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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31-38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별명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원래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이름은 좋은 뜻으로 불리워진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비웃는, 멸시하는 뜻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이었습니다. 크리스티아누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 그런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전쟁 용어였다고 합니다.
전쟁이 있을 때는 반드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는데 국민의 수가 얼마든지 간에 저 쪽이 아니면 이 쪽입니다. 내 편이 아니면 원수입니다. 이 편에 속한 사람은 살고, 저 편에 속한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 버린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모순이 있고 부조리가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전쟁하는 입장에서는 부득이 이런 양극화 현상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편이냐? 하고 묻습니다. 이 때에 그리스도 편이다.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패거리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운명이 가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게 됩니다. 그 편에 속했으므로 이것이 바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11:26에 보면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이 처음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 들을 수 있는 이름이 성도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무리'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초대교회, 즉 로마 정치하에 있을 때 로마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깨끗하게 살려고 했기 때문에 깨끗한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성도라고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별명입니다.
세 번째로 전해지는 이름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대로 새 술에 취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한 신령한 힘에 끌려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이라고 하게 된 줄로 압니다. 신비하고 종말론적인 공동체가 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제일 흔하게 부르고 자타가 부른 이름이 '제자'라는 이름입니다. 지금 우리는 신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라고 하는 원문의 의미는 오늘날 학생이라는 개념과는 아주 다릅니다.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는, 오늘날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은 학생이 피아노를 배운다면 피아노만 배우면 그만입니다. 선생의 성품이나 가정생활 또는 그 분의 철학을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피아노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에서는 독본이 따로 없으며 그 랍비의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랍비 자신 전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랍비의 인격, 성품, 지식, 신앙 등 전체를 본받고 닮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따르고, 순종하고, 절대 수락하고, 절대 신뢰하고 절대 신앙하는 것이 제자였습니다. 이 뜻의 좋은 격언으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보여주십니다.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기서 말하는 멍에는 죄 짐을 의미하거나 또는 이 어려운 세상에서 사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멍에는 의인의 고난, 즉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일, 내가 지는 십자가, 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뜻입니다. 내 운명과 같이 가면서, 나와 같이 가면서, 나와 같이 보조를 맞추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느 골방에서 명상이나 하며 책이나 참고하면서 예수를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와 함께 가면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 따르면서, 본받으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자 됨의 표식으로는 그리스도와 같음에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좋고, 일부분이라도 좋으니 예수를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서 가장 우등생인 제자는 사도 바울인 것 같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자에서 예수님의 제자 됨을 신비롭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배우고, 알고, 예수를 얻고 예수 안에서 발견되려고 한다는 신비로운 표현을 썼습니다.
배우고, 얻고, 본받고 그리고 그리스도로 발견되려 했던 것입니다. 즉 내가 나를 보아도 그리스도를 보고, 남이 나를 보아도 그리스도로 발견되도록 하기까지 본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처럼 죽어서 그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는 것도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므로 살고 죽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로 발견되는 것이 그의 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의 표식은 오직 사랑에 있다고 했습니다. 해박한 지식이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살고 닮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닮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닌 사랑, 그가 아는 사랑, 그가 행하는 사랑의 질이 그리스도와 같을 때 그 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로써는 사랑할 수 없고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사랑의 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랑을 지녔을 때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사랑의 계시자입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 안에 있고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은사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로 오셨습니다. 이 거룩한 사랑을 계시하면서 다시 그 사랑의 주인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분은 제자들을 통해서 사랑이 증거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 대학 교수가「한국 기독교인의 의식구조」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특별히 사회학적 측면에서 연구 조사한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 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질문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조사를 했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착하다, 선하다, 진실하다, 상냥하다, 친밀감이 간다, 성실하다, 친절하다 등이며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교회에 출석을 강요해서 싫다, 말이 많다, 위선적이다, 잘난 척한다, 자기 도취에 빠져있다. 등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이 많다라는 뜻은 정말 말이 많다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말이 있는 만큼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행위가 있고 말이 많으면 말 많다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행위가 없으면 자연히 말만 남게 되고, 그러니까 말이 많다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원하시는 제자상은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닮은 사랑을 원하고, 나아가서 예수 때문에 있어지는 사랑을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상이며 제자된 증거입니다.
