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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정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는 것이다.
◈ 세상에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이 있다.
◈ 우리는 이 진리를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다.
◈ 이 사람들은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며, 그것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인정하는 것이다.
◈ 먼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야 한다.
◈ 우리는 그 진리를 개인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 자기가 목회하는 사람들을 잘 알아서 그들의 필요에 맞게 그 진리를 보다 잘 적용해 줄 수 있어야 한다.
◈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열심히 익혀야 한다.
◈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진리를 아는 것에 자라서 자신의 사역에 깊이와 효과가 더해지도록 해야 한다.
2. 설교자도 메시지의 일부분이다.
필립스 브룩스는 설교를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제시"〔『설교학 강의』(Lectures on Preaching), p.5 〕라고 정의했다. 설교자는 소식을 알리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증인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께서 인격을 매개체로 하여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신다는 증거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설교자가 성장함에 따라 메시지가 성장하고, 교회도 성장한다. 설교의 배후에 있는 말씀의 권위만 가지고는 안 된다. 말씀의 권위 아래 사는 삶이 어떤 능력을 지니는지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에게 새로운 믿음의 교훈들을 가르치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백성을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가 마음으로 고심하는 이유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개인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꿔 나가야 한다. 강단은 축복을 빌려다 쓰는 장소가 아니다.
축복이 신선하고 흥미진진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솟아 나오는 축복이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설교뿐 아니라 설교자도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둘은 병행되어야 한다. 자기 존재의 영역, 즉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모든 면에 있어서 설교자는 생명의 메시지를 담고 나눌 수 있는 준비된 그릇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결합시켜 놓은 것을 설교자가 나누지 말도록 하자.
3. 설교는 예배의 행위이다.
예배의 행위가 되지 않는 설교는 하나님이 아닌 설교 자체나 설교자에게 주의를 집중하게 할 것이다. 설교가 예배의 행위가 아닐 때에는, 회중이 하나님이 아닌 설교자에게 예배할 위험이 있다.
설교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들은 보다 깊이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제단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일과 똑같이 생각했다.
". . . .이방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설교하는 것도 하나의 예배행위임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최선을 드리고 싶어할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의 명예를 구하거나 자기의 학식과 총명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것이다. 그런 설교는 예배의 전체적인 흐름에 들어맞아서 그 예배의 모든 순서는 다 구세주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다.
필립스 브룩스는 말했다. "만약 설교를 예배와 별개로 생각한다면, 설교다운 설교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와 기도와 찬양이 수반되는 예배는 설교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4. 설교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의도와 내용이 모두 있어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단순히 어떤 주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다. 참된 설교는 주제를 설명하는 일뿐만 아니라 적용하는 일도 한다. 설교자는 단순히 지성(mind)을 교훈 하는 것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감정(emotion)도 흔들어 놓아야 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개인적으로 적용하려는 의지(will)를 갖게 하는 일도 해야 한다.
설계 도면이 그려진 청사진이 건물이 아니고, 조리법이 식사가 아닌 것처럼, 설교의 개요가 곧 메시지일 수는 없다.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에 대한 강의가 아니라 약이다.
설교의 목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는 내용
⊙ 회중의 특정한 필요
⊙ 목사의 마음 속에 있는 특별한 부담감
⊙ 목사가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것
목사의 의도(intent)와 성경의 내용(content)응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캠벨몰간(G. Cambell Morgan)은 자기가 들은 어떤 설교에 대해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나는 내가 전혀 찬성할 수 없는 공허한 설교를 들었다. 설교본문은 주제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몰간의 시대에도 소위 상황(contex)과 성경 본문(text)이 따로 노는 때가 많았다.
5. 설교의 의도는 분명해야 한다.
비행사가 자기가 어느 공항을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순풍을 만나도 별로 도움을 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자신의 메시지에서 성취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어떤 예배를 드려도 좋은 예배라고 할 수 없다. 각 설교마다 특정한 목표를 설정하라.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회중에세 꼭 말해 주라.
