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4:10-17
곽선희목사설교자료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고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우리는 자연을 알고, 배우고,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또는 우주를 배우고 정복하겠다고 지금 한창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알고 세계를 배우면서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알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인간의 문제이고, 인간 문제의 근본은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지난날의 잘못된 일들을 생각하면서 아차 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 후회하는 일들을 종합해 보면 자신을 미처 모른 데서 비롯된 일들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좀더 진실 되게, 겸손하게 바로 알았더라면 후회하는 일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모든 것 중에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모든 지식 중에 가장 귀한 지식입니다. 가장 우선적이어야 하는 자기에 대한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바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기가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일생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밖의 일을 많이 아는 사람들이 안의 일에 소홀하고, 특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큰 실수의 원인이 되고 있고 후회하는 생이 되고 맙니다. 자기를 모를 때에 사람들은 용감하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어리석음이요, 만용이라 합니다. 자기를 알 때에 우리는 겸손하고 또 나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나약함은 가장 강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40년 동안 성장했습니다. 당대의 애굽의 모든 문물을 배웠고 익혔습니다. 그리고 왕족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지식과 경험을 쌓은 인재였습니다. 하면 된다고 하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을 쳐죽일 만한 민족애도 있었고 의분도 있었고 용기와 혈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디안 광야에 쫓겨나서 이드로의 양을 치며 처가집 신세를 지고 40년을 살았습니다. 그 동안 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궁에 살던 사람이, 천하를 호령하던 사람이 쫓겨나서 광야에서 양을 치며 세월을 보내야 했으니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여기서 모세는 정말 죽었습니다. 용기도, 자신도, 의분도, 야망도 다 죽었습니다. 그에게 더 기대할 것이 없는 비참한 인간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하필이면 이같이 형편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십니다. 젊기도 하고 무엇을 좀 할 수 있을 때에 부르시지 않고 이렇게 죽어 있을 때 호렙산 기슭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가시나무 떨기의 불꽃 속에서 부르십니다. "모세야! 네 발의 신을 벗어라. 그리고 애굽에서 노예 된 네 백성을 건져라." 아주 중대하고 굉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고 귀중한 사명을 맡게 됩니다.
모름지기 모세는 이것이 본래 그의 소원이기도 했고 민족을 건져내는 것이 그의 근본적인 야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도 그의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에게 이렇게 중대한 말씀을 내리실 때 그는 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그가 처한 처지를 바로 알았고 초라하고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사양할 수밖에 없는 자기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사양하는 말로 "만약 내가 주의 부름에 응하여 애굽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주저했습니다. 옳은 얘기입니다. 이 같은 사람을 누가 믿겠습니까? 지금 같은 이 처지를 보고 누가 모세를 믿어 주겠습니까?
그 때에 모세는 뭔가 큰 것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나를 정말 보내시려면 굉장한 것 하나 주세요. 이 모습 이대로야 어찌 가겠습니까? 좀 굉장한 능력 같은 것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그는 기다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외로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의 대답은 소박하게 몇 십년 들고 다닌 목자의 지팡이를 번쩍 들고 "여기 지팡이 하나뿐입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 말씀하시며 다른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굉장하고 놀라운 것을 주시지 않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모세는 이 지팡이 때문에 모세가 되었고, 이 지팡이 때문에 모세는 끝났습니다. 지팡이와 함께 가서 10가지의 이적을 행하는데 대개가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도 지팡이로 홍해를 쳤고, 물이 없을 때에도 반석을 지팡이로 내려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마지막에 반석을 칠 때에 두 번 내리쳤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닌 지팡이였지만 모세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으나 마른 막대기 지팡이 하나가 모세의 운명에 깊은 관계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가진 것, 즉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 이미 가지고 있는 소유,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쓰라린 과거, 다시 되새겨 보기도 싫은 여러 가지 실패했던 지난 날의 일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학대할 수밖에 없던 초라한 자기 모습 그대로가 하나의 지팡이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른 막대기를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효과적인 소명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이 여기 있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굉장한 것을 다시 주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 그대로를 하나님은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나 지팡이를 사용할 때는 말씀에 의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4:1이하에 보면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고, 꼬리를 잡으라 할 때 꼬리를 잡고, 쳐라, 가져라 하셨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던져라 하실 때 던지고, 잡으라 하실 때 잡고, 쳐라 하실 때 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겸손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쳐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해서 불평, 불만, 원망 등을 담아서 감정적으로, 격동적으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기에 가나안 땅에 결국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수기 20장에서 "너는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했고 나를 거역했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지팡이를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잘 사용해야 하는데 함부로 휘두르다가 모세의 생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모세의 손에 들려준 것도 없을 뿐 아니라 모세라는 사람 자체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후에도 여전히 모세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해서 말을 더듬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라 하신 이 시간에도 여전히 말을 더듬습니다. 나아진 여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하라고 하면 "글쎄요. 전도하긴 해야 하는데 제가 좀 믿음이 성장하면 하겠어요"하고 머뭇거립니다. 사실 몇십년 지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세월에 전도하고 언제 성장해서 나를 닮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인격에 언제 도달하겠습니까? 모세는 뭔가 변화를 기다렸는데 주께서 말씀하신 후에도 여전했습니다. 본래 가진 약점, 허물, 무능, 게으름, 나약 그리고 본래 가졌던 성격 그대로였습니다. 여기에 모세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명령을 받은 후에도 나는 여전합니다. 어떻게 내 모습 이대로 주의 일을 합니까? 