후,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했을 뿐이라고,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70년을 살면은 25,550일을 살게 됩니다. 그 중에 잠자는 시간을 반으로 빼면
12,775일 입니다. 그 중에 어린 시절과 또 대학까지 공부하는 시간 반을 빼면 6,387일입니
다. 또, 연세가 들어 늙어서 할 일 없는 시간을 빼면 3,193일 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인생
을 삽니다. 그런고로 내려오는 말 가운데 "인생이 천 날 만 날 사는가" 하는 속담이 있습니
다.
종교개혁을 한 마틴 루터(M. Ruther)는 "우리 생애 중 절반은 잠을 자고 하나님께는 우리
의 시간의 10분의 1만을 바친다 그러고도 우리의 선행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한
다. 하루 동안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나는 두 시간 말을 타고 세시간을 식사하는데
보내고 네 시간은 하는 일없이 보내니 아! 아! 주님이여! 이 무익한 종을 정죄하지 마옵
소서" 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 가운데 주의 주신 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나 주의
이름으로 주어진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분입니다 하는
그런 신실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Ⅲ.감사하는 미음(11-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그런데
한 촌에 들어가셨는데 문둥병 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문둥병 자들은 멀리서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문둥병은 접촉성 전염병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성한 사람 가까이 올 수 없었습니다. 그리
고 사랑하는 처자와 헤어져 격리되어야 했고, 진밖에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는 율법적으로 이 문둥병이 들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 입술을 가리우고 멀리 서서 부
정하다 부정하다 소리를 지르게 되어 있습니다.(레13:45) 이를 어길 경우 돌로 쳐죽여도 무
방했습니다. 문둥병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도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
할 수도 없습니다. 또, 이병은 불치의 병입니다.
이들은 일생 동안 저주받은 삶을 살다가 병이 악화되면 눈,코가 비틀어지고 손,발이 오그
라들고 떨어져 나가 죽습니다. 이런 병자들이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
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3) 했습니다.
이 문둥이들은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
면 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필사적으로 소리소
리 질렀습니다. 그리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런 방향을 주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문둥이의 몸에 손을 대시며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면 믿기가 쉬웠을 것입니
다.(5:13) 그러나 멀리 있는 문둥이들에게 곧 바로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
셨습니다. 보통 문둥병 자들은 일반인들과 100보 이상 떨어져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어기
면 돌로 쳐죽여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감히 문둥병이 든 상태로 제사장에게
가는 것,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순종하기에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순종하여 갔습니다. 저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다가
보니 자기 몸들이 깨끗하게 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수하게 그대로
믿고 순종하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듣고 물을 떠가다가 보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보니 고기를 많이 에웠습니다.
말씀을 믿고 실로암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있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신하가 주께 와서 "주여! 내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내려 오셔서 고쳐 주십시오" 했을 때 예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아났다" 하
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
아이가 살았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요4:46-54)
오늘 본문에 열 문둥병 자가 예수님의 이르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이 하나님의 말씀, 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다가 영광 보시기
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병이 나은 후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입니다. 은혜를 받기 이전보다 은혜와 축복을 받은 이
후가 더욱 중요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한 문둥이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
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사례를 했습니다. 이 문둥이는 저주를 받은 문둥병
을 깨끗케 해 주신 하나님과 자기에게 말씀을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그냥 갈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며(Praising God)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했습니다. 그에게는 감사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발 아래 엎드려 사례하는 이 문둥이를 보시고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
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아홉 문둥병 자들로 인하여 심
히 슬퍼하셨습니다.
특히,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온 것을 보고 더욱 마음이 상하셨습
니다.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시며 탄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원하시는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마리아인은 영혼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믿음을 축복하시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이 문둥이는 육신의 문
둥병만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둥병도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곧 구원을 얻었
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온갖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다가도 은혜를
받은 후에는 입을 닦는 성도들이 더러 있습니다. 바라기는 사마리아의 한 문둥이처럼 감사
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어 영육간 구원을 얻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1)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
혀 바다에 심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우리는 지난 두 시간을 통하여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하여 재
물을 쓰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과 감사하는 믿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에 어떻게 양들을 섬겨야 하며 어떤 자세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해야 하는가?
