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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문
일반적으로 공예배에서 사도신조(Apostles'' Creed)는 신앙공동체의 정체성확인과 공적 선언의 차원에서 사용된다. 필자가 세계적인 가난과 굶주림의 문제를 다루는 기독교 단체인 옥스팜(Oxfam)의, 사도신조를 패러디한 모토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We believe in the life before the death. 내세의 영생도 중요한 문제지만, 현세에서의 개개인의 생명의 중요성과 고귀성을 환기시켜주는 가장 훌륭한 모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개념 자체가 그동안 얼마나 등한히 여겨졌던가! 게다가, 우리의 주제(''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노라'')와 관련지어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고백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성도의 교제''(communicatio sanctorum)라고 하면, 교인들 가운데서 무의미하게 암기되고 독백되는 ''거룩한'' 신앙고백의 한 구절 정도로 여기든지, ''공적 광고''를 의미하는 미사여구로 이해하던지, 아니면, 예배가 끝난 후에 적당히 행해지는 <친교시간>이나 성도들간의 <문안인사>를 나누는 것 정도로 여겨지고 있지 않았는가? 이제 필자는 성도의 교제를 다루고 있는, 몇 가지 대표적인 성경본문들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사도신조의 ''성도의 교제''를 암송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행하게 되는 한국교회의 성경적 vision의 회복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1. 창세기에 나타난 복과 분배의 vision(창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함으로써,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네게서 복을 얻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내용이나 관계성의 측면에서 복잡한 양상을 내포한다. 물론 구약의 복(福)과 신약의 복이 얼마나 연속성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당시에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부와 많은 자손들을 포함하는 복을 받은 위대한 민족이 되고 큰 이름의 소유자들이 되어서, 열방백성들에게 복을 분여(分與)하는 일을 맡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약속은 단순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함으로서 얻게되는, 혹은 아무런 수고와 노력 없이 얻어진다는 점에서의) 결과론적으로 이해되었다기보다는 일종의 선언적으로도 그 책임과 의무도 부여받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특별히, 족장사(族長史)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자신들의 생애에 있어서 자기 형제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복을 주는 매개체가 되기보다는, 스스로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하여) 복(특별히 상속권과 물질적인 풍요)을 소유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들간에, 형제간에, 친족간에 투쟁하고 암투하는 모습들만이 비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히려 창세기를 읽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족장들을 통하여 아름답게 성취되는가를 살펴보기보다는,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들의 덧없는 노력들(실수)을 통해서 어떻게 어그러질 뻔했는가를 떨리는 마음으로 살펴보게 되는 것은 심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새천년을 열고있는 한국교회가 아브라함의 복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이며 첫 번째 열쇠가 되지 않을까 한다.
2. 신명기에서의 복과 분배의 vision
신명기를 보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복과 분배의 문제가 더 명확하게 부연되어서 제시된다. 여기서 필자는 분배의 정의(正義)와 사랑의 교제(交際)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주지하다싶이, 그 개념들은 일반적인 ''레위인들과 고아와 과부와 객들''에 대한 배려의 규정들과 특별히 십일조와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의 규정들을 통하여 잘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서는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으로 반드시 출석교회에 바침으로써 목회자들의 급여와 교회건물건축과 유지에만 전적으로 쓰여져야 하는 것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교인들 임의대로 선교단체를 돕거나 다른 (개척)교회를 돕거나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는 성도들의 자유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금지하고 있으며, 어떻게 안식일에 세속적인 일을 하지 않으며, 금전사용을 금하고 공적예배에만 몰두하느냐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노동과 휴식의 참뜻에 대한 연구를 등한히 하고 여전히 부정의(不正義)한 노동과 경제현실을 애써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과연 성경은 한국교회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지지해주는가는 의문이다.
2.1 십일조: 부(富)의 분배와 교제의 매개체(신 12; 14, 26장)
모세오경 내에서의 십일조는 언약공동체내에서 세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레위인들의 생계보조와 가족구성원들(나와 아내와 자녀들, 심지어는 종들까지도)의 축제용과 이웃들(고아와 과부와 객들)의 생계보조.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 전부가 야웨의 언약공동체의 구성원들 모두를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레위인들과 사제들, 나와 아내, 자녀들, 종들, 이웃들[고아와 과부와 객들]). 그러한 면에서 음식으로써의 십일조의 분배와 공유는 구약의 언약공동체 내에서 일종의 상징적, 실제적 은총(복)의 나눔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해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과 사제계급에게도 음식으로서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종''으로써 독점적으로 누릴 수 있는, 치부(致富)의 수단도 영적 우월감의 표현도 아니었다. 오히려 언약공동체내의 동거동락(同居同樂)의, 혹은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신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즉, 하나님의 것(주신 복)을 언약공동체가 함께 나눠먹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거룩한 하나님의 것을 어떠한 용도에서든지 공동체가 나눠서 쓰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성경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가 무시되고 착취되고 버림받을 가능성이 많은 이웃들에 대한 일상적인 배려는 이러한 나눔의 십일조규정을 통하여 더 강조되었으며, 더 나아가 제7년마다 행해지는 빚 면제의 해와 노예해방의 해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바른 십일조규정(14:22-29), 빚 면제규정(15:1-11), 노예해방규정(15:12-18)의 실행이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범사에 복 받는 비결이라는 점이다(14:29; 15:10, 18). 하나님의 복을 주심으로 세 가지 법이 잘 준행될 근거가 될 것이며 또한 세 가지 규정들을 준행함으로써 더 큰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이 명료하게 제시된다.