마술적이고 기적적인 변화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모세의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을 추측해 봅니다. "하나님, 가라 하시면 가기야 하겠지만 제발 애굽으로만 보내지 마세요. 그곳에서 사람을 죽였고 40년 동안 바로 왕에게서 덕을 입었는데 배신자요,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바로 왕의 궁전을 찾아갑니까?" 차마 이런 말은 못했지만 모세가 사양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 같습니다. "바로의 궁전으로 들어갈 수 없는 지난 날의 내 죄가 있으니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라고 극구 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것을 주시지도 않고, 특별한 변화도 주시지 않고 단지 "너는 이대로 가라." "너는 이 모습 그대로 내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 모습을 잘 알기에 합리적으로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변명하고 사양하는 모세에게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사람의 입을 지운 자가 누구인데 네가 변명을 하느냐?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치리라. 먼저 가라." 미리 한 말을 가르쳐 주시지 않고 가기만 하면 그 현장에서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리라.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능력받아서 일하겠다고 합니다. 능력이 언제 주어집니까? 현장에서 주어집니다. 가야만 능력이 주어지고 일어서야만 힘이 나고 말해야 힘이 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을 기다리다가 세월 다 가고 맙니다. 성령 충만은 바로 환난과 핍박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로 그 현장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말(言)로써 일해야 할 모세에게 왜 말을 잘하게 해주시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음을 잘 보여주는 뜻입니다. 좋은 예로 선교사들을 보면, 많은 선교사들이 타국에 가서 일을 하는데 그 나라 토착어를 잘해야 선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토착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하는 선교사가 선교에 성공하는 확률이 적습니다. 오히려 말을 잘 못하는 선교사가 훌륭히 선교에 성공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목사에게도 같은 사실이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말을 잘하는 목사는 한 교회에 그저 1년 정도 있을 수 있지만 인격이 뒷받침하지 못하면 1년마다 옮겨 다녀야 합니다. 목사도 이렇게 생각하면 말을 잘해야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도 말을 더듬었습니다. 말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고쳐주시지 않고 그대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송할 때에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눅 12:11,12). "먼저 가라. 그러면 그 자리에서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일하는 현장, 그 곳에서 능력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좀더 나아가서 이 뜻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가면 뒷일은 내가 책임진다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대체로 걱정과 근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순종하면 어머니가 책임지고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하면 아버지가 책임을 집니다. 순종형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이 자유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도 안 듣고 부모의 말도 안 듣고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한 사람은 모든 것을 몽땅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자기 운명, 자기 멋대로 한 것이니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이래서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잠이 오지 않고 걱정이 많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 사람은 잘되면 하나님의 일을 좀더 하고, 안되면 하나님 손해보고 알아서 하세요 하니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고 하나님 하라는 대로 한 사람은 평안이 있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순종은 나를 순종케 한 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우리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다 돌려버리고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라! 나머지 책임은 내가 진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런고로 믿고 먼저 가라. 두려워 말라."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지난날 과거 다 부정하고, 믿고, 순종하고 가면 내가 능력을 주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믿음과 진실한 응답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진실한 응답에 능력과 지혜가 동반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말 잘하는 너의 형을 동반자로 주리라." 너 혼자 힘이 들면 필요한 동반자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기능적이었습니다. 말못하면 말하는 자를 줄 것이고, 약하면 강한 자를 줄 것이고, 지혜가 없으면 지혜로운 자를 동반케 할 것이니 가라고 하십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라고 한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아! 네 눈에는 안 보이지만 바알에게 무릎을 끓지 아니한 자가 칠전이 있느니라. 왜 걱정이냐"고 하셨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자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로써 내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내게 주신 말씀에 내가 직선적으로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의 나약함, 부족함, 무능함을 그가 먼저 아십니다. 무슨 말로 변명을 하겠습니까? "너는 이제 가라"가기만 하면 필요한 것을 주시고, 필요한 사람도 주시고, 물질도, 지혜도 다 주십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파송할 때에도 부르시고, 능력을 주시고 그리고 보내셨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았다고 믿고, 가라고 할 때에 가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중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 모세처럼 겸손한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자이기에 평생 보좌에 앉아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60만 대군을 인도한 지도자로 정말 하나님 같은 분이었지만 그는 항상 돌 위에만 앉았습니다. 나는 하나의 심부름꾼이고, 무능한 자이고, 오직 하나님이 쓰실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팡이를 들고 애굽으로 가는 초라한 모세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모습은 양을 칠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세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겉 모양은 똑같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말씀이 함께 하시는 모세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의 말씀에 따라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겸손처럼 강한 능력은 없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는 능력의 사람이 되고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게 됩니다. "모세야 너는 이제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기도 : 아버지 하나님, 나약하고 부끄러운 과거에 시달리고 있고, 내가 실패했던 흔적 때문에 아무 자신도 없고, 어떤 때는 자기를 학대하는 저희들을 이 시간에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실패에, 좌절에, 실의에 빠진 모세를 부르신 주님,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에 직선적으로 응답하며 주의 능력의 사람으로,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여 큰 역사를 이루게 도와 주시옵소서.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 주님의 물음에 대답하게 하시고 또한 가라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게 하사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을 이루도록 항상 은총을 더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