또, 열 문둥병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을 통하여 감사하는 믿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
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을 배우고 감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실족케 말 것과 용서하는 믿음(1-4)
예루살렘 부근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단지 짠 소금물로 이루어진 사해(死海)바다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사해 바다는 사람이 들어가면 그냥 물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사람을 사형시킬 때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아서 가라 앉도록 했다고 합니다.
보통 바다에 빠지면 가라앉습니다만, 사해 바다에서는 떠오르므로 연자 맷돌을 달아서 죽이
게 했다는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배경에서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실족케 한다는 말은 영어로(temptions to sin) 곧 <함정을 만들어 죄에 빠지게 한다>는 뜻입
니다. 또, 장애물, 올가미, 미끼, 걸림돌(stumbling-blocks)등이 되어 형제를 넘어뜨려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실족"이란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서 타인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부족한 인간들이 타인을 죄로 이끌지 않은 상황만을 만들 수는 없으나 그런
경우라도 죄를 짓게 한 자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는 화로다 했습니다.
그러면 형제를 실족케 하는 자가 당하는 형벌은 어떤 것입니까?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메이우고 바다에 던지우
는 것이 나으니라" 했습니다. 연자 맷돌은 지름이 15cm, 두께가 10cm나 되는 돌로서 나귀
가 돌리는 맷돌이었다고 합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메이우고 바다에 던지는 것은 고대, 수
리아,로마,그리스 지방에 있었던 사형 제도였습니다.
당시에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한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던져 죽였습
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작은 자(연약한 자, 초신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이보다 더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한 영혼을 죄에 빠지
게 하거나 주를 떠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서 믿는 성도나 직분을 가진 성도는 한 영혼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신을 살피고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3a) 곧 실족시키지 않도록 조심해
야 합니다. 타인을 넘어뜨리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형제를 실족케 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동해 바다나 부산 앞 바다에 가서 빠뜨려 죽여야 합니까? 아닙니
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죄를 변명하지 말고 자기의 연약
함을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열 가지 잘 한 것 보다 한 가지
잘못한 것 때문에 실족하고 주를 떠나므로 먼저 믿는 성도는 피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옛날 베르사이유 궁전에 한 늙은 정원사가 있었습니다. 늙은 정원사는 충성된 성품을 가
진 사람으로서 정성스럽게 정원을 돌보았고, 정원의 꽃과 나무를 가꾸며 아름답게 꽃이 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쁨을 한번도 맛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정원을 잘 가꾸어 놓으면 궁전에서 조신들과 그 부인들이 꽃밭에 몰려와서 마구
밟아 버리는 것이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픈 이 늙은 정원사는 왕에
게 탄원의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정을 받아서 루이 14세는 어명으로 '에티켓'이
라고 쓴 자그마한 팻말을 여러 개 만들어서 꽃밭 사이 사이에 세워 놓고 그 팻말 안으로만
조심스럽게 걷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에티켓은 "a ticket" 곧 "하나의 푯대"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에티켓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히 기대
되는 생활 규범이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생활양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벗어날 때 형제를
실족시킵니다.
그리고 형제가 죄에 빠졌을 경우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3b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여기 경계한다는 말은 영어로는 <rebuke> 곧 책망하라는 뜻입니다. 형제가 범죄 했을 경
우 즉각적으로 찾아가서 죄를 깨닫게 해 주고 회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범죄한 형제
를 책망하지 않으면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죄를 범하고도 죄인 줄 깨닫지 못하고 더
큰 죄에 빠져들게 됩니다. 결국 그 영혼이 실족케 되어 버립니다. 또 주위에 있는 다른 사
람들도 그 죄에 오염됩니다. 죄는 누룩과 같이 퍼져 나가 온 교회를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
다. 형제를 위로하는 일은 쉽지만 경책(책망)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는 집사님이나 장로님에게 새벽기도에 좀 나오라고 책망을 하는 그 작은 일도 힘이 드는
데요. 경책이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참 사람으로 죄를 책망하고 믿음으로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또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했습니다. 하나님
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
다.(15:7)
범죄한 형제를 책망하는 이유도 그를 회개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회개하면
즉시 용서해야 합니다. 회개할 기미만 보여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용
서의 사랑을 깨닫고 더욱 더 진실하게 회개할 것입니다. 회개했는데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불의에 빠지고 사람들에 대한 불신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영혼이 낙담하여 실족
케 되므로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통해서 회개한 자를 용서하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요
셉은 자기를 미워하여 노예 상에게 팔아 넘긴 형들이 회개하기까지 엄하게 다루었습니다.