3. 사도행전의 복과 분배의 vision(행 2:43-47과 4:32-35)
구약의 복과 분배의 문제가 오랫동안 오해되었듯이, 신약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상태였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특별히 사도행전과 바울의 복과 분배의 vision은 항상 혼동되거나 무시되어왔다. 현대적인 적용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의 재물의 공유가 신실한 이스라엘의 표로서 강조되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것은 신자 개개인의 자발성이 강조가 되는 의무사항이긴 하지만, 성령의 부어주심의 결과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보겠다. 구약의 경우에는 십일조와 다른 규정들을 통하여 의무적으로 "일부를 떼어주는 것"과 "자기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구약율법의 완성으로 이해되었고, 신약의 경우에는, 의무보다는 자발성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실천이 강조된다고 하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의 법칙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온 몸을 바치는 자기희생을 하셨다는 면에서 그렇다.
초대신앙공동체의 공유의 정신은 누가의 "공산당선언(communist manifestation)"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주장은 초대신앙공동체의 성령충만한 흥분상태의 결과도, 혹은 임박한 종말을 대비하여 모든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치고 집단생활을 하라는 이단종파의 주장도 아니다. "이상하게도" 예수의 부활의 증거가, 자발적인 헌신의 표로써,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과 성도간에 행해진, 즉 부유한 성도가 가난한 성도를 돕는, 물질적 교제(코이노니아)가 원활해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의 재정관리의 예는 이미 쿰란 공동체에서도 발견되며 헌금의 출연(出捐)과 분배(分配)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약시대의 공동체의 특징이기는 했지만, 그들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공동체의 정신은 사도들과 그를 따르던 헌신적인 제자들에게서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교회)에게 확대되었던 것뿐이었다. 이들은 사도들의 교훈(디다케)과 교제(코이노니아)와 주의 만찬과 기도에 전념하였다. 아마도 당시에는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떡을 떼고 교제를 나누었으며,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서 공적 예배와 증거를 위하여 정규적으로 모였던 것 같다. 그 결과가 "물건의 공유와 분배"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혼돈과 우려가 많은데, 간략하게만, 그 상황과 의미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신약의 초기신앙공동체는 각자의 재산의 (법적) 소유권은 인정되데, 모든 소유의 (실제적인) 공유권을 주장하였다는 의미며, 자발적으로 반복적으로 필요가 생길 때마다 재산을 팔고 나누었다.
4.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복과 분배의 vision(고전 16:1-4; 고후 8-9장; 롬 15:25)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다(출 16:18).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해주십시오. 매주 첫날에 여러분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집에서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허겁지겁) 연보를 하지 않게 하십시오(고전 16:1-2).
여기서 우리는 고후 8-9장(고전 16:1-4; cf. 롬 15:25)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성도간의 나눔(유대계 기독교인 공동체들과 이방인출신의 기독교인 공동체들 간의)이 일회적인 사건이었다는 점과, 예루살렘 공동체의 기둥들과의 합의사항의 실천이라는 점(갈 2:9-10)과, 종말론적인 측면에서의 교제의 나눔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공간적 한계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눔의 정신은 바울신학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것은 구약의 정신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고후 9:12)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사도 바울의 나눔과 구제의 정신은 반드시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에만 의존했다거나 반드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어떻게 그가 이러한 개념을 얻게 되었는가는 알기 어렵지만, 바울에게는 가난에 처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재정적으로 돕는 이 봉사(디아코니아스)의 나눔(코이노니안)이라는 권리(카린)를 갖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러한 특권(카리스)은 하나님의 특권을 본받음이며 이러한 가난해짐은 그리스도의 가난해짐을 본받음이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공유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디아코니아는 영적인 섬김(spiritual ministry)이지만, 동시에 물질적인 섬김(material-sharing ministry), 그리고 하나님께와 성도에 대한 섬김(혹은 사역)을 의미한다.
