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8:6 - 12

할렐루야!
오늘 한날도 애청자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는 창세기 8장 6절로 12절 본문 말씀을 통해서 까마귀와 비둘기가 주는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 홍수 사건 때 방주에 들어갔던 까마귀와 비둘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의외로 많은 짐승들의 이야기나 그에 얽힌 사건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짐승들도 하나 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하고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한 것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인간을 지으신 것을 한탄 하시며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땅 위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과 땅위에 기는 것 그리고 공중에
날으는 새까지 쓸어 버리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음란하고 난폭하며 양심이 썩어 버린 사회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고 홍수 심판의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을 함께 멸망시킬 수 없는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노아를 구원하실 것도 아울러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드디어 심판의 홍수는 시작되었습니다.
시작된 폭우는 40일 간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높은 산으로 올라갔으나 살아남은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40일간의 긴 폭우가 끝나자 오랫만에 하늘은 다시 맑게 개었고 태양은 힘있게 지구를 비추어 주었습니다.
파도는 무성한 인간들의 시체를 삼킨 체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만사는 끝났습니다.
향락도 끝났고 질투도 끝났고 싸움도 끝이 났습니다.
인간들이 그토록 노아 영감을 비웃던 불신의 소리도 물 속에 잠긴 체 파도만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홍수가 시작된 지 150일이 지난 후 방주가 아라랏산 정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0일이 지난 어느 날, 노아가 방주의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보냈고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 못하는 두 날짐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말보다 크고 강합니다.


첫째 까마귀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까마귀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건망증이 심합니다.

로마 사람들은 까마귀를 건망증의 상징으로 취급했고 우리 나라 사람들도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고 하며
건망증 많은 사람을 놀려 주기도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의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보냈지만 영영 돌아 올 생각을 안 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잘 구별되지 않지만 세상으로 내 놓으면
은혜받지 못한 성도는 까마귀처럼 주의 전을 돌아올 줄 모르고 세상 취미에 주님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까마귀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기러기는 지도자가 있어서 하늘을 날아가도 질서있게 잘 날아가지만 까마귀는 집합도 어렵고
집단 생활도 안 됩니다. 한 마디로 제멋대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까마귀 같은 성도는 부모의 말도 형제의 말도 목사의 말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넷째 까마귀는 가끔 다른 울움 소리를 흉내냅니다.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남이 좋다는 것을 다 가지려고 하며 남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흉내내고 남의 탐할만한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흉내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노아가 내 보냈던 까마귀의 행동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까마귀는 접촉 대상을 잘못 선택했습니다. 까마귀가 방주에서 나갔을 때는 땅의 물이 완전히 마르기 전이었기 때문에 지저분하고 습기가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썩은 시체며 나무 토막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둥둥 떠다니며 진흙탕 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바로 그곳을 선택했습니다. 아마도 까마귀는 길고 긴 날 방주안의 생활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까마귀의 본성은 깨끗하고 밝은 곳보다는 암울하고 냄새나는 곳을 찾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새라면 아직 착지하기에는 빠른 시기였지만 그러나 까마귀에게는 더 할 나위없이 좋은 때였습니다. 대상 선택 이것은 그 사람의 행,불행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접촉 대상의 선택은 그사람의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합니다.

두 번째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썩은 나무 토막이며 시체 위에 앉아 자기 생활에 안주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방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주경 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교인들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많은 정성을 들여서 홍수 기간 동안 먹이며 닦아주고 돌봐주었는데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배신 행위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노아 홍수 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떠났던 하나님께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현장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며 말씀의 현장으로, 기도의 현장으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머나 먼 도시로 가서 방탕에 빠졌던 둘째 아들의 이야기는 그것을 증거해 줍니다. 둘째 아들이 거지나 불앙아, 탕자로 굶어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면 살고 돌아오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까마귀가 바다 위를 헤메이듯이 세상적인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서 세상 가운데 헤메이면서 주일에도 주의 전을 찾아오기가 싫은 성도가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까마귀 본성을 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에게 비둘기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무리지어 살며 식물의 종자나 과일 등의 식물성을 먹고 삽니다.
비둘기는 순결합니다. 깨끗합니다. 깨끗한 것을 먹습니다. 평화의 상징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은혜를 보답합니다.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노아는 일주일 후에 비둘기를 내어 보냈습니다. 땅에 물이 아직 덜 말랐기 때문에 비둘기가 되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까마귀는 접촉할 곳이 없었지만 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바다 위에는 온통 더러운 시체와 썩은 것들이 많았지만 비둘기는 거기에 발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비둘기는 깨끗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바다 가운데 먹을 것이 많이 있었고 볼 것이 그렇게 많이 있었는데도 거기에 발 붙이지 못하고, 먹이를 찾지 못하고 노아의 방주로 돌아오는 비둘기가 바로 참 성도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는 안고 서는 자리가 분명해야 합니다.
시편 1편 말씀에,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나가서 일하는 자들이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로서 맞겨진 일을 하는 곳이요 영주할 땅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썩어질 양식으로 만족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84편 10절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주 없이 살 수 없기에 주의 전을 사모하여 돌아오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애청자 여러분,
"그 사람 까마귀였다"라는 평가를 받지 맙시다. "그 사람 비둘기였다"라는 평가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불화와 불평과 다툼이 있는 곳에 새로 돋아난 감람나무 잎을 물어다 주는 비둘기, 불안과 좌절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물이 걷히고 땅이 말랐다는 복음을 전해주는 비둘기,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지 못한 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멧세지를 전해주는 비둘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썩은 것을 탐식하고 아무 데나 주저 앉는 까마귀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비둘기, 은혜의 현장을 잊지 못해 그대로 되돌아오는 비둘기, 그 잎에 평화의 입새를 물고 사는 비둘기 그래서 사랑 받는 비둘기 같은 애청자 여러분들이 다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