존 왓슨(John Watson)은 말했다. "설교는 백과 사전이 아니라 모노그래프(monograph: 특정한 단일 소분야를 주제로 하는 연구 논문 - 역자주)이어야 한다. 단추에서부터 관(棺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구입할 수 있는 잡화상이 아니라 한 가지 상품을 파는 전문 대리점이어야 한다"
만일 설교자가 마음의 수고와 실제적인 준비를 다 했다면, 자신의 메시지가 말하려는 바와 성취하려는 바를 정확하게 한 문장으로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존 헨리 죠윗(Jhon Henry Jowett)은 말했다. "설교의 주제를 짧고 함축성 있는 한문장으로 수정과 같이 많게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는 설교할 순비가 된 것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설교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 한 문장을 설교의 명제, 주제 문장, "큰 개념"(big idea)등 각각 다른 용어로 부른다. 설교에 있어서 이 문장은 인체 골격의 척추, 또는 가옥의 터와 같다. 그 문장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서 최종적인 생산물이 무엇이 될는지 결정해 준다.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
⊙ 성경적이어야 하며, 설교할 가치가 있는 불변의 진리이어야 한다.
⊙ 회중의 필요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하고도 관련성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 명확하고 분명해야 하며, 추상적인 언어나 문학적인 수식으로 요점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 적확하고 정직해야 하며 설교자가 제시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마천루를 지을 기초를 닦아 두고 그 위에 닭장을 짓지 말라.
⊙ 설교의 주제가 전개됨에 따라 중들에게 더욱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어야 한다.
⊙ 하나님께서 수십세기 전에 모세를 위해 하신 일이 아니라 오늘 날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통상 현재 시제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도와 주셨습니다."라는 것도 타당한 말이지만, 설교의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구세주는 당신 삶의 풍랑 속에 함께 하셔서 도와 주십니다."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
6. 설교는 조직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혼돈케 하시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혼란스럽게 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회중이 설교 개요의 각 대지(大旨)나 소지(小旨)를 파악했는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설교자는 자기가 가고 있는 방향과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일단 주제가 발표되면, 흥미롭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재료를 발전(development)시켜야 한다.
설교의 개요는 대개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 서론
⊙ 목적을 진술[명제, "큰 개념"(big idea)
⊙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대지 (main points)
⊙ 결론
화가는 보다 사실적인 인물을 그리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한다. 설교의 개요는 인체에 비유하자면 골격에 해당한다. 명백하지 않더라도 개요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좋다.
설교의 구조는 주로 성경 본문의 내용 전개에 따라 달라진다. 개요를 먼저 작성해 놓고 그것을 억지로 본문에 맞추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구조는 진술한 목적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앞에서 제시한 예들 가운데서 이런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설교에는 세 개의 대지가 있는데 각각은 "하나의 결론"이 된다. 무디의 설교는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들"을 도입함으로써 여러 대지를 포함하게 된다. 웨더헤드의 설교에는 네개의 대지가 있는데 각각은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가 된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구조는 목회자의 전반적인 "설교패턴"을 고려해야 한다. 설교패턴은 늘 다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순회 설교자는 설교 때마다 회중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번 똑같은 설교학적 접근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나, 한 곳에 주재하는 목회자는 매주 같은 회중에게 설교하므로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이유들"이나 "결론" 또는 "교훈들"이란 말을 주일마다 상용하면 설교를 예측할 수 있게 되어 메시지의 힘이 약해진다.
설교마다 자신의 독특한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나름대로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초보자는 자신의 독특한 방법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기 전까지는 설교학적 법칙들(the homilectical rules) 의 통제에 잘 때라야 한다. 일단 그 법칙들이 당신을 다스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당신이 그 법칙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설교의 조직화(organization)는 부수적인 것이어야지 주가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건축가와 마찬가지로 형식과 기능 사이(form vs. function)의 긴장속에서 고심하며 살아야 한다. "개요가 참 좋군요 !"라는 말은 설교자가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이 아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한 층 좋은 말은, "당신이 오늘 우리에게 주님을 보여주셔서, 그 분이 우리의 필
요를 채워주셨습니다."라는 말이다.