4.1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바울과 헌금, 성도를 섬기는 것(고후 8:1-15; 9:1-15)
아마도 고후 8-9장에 깔려져 있는 고린도 신앙공동체의 정서는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바울의 사도직과 관련된 재정적인 문제와 의혹(疑惑)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성도를 섬기는 헌금에 대해서, 디도에게서 받은 헌금의 진척상황은 썩 낙관적이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이 고린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헌금을 마무리짓도록 강권(强勸)하기도 그렇고 자발적인 마음에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난한 마케도니아교인들은 이미 과도한 헌금을 낸 상태고 부유한 고린도의 신앙공동체들은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상태이며, 곧 디도와 다른 사람들이 헌금을 수금(收金)하러 가게 될텐데.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인가? 그 이유로 해서 저술된 것이 고린도후서 8-9장이지만, 바울의 논조는 권면(advice)이지, 명령(command)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작한 모금을 종결지으라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헌금은 재산상의 불이익이 아니라,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섬김/교제의 헌금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닮은 성도들의 은혜의 소산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성도를 "섬기는" 헌금의 예에서 우리는 현대한국교회에게 주는 성경적 헌금관과 섬김에 대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신약의 신앙공동체에서의 실제적인 헌금모금과 사용의 예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고후 9장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공동체들에도 (예루살렘 신앙공동체의) 성도를 위한 연보(로게이아)를 요청하였으며 고린도 교회공동체에게도 매주 첫날에 각자가 자기 집에 헌금을 적립해 두라고 권면하며 이러한 고린도의 신앙공동체의 ''은혜(관대함, 카리스)''를 예루살렘에까지 나눌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한다(고전 16:1-4). 여기서의 우리의 관심사는 모든 사람이 수입의 일정한 양을 반드시 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십일조에 대한 암시거나 그 연속성의 일환으로 볼 수 없다. 일주일동안에 하나님이 소득을 얻게 하시면 원하는 대로 각자가 알아서 헌금을 모아두라는 교훈일 뿐이다. 이 일에 대한 언급은 롬 15:25-27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역(세번째 선교여행)의 완수(完遂)가 지연되고 있어서 가보고 싶지만 로마에 가는 날이 지연되고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그의 유럽선교사역보다도 더 귀중하고 더 시급히 마쳐야 했던, 그의 사역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구제/교제의 섬김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섬기는 것(디아코논, 25절)과 기여(코이노니아, 26절)와 물질적인 축복(코이노네인, 27절), 섬기는 것(레이투르게사이, 27절)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바울이 구제/교제금을 갖고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일을 섬김, 혹은 사역 그리고 교제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째서 이들은 정성껏 혹은 열심히, 혹은 분에 넘치게 헌금을 하는 것을 즐거워했을까?"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자발적으로 헌신적으로 하는, 또한 (영적인 것[프뉴마티고이스]을 이미 나눠 갖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하는, 성도간의 섬김이며 교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사도 바울이 행함과 설득의 예로서 성도들에게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중요한 사역(섬김)이 끝나야 바울은 로마로 가서 기독교인들과 신령한 복을 나눠 가질 수 있을 것이다(롬 1:11).
경우는 다를 수 있겠지만, 바울이 사도들을 만났을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는 사도들의 권면에 대해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은 유대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며 의무였던 것처럼, 바울도 그런 일에 열심히 행하던 자였다고 주장했던 점이나(갈 2:10; 행 11:27-30) 다른 곳에서의 그의 주장들을 종합해보면,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 외에도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이러한 주장은 바울 자신의 저작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누가의 사도행전에서도 그의 섬김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공동체(교회)를 이방인교회들이 돕는 것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성도를 섬기는 헌금의 발단은 바나바와 바울이 다소(Tarsus)에서 만나 안디옥에서 일년간의 사역을 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온 선지자들 중에서 아가보라는 사람이 유대지방에 큰 흉년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 그 예언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유대지방에 사는 형제들에게 능력이 되는 한도에서 부조금(디아코니아)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돈을 모아서 바나바와 사울을 통하여 유대지방의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행 11:27-30). 이 부분은 성도의 구제(혹은 교제)에 관한 바울의 교훈들 중의 하나다. 바울에게 있어서 섬김의 헌금은 자발적인, 자유의지(freewill)에 의한 것이었으며, 소유를 비강제적으로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말 그대로 "공유"했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발적인 나눔은 그가 하나님의 소유를 지혜롭게 쓰도록 위임을 받은 ''선한 청지기''라는 정신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강제에 의한 일정분량의 십일조가 아니라, 신약의 공동체는 자발적이고 온 재산과 온 몸을 헌신하고 나눌 수 있는 성령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본 구절은 일부 사람들이 ''교회에 힘에 버거운 과도한 헌금을 내야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교회에 적게 헌금(혹은 십일조)을 내면, 작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증거구절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들을 열심히 도우라는 권면의 말이었다는 말이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돕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돕는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이, 그리고 복(연보)을 나누어야 한다는 말은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이상한 소식(strange news)에 불과하다.