일부러 간첩 혐의를 씌워 형들을 감옥에 가두고 가장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도둑으로 만
들어 노예를 삼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건을 만들어 형들이 죄를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동안 요셉은 마음이 너무 너무 아파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형들이 회개했을 때 깨끗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하나님의 편에서 형들이 자기를 판 사건을 해석하고 형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생 동안 형들과 그 자식들까지 보살펴 주었습니다.(창50:21)
그러면 형제의 죄를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
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3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3번까지 용서해 주는 자는 완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
다. 7이라는 수는 완전 수입니다. 그러므로 무한히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형제의 죄를 무한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무한히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
께서 빚을 탕감 받은 자의 비유를 통해서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마18:23-25)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에게 빚을 받기 위해 옥에 가두어 버
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노하여 저를 불러다가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
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빛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
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 너희에게 이와 같이하시리
라"(마18;35)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너무나 큰 죄, 어떠한 죄라도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의 죄를 "회개하노라"하면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
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합니다. 그러나 타인이 죄를 지을 경우 용서하기에 아주
인색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뀌어져야 한다고 신앙합니다. 그리하여야 하나님께서도 우
리의 과신을 용서하실 것입니다.(마6:14,15)
Ⅱ.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구하는 사도들(5-10)
제자들은 실족케 하지 말 것과 또 무한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입이 딱 벌어
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했던 것 같습니다.(5)
아무리 보아도 믿음이 부족해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만큼 사람을 실족케 않을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들도 제자들과 마찬가지입니
다. 육을 가진 존재인지라 형제를 실족시킵니다. 또 무한히 용서하라고 하시지만 용서보다
미움이 앞서고, 준 것 없이 미운 것을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절망하고 어쩔 수 없다고 낙심도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자신들로서는 안되니까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는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6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
혀 바다에 심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예수님은 태산과 같은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
음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겨자씨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란 지극히
작은 믿음을 말합니다. 겨자씨는 지극히 작으나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 이 작
은 씨가 떨어지면 생명이 있으므로 껍질을 뚫고 땅을 해치고 자라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작아 보이는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이 진실할 때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
사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6절에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 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했으나 마태복음에는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했
습니다. 곧 생명력이 있는 믿음은 작아 보일지라도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주께서 빈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우라 했을 때 믿고 순종하여 물을 채웠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습니다. 뽕나무가 옮
겨진 것같이 산이 옮겨진 것같이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투쟁하는 그 "산 믿음""살아 있는 믿음" 그 믿
음이 적은 겨자씨 같은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적은 믿음을 가지고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
으려고 투쟁하고 또 형제를 무한히 용서하려고 투쟁하다 보면 뽕나무가 옮겨지는, 산이 옮겨
지는 것 같은 놀라운 변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사도들에게 자신들이 반듯이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를 말씀하
여 주셨습니다.(7-10) 이런 종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
리는 이렇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에게 밭갈이나 양치는 일을 맡은 종이 있다고 하자 그가 밭에서 돌아
오면 어서 이리 와서 앉아 먹어라 할 주인이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너는 내 저녁부터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시중을 들다가 내 식사가 끝난 다음에 네가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또 시키시는 대로했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에게 고맙다고 하겠느냐? 이
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수행하고 나서 그저 "무익한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하고 말하라 했습니다.