7. 본문의 독특한 점 위에 개요를 작성하라.
시편 말씀들은 시련(trust), 신뢰(trust), 승리(triumph)의 세 가지 대지로 개요가 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적들은 어려움, 믿음, 승리의 순서를 따른다. 바울의 여러 훈계 속에는 교리, 의무, 그에 따르는 축복이라는 형식이 반복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 본문이나 사건의 특징을 모사 할 뿐이고 해석이나 적용에는 도움이 안된다.
즉 그런 방식은 본문을 분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것을 설교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경의 거의 모든 본문은 배경, 말씀, 의미, 생활 속에 적용하는 문제 증의 네 개의 대지로 된 "개요"로 만들어 설교할 수 있다. 그 네 가지는 본문을 분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고 독특한 점을 찾아내도록 해 주지만, 석교의 개요로서는 빈약하다.
8. 구체적으로 하라.
광고업자의 성패(成敗)는 번뜩이는 보편성에 달려 있지만, 복음을 설교하는 자의 말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정밀한 것에는 힘과 권위가 있다.
설교의 명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 본문에는 우리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여러 가지 있습니다"와 같은 종류의 설교평은 설교자라면 모두 피해야 한다. 사실 "것들"(things)이란 말은 모호하므로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어떤 종류의 "것들"이란 말인가? 경고들? 장애물들? 권고들? 그렇다면 그런 말들을 쓰라
"진리들", "교훈들" "개념들"이란 말도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주의 깊은 설교자라면 자기가 갖고 있는 사전, 특히 동의어 사전을 활용할 것이며, 마구잡이 어휘와 적합한 어휘는 번갯불과 반딧불만큼 차이가 난다고 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금언을 유념할 것이다. 체스터튼(Chesterton)도 똑같은 말을 했다. "사람은 자기가 말하지 않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알 때에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어휘를 보라. 결과(results)와 결말(consequences), 곤란(difficulties)과 궁지(dilemma), 통일성(unity)과 획일성(uniformity), 처벌(punishmanet)과 연단(disciple)등. 유능한 말씀 사역자는 장인(匠人)이 연장을 다루듯이 어휘들을 사용한다. 즉 그 작업에 맞는 도구(말)를 쓴다.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전 12:10).
인명(人名)과 날짜와 숫자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연구를 통해서 정확한 숫자를 얻어내라. 상세하게 날짜를 대는 것이 "몇 년 전쯤에"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있으며, 상세한 숫자가 "이백여 명이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의미를 지닌다.
성경 구절을 언급하거나 인용할 때에도 구체적으로 하라. 그리고 개요를 완성시키기 전에 꼭 참조 구절을 모두 찾아 확인하라. 성구 사전에도 인쇄 과정의 실수가 있을 수 있는데 설교집은 흔히 그것을 그대로 옮겨 싣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설교는 분명한 사고(思考)로부터 시작된다. 본문과 본문의 목적과 메시지의 전개를 철저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 몽롱한 사고를 피하고 모든 것을 정밀하게 하려는 목표를 지니라.
9. 명백한 사실이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지 말라
사람들은 명백한 것을 자세히 논하면, 따분해하며,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하면 짜증스러워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신비적인 것도 있으며, 인생이나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순된 말을 하시지 않지만, 그분의 방법과 다르기 때문에 항상 그 분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 내용이 철저한 설교를 허용하지 않을 때에, 암시적으로만 설교할 줄 아는 설교자는 현명한 설교자이다.