결론: 한국교회에서의 복과 분배의 vision
내가 확언하여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너는 세상재물로 부자(富者)인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교훈하라: "돈 때문에 자만하지 말고 정결하지 않은 재물에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부자들은 선한 일을 하고 선행하는데 부자가 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고 항상 기꺼이 공유하는 자가 되라." 이것이 참된 생명만을 소유하기 원하는 자들이 미래를 위하여 선한 재화를 모을 수 있는 방법이다(딤전 6:17-19).
이제까지 우리는 성경에서 부의 분배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고 다루어졌는가를 살펴보아다. 우리가 신구약의 복와 분배의 vision을 한국교회에 적용하려고 할 때 몇 가지 고려사항들을 필자의 결론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5.1 무엇이 잘못인가?
우리의 실정에서 하루에 수천 명이 지속적으로 한 교회에 등록하는 현상이 벌어진다면,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무엇일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새성전 건립''일 것이다. 아니, 교회성장의 황금어장인 신도시에서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새성전 건축''이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던 초대신앙공동체에서는 ''새성전 건축''을 위한 작정헌금도 부흥회도 없었고, 사도들의 의식주의 혁명적인 변화(예, 자동차나 아파트나 월급)도 부흥성장의 주역들이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칭송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성도간에 교제하는 일이 더 활발해지고 활성화되었다는 이야기만이 전해진다. 물론 한국교회의 단기간 내의 급속한 교회부흥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지만, 이러한 부흥발전에 대한 이해와 과정이 성경의 경우와 너무나 다르다는 점에서 우리는 놀라와 해야한다. 이들은 계속해서 (우리처럼) 선교하고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의 수가 증가되는 일에 노력하였지만, 우리처럼 재정을 무작정 늘려 잡고 건물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몰두하고 경상비와 인건비에 쏟아 붇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교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을 구별하거나 구제하는 일이 교회의 의무인가 아닌가를 토론하거나 의심하지도 않았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부유하면 좋겠지만, 돈이 남아돌거나 잘못 쓰여져서는 안된다.
5.2 누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필자는, 주체가 개인이든지, 아니면 교회라고 하는 집단이든지, 불필요하게 주도권의 문제로 혹은 대상이나 방법론에 대해서 다툴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본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이나 구제/교제하는 일은 신앙인의 본분들 중의 하나다.
5.3 얼마만큼 행해야 하는가?
필자가 보기엔, 경상비와 인건비는 불요불급한 것만을 최소한도 경제적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구제/교제하는 일에 전적으로 사용해야한다고 본다. 우리는 교회재정에 대한 패러다임을 성경적으로 전환하고 우리의 시야와 관심사를 그러한 쪽으로 돌려야 하며, 성도들과 교회들과 이웃들의 아픔과 필요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5.4 교회는 어떻게 구제/교제의 재정을 충당할 것인가?
헌금은 헌신과 자발성에서 비롯된다(고후 8:3-5). 바울은 헌금자들이 얼마를 바쳤는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한 무관심은 그의 열정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는 헌금자 명단이나 명세표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칙론을 강조했을 뿐이다. 이러한 교제의 헌금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신을 비우고 가난해짐으로 가능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바울은 자발성과 은혜로 헌금하기를 권면(勸勉)하고 있지, 축복의 대가로서 그들에게 헌금이나 헌신을 강요(强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구제의 헌금은 자원과 즐거움과 감사와 교제와 자비의 목적을 모두 내포하고 있어야 하지, 신앙생활의 절대적인 외적표현이거나 구원의 조건이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에서 심중에서 의와 믿음과 사랑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성경과 성령, 그리고 양심의 조명(照明)에 따라 헌금과 마음을 내어 곤경에 빠진 형제들과 이웃들을 구제하고 도와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절대로 정죄 되거나 비난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우선적으로 바른 헌금이 되려면, 바른 직업관이 우선해야 한다. 내 직업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신성한 노동윤리 가운데서 내가 정당하게 일하고 그에 대한 바른 대가를 받았는가? 그 후에야 비로소 재물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쓸 것인가를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여러 가지 절기, 목적헌금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사업상의 불균형과 차별,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불신과 불평과 비난이 많아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든지, 죄(사회의 제도적 불의이든 개인의 탐욕과 악행이든지)를 짓지 말고 그 죄를 미워하고 싸우는 것과 억눌리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라는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었던가? 당신은 ''성도의 교제''를 믿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