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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7:17-24
엘리야를 대접하고 양식 공급의 기적을 날마다 경험한 과부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가슴을 에이는 듯한 슬픔에 젖은 어머니는 예언자에게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녀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 곧 의로우신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제하며 그의 존재 자체로 인하여 자신의 죄된 상태를 깨닫게 하는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녀에게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겨졌습니다. 슬퍼하는 어머니의 비통한 울부짖음에 감동된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시체를 자기의 거처 다락방으로 옮겨 놓고 아이의 영혼을 되돌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락방에서 드린 믿음의 기도는 승리하였고 또 보상을 받았습니다. 즉 아이가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들의 생명을 회복시킴으로써 아들을 잃었던 어머니의 마음에 기쁨과 소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23절)
전설에 의하면 소생한 소년은 엘리야의 시종이 되었으며 후에 예언자 요나의 시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뻐하는 어머니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는 전에는 몰랐던 방식으로 엘리야가 아들을 살리었으니 하나님의 대변자임을 이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24절)
1. 형통 중에도 불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자가 마지막 한 끼의 식량 이것을 먹고 나면 당시의 여건상 도저히 더 이상 먹을 양식이 없어 죽는 날까지 굶을 수밖에 없던 처지였습니다. 한데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복으로 그 한재가 계속되는 와중에 언제나 먹고 살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한데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으면 이제 저는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양식이 없어 모자가 같이 굶어 죽었으니 더 좋을 뻔 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고 아들이 죽었으니 저의 심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바로 이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나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대다수의 신자들이 이 같은 일을 생각 못하고 복만 주장하기 때문에 신앙이 약해지며 실망과 좌절 속에서 예수까지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늘 좋은 일만 거듭되어도 참 진리를 알지 못하여 하나님에 참 역사를 이해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 뒤에 하나님에 진노가 와도 여기에 하나님에 섭리가 계심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에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욥이 그 많은 지상의 복을 받고 이에 또한 지상최대의 불행을 당해도 신앙으로 극복하여 다시 복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욥의 신앙을 본받아서 때로 어려움이 당해도 인내를 잘하여 큰 복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18절에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자기가 죄인인 줄 알지 못하고 삽니다.
여인이 자신의 아들이 죽은 이유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처럼 인간이 죽음을 당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롬6:23). 그 여인의 말대로 그 여인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시어 그 아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심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의 죽음은 죄로 말미암음은 사실인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영생에 이를 수 없고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사람의 죽음을 대할 때에 단순히 인간적인 슬픔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던 구속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죄를 생각나게 하고”함은 재난이나 질병을 자신의 죄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고대인들의 통념적 사고 방식이 잘 담겨 있습니다(욥 4:7; 요 9:2 등).
사르밧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 값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옆에 있음으로 해서 과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은, 비록 엘리야조차도 당혹스러워 했지만(19-11절) 도리어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요 9:3).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22-24절)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보다 밝은 계시를 깨닫게 됨으로써 더욱 성숙된 신앙으로 진일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진리(롬 3:29)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니 이로써 사르밧 과부는 더욱더 진실되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3. 기도의 응답입니다.
22절에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죽은 아이를 살려주시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자를 침상에 눕히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자신이 거하는 집에 재앙을 내리사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 자신이 곤란에 빠지게 되었음을 고하면서 그로 다시 영혼이 돌아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기도는 참으로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죽은 아이를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행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을 주관하는 생명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일으킨 엘리야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부활의 기적을 예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를 행하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증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엘리야라고 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마11:14).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으로 아이를 살리시었습니다. 그 죽은 아이를 살려 주시도록 구할 수 있었던 그의 기도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가 그런 기도의 용기를 가진 것은 그가 하나님을 독실히 믿은 증표인 것입니다.
(약 5:17-18)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기도의 힘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을 이룩한 예는 성경에 매우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했으며 도한 기도하여 온 땅에 단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직접 불로써 응답하시는 신비한 능력도 나타내 보였습니다. (왕상 19:30-46)한데 이러한 기적들은 엘리야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는 어느 인간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성정을 지녔습니다.
4. 충성된 자의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르밧 과부는 모자가 먹을 마지막 음식까지 선지자의 요구에 의해 음식을 제공한 여인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저는 자기의 모든 것을 선지자를 위하는 일이라면 교회에서 무엇을 요구를 하면 저는 아낌없이 헌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정에 슬픔과 불행으로 막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장지의 무덤에서 실리시었다.(요 11:39-46) 이들에 형제 마리아나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그당시 여인으로써 최고의 헌신을 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충성자의 가정에서는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충성자의 보답은 언제나 소망만 있는 것입니다.
5. 말씀이 진실한 줄을 보여준 것입니다.
24절에“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할 줄 아니이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여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나자 그 어미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임과 그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행하신 기적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의 효과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하신 일은 대표적으로 기적을 행하심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의 역사를 행하심도 그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포하는 말씀의 권위를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막16:20).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을 믿지 않고 기적만을 바라는 자들에 대하여 책망을 하셨던 것입니다(요4:48).
엘리야의 전하는 말씀은 곧 하나님에 말씀이요 이에 그 말씀은 능력에 말씀이여서 죽은 자도 살리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과부는 하나님에 말씀은 진실하심을 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이같은 신앙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를 믿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 4:4)“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죽어도 사는 생명 그것은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가진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생명을 보유한 사람은 박해를 무서워 하지도 아니합니다.
어느 역경이나 환경을 탓하지도 아니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생명은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아무도 그 생명을 해하지 못합니다. 속함은 얻은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샘 솟듯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주님의 이 귀한 은혜를 받았으니 세상의 염려를 너무 두려워 할 것이 아니요 담대함으로 신앙 가운데 굳건히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 양식의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고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가정의 유일한 아들이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하나님에 말씀으로만 살 때에 영과 육이 다 산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