동시에,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영적인 지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본문을 설명하는 게 회중에게 역사적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거든 간단하고 빠르게 윤곽만 이야기해 주라. 그렇게 하면 설교의 흐름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을 주는 셈이 될 것이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하거나, 명백한 것을 예화를 들어가면서 자세히 논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들은 "언제나 정직하십시오.!"라는 한 설교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정직하십시오. 그 분들은 당신을 세상에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형제와 자매들에게도 정직하십시오. 당신은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에게도 정직하십시오. 동료들에게 정직하십시오. 그리고 이웃들에게 정직하십시오. 집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동네에서,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정직하십시오."라고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는 그가 그 다음 할말을 잊어버리고 그 위기를 모면할 길을 찾느라 따분한 반복을 계속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 어떤 목사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라는 야고보서 3장 8절 말씀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년시절, 서커스를 보러 가서 길들여진 동물들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에는 길들여진 호랑이들이 있었고, 길들여진 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들과 사자들은 의자위로 뛰어 올랐으며, 불붙은 테를 점프해 지나갔고, 총을 차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길들여진 코끼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짐승들이 앞서 가는 것의 꼬리를 붙잡고 줄지어 걸어가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코끼리들은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대들이 길들여진 개들과 함께 나왔는데 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그 개들은 뒷발로 걷고, 곡예사처럼 줄을 타며, 함께 춤을 추기까지 했습니다. 개들은 길들려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자기 회중을 너무 따분하게 만들어 놓아서 회중이 더 이상 그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복하다보니 잔소리가 된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듣는 것보다 더 지루한 것이 있을까?" 라고 『오딧세이』(Odysey)에서 호머(Homer)는 말했다. 말할 때마다 새롭게 들리도록 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의 말을 두 번 듣는 것을 결코 개의치 않을 것이다.
10. 본문이 말하고 있는 범위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내에서 설교하라.
성도들은 사람이라서 아무리 좋은 진리라도 한 번에 소화할 수 있는 일정한 양이 있다. 회중의 규모가 커질수록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각 사람의 필요와 수준은 더 다양해진다. 메시지를 준비할 때는, 회중을 "대표하는 사람들"즉, 불안한 십대, 젊은 부부, 외로운 과부, 실직한 가장을 마음 속에 생생히 그려 보라. 그리고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준비하라.
선포할 진리는 각 본문에 담긴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부가적인 개념을 갖기 위해 본문 외에도 성경을 온통 다 추적해 볼 필요는 A다. 그렇게 허둥지둥 설교할 필요가 있는 경우라면, 아마도 당신이 정한 본문은 너무 F아 잡아늘여야 할 것이다.
훌륭한 설교자라면 쓰레기통을 가지고서도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훌륭한 설교자는 설교가 기괴한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골라낸 개념을 모두 메시지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이 작성한 명제 문장이 분명하고 정확하다면, 어떤 개념을 다음 기회에 쓰려고 떼어놓아야 할 지 알게 될 것이다.
엄청난 설교 재료에 파묻혀서 그것을 생활 속에서 나타내지 않는 것보다는 내용이 충실한 진리 한두 개를 확실히 붙잡고 그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모든 준비를 끝낸 다음 설교자는 능숙한 저술가와 편집인이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즉 설교 자료를 보면서,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이 설교를 할 때에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라고 자문해보아야 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이 분명하지 않다면, 처음부터 시작하라. 당신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기 때문에 설교하는가, 아니면 무언가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설교하는가!
11. 설교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라
공중 사역을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일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가 늦게 시작될 수도 있고, 설교 전 순서에 걸리는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고, 혹은 즉석에서 광고해야 할 것이 생기기도 한다.
또 방문해서 설교할 때에는 시간 계획에 전혀 간섭할 수가 없다. 어쨌든 이러한 한두 가지 이류로 설교시간은 대개 한정되어 있다. 당신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는가? 당신 측에서 불평하지는 말라. 훌륭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만 한다면, 설교자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고 오히려 회중들이 불평할 것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하고 싶은 이야기 따위는 꺼내지도 말라. 그런 것은 시간만 낭비하게 될 뿐이다 !
메시지를 준비할 때에는 하루 종일을 당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처럼 몰두하라. 그렇지만 설교할 때에는, 비교적 덜 중요한 항목들은 포기하고 중요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라. 메시지가 잘 준비되기만 했다면, 그렇게 한다 해도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설교가 불멸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 끝없이 설교할 필요는 없다. 사랑으로써 말씀을 섬길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라. 기억하라. 산상수훈 전체를 큰 소리로 읽는 데에는 10분도 안 걸린다는 것을.