이러 믿음을 소유한 제자, 이런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을 조금하고 나서 보상을 바라고 자꾸만 자꾸만 종의 위치를
떠나서 칭찬을 듣고 대접을 받는 위치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끝까지 지녀야 할 믿음은 이 모든 일을 수행한 후,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했을 뿐이라고,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70년을 살면은 25,550일을 살게 됩니다. 그 중에 잠자는 시간을 반으로 빼면
12,775일 입니다. 그 중에 어린 시절과 또 대학까지 공부하는 시간 반을 빼면 6,387일입니
다. 또, 연세가 들어 늙어서 할 일 없는 시간을 빼면 3,193일 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인생
을 삽니다. 그런고로 내려오는 말 가운데 "인생이 천 날 만 날 사는가" 하는 속담이 있습니
다.
종교개혁을 한 마틴 루터(M. Ruther)는 "우리 생애 중 절반은 잠을 자고 하나님께는 우리
의 시간의 10분의 1만을 바친다 그러고도 우리의 선행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한
다. 하루 동안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나는 두 시간 말을 타고 세시간을 식사하는데
보내고 네 시간은 하는 일없이 보내니 아! 아! 주님이여! 이 무익한 종을 정죄하지 마옵
소서" 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 가운데 주의 주신 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나 주의
이름으로 주어진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분입니다 하는
그런 신실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Ⅲ.감사하는 미음(11-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그런데
한 촌에 들어가셨는데 문둥병 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문둥병 자들은 멀리서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문둥병은 접촉성 전염병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성한 사람 가까이 올 수 없었습니다. 그리
고 사랑하는 처자와 헤어져 격리되어야 했고, 진밖에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는 율법적으로 이 문둥병이 들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 입술을 가리우고 멀리 서서 부
정하다 부정하다 소리를 지르게 되어 있습니다.(레13:45) 이를 어길 경우 돌로 쳐죽여도 무
방했습니다. 문둥병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도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
할 수도 없습니다. 또, 이병은 불치의 병입니다.
이들은 일생 동안 저주받은 삶을 살다가 병이 악화되면 눈,코가 비틀어지고 손,발이 오그
라들고 떨어져 나가 죽습니다. 이런 병자들이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
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3) 했습니다.
이 문둥이들은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
면 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필사적으로 소리소
리 질렀습니다. 그리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런 방향을 주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문둥이의 몸에 손을 대시며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면 믿기가 쉬웠을 것입니
다.(5:13) 그러나 멀리 있는 문둥이들에게 곧 바로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
셨습니다. 보통 문둥병 자들은 일반인들과 100보 이상 떨어져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어기
면 돌로 쳐죽여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감히 문둥병이 든 상태로 제사장에게
가는 것,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순종하기에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순종하여 갔습니다. 저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다가
보니 자기 몸들이 깨끗하게 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수하게 그대로
믿고 순종하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듣고 물을 떠가다가 보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보니 고기를 많이 에웠습니다.
말씀을 믿고 실로암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있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신하가 주께 와서 "주여! 내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내려 오셔서 고쳐 주십시오" 했을 때 예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아났다" 하
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
아이가 살았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요4:46-54)
오늘 본문에 열 문둥병 자가 예수님의 이르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이 하나님의 말씀, 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다가 영광 보시기
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병이 나은 후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입니다. 은혜를 받기 이전보다 은혜와 축복을 받은 이
후가 더욱 중요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한 문둥이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
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사례를 했습니다. 이 문둥이는 저주를 받은 문둥병
을 깨끗케 해 주신 하나님과 자기에게 말씀을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그냥 갈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며(Praising God)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했습니다. 그에게는 감사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발 아래 엎드려 사례하는 이 문둥이를 보시고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
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아홉 문둥병 자들로 인하여 심
히 슬퍼하셨습니다.
특히,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온 것을 보고 더욱 마음이 상하셨습
니다.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시며 탄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원하시는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마리아인은 영혼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믿음을 축복하시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이 문둥이는 육신의 문
둥병만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둥병도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곧 구원을 얻었
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온갖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다가도 은혜를
받은 후에는 입을 닦는 성도들이 더러 있습니다. 바라기는 사마리아의 한 문둥이처럼 감사
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어 영육간 구원을 얻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