이 세상의 사랑에는 피곤과 실망과 낙심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다면 사랑의 허구 때문입니다. 애당초 사랑을 못 받고 사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속아서, 사랑의 허구 때문에 절망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말해도 피곤치 않고, 사랑의 설명은 아무리 해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이해보다 크고 때로는 생명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내 몸이 죽어 불사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이 사랑을 해야 내 제자인 줄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대단한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은 그러한 그리스도적인 사랑,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의 냄새가 나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보여준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은 뿌리를 알고, 근원을 알고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풋사랑, 몽롱한 사랑, 처세적인 감상적인 사랑 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원을 모르고 하는 것이므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뿌리를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서야 비로소 사랑의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의 낱말은 날마다 늘어만 가는데 살기는 점점 힘들어집니다. 이것은 거짓된 사랑이 난무하여 거짓된 사랑으로 괴롭고 서로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계시자로 오셔서 사랑의 의미를 온 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모르는 자를 사랑했고, 받음 없이 사랑했고, 이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받고 주는 사랑이 아니고 주기만 하는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 주도적인 사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도적인 사랑, 일방적인 사랑, 그리고 창조적인 사랑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흔히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좀 깊이 생각해보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고, 미움받고 미워하고, 원수 갚고 또 원수 갚고 하면 이 악순환은 언제까지 가야 합니까? 이 세상은 계속 원수 갚다가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미움받고도 사랑해야 악순환이 멈출 것입니다.
우리가 내 물건 도적 맞았다고 남의 물건 도적질하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군가가 먼저 사랑해야 하고, 누군가가 먼저 원수를 사랑해야 여기서부터 사랑의 맥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수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을 모르고는 사랑의 의미를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감상이나 기분이나 분위기가 아닙니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으며 사랑한다는 자체가 이유일 뿐입니다. 사랑하고 그 다음에 사랑을 알고 사랑을 실천하고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창조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높은 차원에서는 의롭게 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죄인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에 죄인을 의롭게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죄인으로 영접한 것이 아니고 아들로 영접했습니다. 여러분, 할 말 다하고 남의 아픈 점을 다 찌르고, 따질 것 다 따지고야 남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허구일 뿐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고 사랑하는 자의 어두운 면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그가 의인으로 보이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 교인들을 물리치시고 세리와 창기를 사랑하셨습니다. 의롭게 보고 의롭다 하는 그 사랑 속에만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으로 보고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의를 보고 의롭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면 이 사랑을 대속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하여 의인이 죄인이 됩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의인이 대신 죄인의 값을 치릅니다. 대속적인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내가 쓰고, 상대방의 잘못도 내가 당하고 때로는 누명도 쓰고 손해도 보고 마침내는 대신해서 죽기까지 했습니다. 죄인을 의롭다 하기 위해서 의인이 죄인으로 죽으셨습니다. 의롭게 하시는 사랑이요, 의인으로 대하시는 사랑이요, 대신 죽으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는 기쁨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지는 짐은 언제나 가볍고 특권으로 받아들여지며 이 희생은 고통이 아닙니다. 사랑은 편한 것이며, 즐거운 것이며 자유로운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편하고 사랑하기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여기에는 감사가 있고, 능력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사랑처럼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능력은 없습니다.
사랑은 은사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아니고서는 이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고 은사를 주실 때에만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부부 사랑이건 자식 사랑이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속 배워야 하므로 사랑을 배우는 자가 진정한 제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사랑을 받는 자이므로 나 같은 사랑을 하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즉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격을 낳고 감격은 능력을 낳습니다. 생명을 낳습니다. 사랑은 감동을 줄뿐만 아니라 동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의 화신으로 만들고 고난을 이기는 능력을 만듭니다.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증명서는 오직 하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즉 너는 나의 제자로서 왜 나를 모른다고 했느냐?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뜻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는데도 한 마디도 비판하지 않으시고, 과거도 묻지 않으시고 오직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과거를 묻지 맙시다. 더 이상 비판하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 : 사랑받으면서 사랑을 모르고, 사랑 속에 살면서 사랑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저희들에게 오늘 다시 말씀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사랑해야 할 줄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간구하오니 이제 사랑을 알게 하시며 주의 사랑의 깊은 뜻을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그 사랑 속에서 더욱더 깊은 능력을 체험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사랑으로 살고, 사랑의 능력으로 살고, 사랑의 능력으로 승리의 생활을 하도록 항상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