12. 감명을 주기 위한 설교가 아니라 표현하기 위한 설교를 하라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설교의 목적을 두는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술이나 웅변술을 과시하기 위해 강단을 이용하는 무례한 도적이다.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설교자는 쇠해야 하고 구세주는 흥해야 한다(요 3:30). 전해지는 말씀은 예수님이고, 설교자는 그것을 전하는 목소리에 불과하다.
"저런 설교는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설교에는 단순성이 있어야 한다. 참된 기술은 늘 그 모습을 숨긴다.
"당신의 설교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설교하라"는 죠오지 모리슨(George H. Morrison)의 말은 정말 옳다. "위대한 설교"를 준비하려고 애쓰지 말고, 위대하신 구세주를 드높이려고 애쓰라. 항상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높은 목표를 갖되, "위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는 자유로워지라.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대개 우리와는 다른다.
신학용어를 사용할 때에 반드시 분명한 설명을 덧붙이도록 하라. 단순한 단어가 전문용어보다 낫고, 구체적인 말이 추상적인 것보다 낫다. 심오한 것은 복잡한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단순한 것에서 나온다.
13. 심층(深層)을 설교하라
첫째, 본문의 심층을 설교함으로써 시작하라. 본문의 말들을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는 것과 그 말들 속의 진리를 설교하는 것과는 다르다. 스펄젼은 자신이 "본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곤 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참 좋은 생각이다.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보라.
●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 (사실, 정보)
● 본문은 무슨 뜻인가 ? (진리, 해석)
● 본문은 「나에게」어떤 의미가 있는가 ? (깨달음과 적용)
●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구상, 조직)
둘째, 청중의 마음 심층에 이르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성령께서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적용시키고 사람들이 그것에 어떤 반응을 보일 때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말라. 그 반응은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바울이 회당에서 메시지를 전할 때, 회심한 사람도 있었지만 비웃거나 대적한 사람도 있었다.
셋째, 당신 자신의 심층에서 설교하고 메시지가 당신 안에 깊이 와 닿도록 하라. 목수가 여기저기에서 나무 조각들을 주워 모아 못을 박아 테이블을 만드는 식으로 "설교를 조립"하지 말라. 메시지는 살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메시지는 당신 마음의 토양에서 자라 나온 것이어야 하며, 당신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스스로의 연구에 뿌리를 둔 것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서 조각이나 부스러기들을 만든 설교는 대개 경작된 것이 아니라 가공된 것처럼 들린다. 그런 것은 말로 들려주는 수필이지, 강력한 메시지가 아니며, 헌신된 인격을 통하여 전달되는 진리도 아니다.
"교회가 설교자들의 마음 속 깊은 속에서부터 설교하는 것이 되지 않고 얕은 곳에서 설교하는 장소가 되는 것을 나는 가끔 두려워 한다."〔프레데릭 뷔휘너(Frederick Buechner)『기억이라는 방』(Harper & Row, 1984, P.123)〕.
14. 당신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그분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방식으로 제시하라는 뜻이다.
표절은 가장 저질적인 도적 행위이며, 가장 고차원적인 빈말이라고 정의된다. 딘 잉게(Dean Inge)는 독창성을 "틀리지 않은 표절"이라고 한다. 충실한 설교자는 여러 젖소에러 우유를 짜내지만 그 자신 특유의 버터를 만들어 낸다. "아담은 자기가 훌륭한 말을 할 때에, 자기보다 앞서서 그 말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다"라는 마
크 트웨인의 말이 맞다.
설교내용 가운데에 당신이 연구 중에 뽑은 진리나 개념이 나올 때마다 그 참고 문헌을 명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설교 개요를 이용할 때는, 그의 공로를 밝히라. 특별히 좋은 말을 인용할 때는 문헌을 명시하라. 정직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며, 회중 가운데 누가 똑같은 책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자료를 훔치는 것이 잘못이라면 그의 방법과 스타일을 흉내내는 것도 잘못이다. "스타일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말은 사실이다. 당신 자신 - 최선의 자신 - 답게 하라. 그래서 성경으로 하여금 당신 삶을 메시지 위에 새겨 주시게 하라.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듣고 감동했다면, 그것이 자신의 마음과 가슴속에 스며들어 당신 자신의 것이 되게 하고 바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도록 하라. 부수적인 것말고 본질적인 것을 붙 잡으라.
당신 자신답게 하라.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 하라. 그것이 가장 훌륭한 독창성이다.
15. 다양성과 균형을 위해 힘쓰라
항상 똑같으면 따분해진다. 결론을 예측할 수 있는 설교는 힘있는 설교가 아니다.
우선 주제들을 다양하게 해야 하며, 특정한 주제를 "애용하는 습관"를 제거하려고 힘써야 한다. 성경 전체를 강해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균현 잡힌 식사를 제공한다. 명제가 되는 문장을 다양화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형식들 중의 하나를 취할 수 있다.
● 평서문 : "성령께서 신자를 도우십니다."
● 명령문 : "신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 의문문 : "우리는 어떻게 성령 충만할 수 있을까요?"
● 권고문 : "계속 기도를 하십시오 !"
● 감탄문 : "천국의 기쁨을 생각만이라도 해 보십시오."
● 정의문 : "믿음은 궤계 없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메시지의 전개를 다양하게 하라. 개요를 본문에 맞게 작성 했다면, 메시지는 본문의 형태대로 전개될 것이다. 설교가 모두 논증의 형식을 취할 필요는 없다. 본문 자체가 논증일 경우에는 설교도 논증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상상력이 풍부한 설교자는 다른 방식으로도 다룰 수 있겠지만.)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는 사도행전 22장의 바울의 변론과는
문학 장르가 다르다. 주의 깊게 준비된 설교는 본문 안에서 발견된 자료의 형식을 잘 반영한다.
설교의 목적을 다양하게 하라. 물론 각 설교마다 잃어버린 사람을 건져내고, 구원받은 사람은 격려하며, 넘어진 사람을 세워주는 등의「일반적인」 목적이 있지만 구체적인 목표는 주마다 달라져야 한다. 설교자가 본문 설명에 충실하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선입관념에 근거하여 작성한 개요를 본문에 억지로 끼어 맞추는 설교자는 균형 잡혀 있고 다양성 있는 사
역을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본문 구절이 회중들에게 스스로 말하게끔 만드는 설교자는 성령께서 얼마나 다양한 내용을 성공에 기록하였는가에 놀랄 것이다.
16. 계획을 세워서 설교하라.
스펄젼은 주일 아침 설교는 토요일 저녁에, 주일 설교는 주일 오후에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펄젼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매 주마다 자기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안다면 연구 시간을 대개 더 잘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영이 마음 속에 "파고들어" 특별한 메시지를 주기 원하신다면, 그 분은 자유로이 그렇게 하실 수 있으며,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각 설교가 본문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연속되는 설교는 교회의 상황과 교회에 대한 당신의 사역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설교자의 영적 생활과 성경지식이 자라고 있고, 하나님과 교인들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계획하는 일에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들의 자문을 구할 수도 있다. 이론상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피상적인 연속 설교는 피하라. 말씀으로부터 취한 실속 있는 영양분을 가지고 회중의 식단을 짜라.
년중 설교 계획은 아마 다음과 같은 분기별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노동절(9월 첫째 월요일)에서 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까지
◐ 강림절(크리스마스 전의 약 4주간)
◐ 신정에서 성회일(聖灰日:사순절의 첫날)까지
◐ 사순절(상회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40일간)
◐ 부활절에서 오순절까지
◐ 여름 사역
설교계획을 세우는 데에 교회 절기를 지킬 필요는 없다. 이런 것은 단지 설교 계획을 위해 사용될 수 잇는 "시간 구분"으로 제시했을 뿐이다. 엔드류 블랙우드는 매 해의 절기마다 설교의 강조점을 달리할 것을 제안했다.
◑ 9월에서 크리스마스까지 - 단순하게 묶음
◑ 1월에서 부활절가지 - 보강시켜 줌
◑ 부활절에서 오순절까지 - 가르침
◑ 오순절 이후 - 격려
물론 이런 것들은 포괄적인 계획이다. 거의 모든 설교마다 사역의 이 네 가지 요소가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연속 설교는 항상 계획을 먼저 세운 다음에 발표하고, 계획대로 설교하기 시작하라. 이 말은 각 메시지가 모두 어떤 최종적인 형태를 띠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설교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며 기도하고, 메시지의 대강 윤곽을 잡으며, 자신의 방법에 확신을 가지라는 말이다. 계획대로 설교하다가 생각대로 되지 않아 당황하다가 "자기 방법을 고압적으로 밀어붙이든지" 그만두어야 했던 설교자들이 많다. 우리는 망루를 세우는 사람이나, 전쟁터에 나가는 왕과 같이, 시작하기 전에 자기가 가진 자원의 목록을 검토해 보는 것이 좋다.
17. 연속설교에 포함된 설교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관련이 있어야 한다.
각 설교마다 그것이 유일한 설교인 것처럼 준비하되, 연속된 설교의 일부분이라는 사실도 기억하라. 지난 번 설교를 못 들은 방문객이나. 들었지만 그 내용을 잊어버린 교인들을 고려하라. 배운 것을 회중이 모두 기억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그러나 동시에 다시 살펴보고 환기시키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고 말라.
"지난주에 우리가····을 생각해 보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하는 목사는 대부분의 회중이 자기 말을 비켜가기를 요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방문객들은 지난주의 설교를 듣지 않았고 교인들은 그 내용을 대부분 잊어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매 설교마다 신선한 도입 방법을 사용하라. 일단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면, 메시지를
설교 계획표속의 다른 설교들과 관련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지난 번 설교의 내용을 자유롭게 사용하라. 항상 참고 문헌을 명시할 필요는 없다. 설교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난번 내용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어야 하며, 그들은 그렇게 해주는 것을 고맙게 여길 것이다.
서론을 지난 번 설교와 결합시켜선 안되는 것처럼, 결론을 다음 설교와 결합시켜도 안된다. 다음 번 메시지를 시금 설교할 특권은 없다.
18. 개개인에게 설교하라
교회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무슨 일이 되게 하는 것은 교회의 각 개인들이다.
효과적인 이야기는 모두 개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를 들은 어떤 소녀가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스펄젼 선생님이 ''저''에게 말하는 거예요?" 당신의 설교를 들은 사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가 항상 2인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가끔 "우리"나 "교회"라는 말을(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신자들"과 같은 다른 동의어를)사용해도 상관없다. 만일 각 개인들을 - 대표적인 필요를 지닌, 회중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 염두에 두고 준비한다면 개인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말씀을 설교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19. 교리, 의무, 헌신을 결코 분리시키지 말라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기만 하고 개인적, 실제적 적용이 없는 설교는 신학 강의에 지나지 않는다. 동시에 교리에 근거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만을 권면하고 격려하는 설교는 기껏해야 종교 선전밖에 안된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훈훈하게"만 하고 교리적 기초나 실제적인 적용이 없는 "헌신의 설교"는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설교자는 마음(헌신)과 정신(교리)과 의지(의무)를 겨냥해야 한다. 필립스 브룩스는 "진리의 자녀가 아니면서 의무의 아버지가 되는 감정은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라"고 말했다. 바울 서신을 보면 대부분 교리와 의무 사이에 균형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교리-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근거하지 않은 의무는 짐이 되며, 의무와 연결되지 않은 교리는 애매하고 직접적이지 못하다.
지식(교리)과 생활(의무) 사이의 다리는 사랑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0. 포사이드(P.T.Forsythe)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을 주실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라"고 말했다.
바울이 어떻게 교리와 의무를 연결시켰는지를 주목하라.
의무 교리
베푸는 일 하나님의 은혜 - 고리도후서 8:1-9
용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 - 에베소서 4:32
진실을 말하라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 - 에베소서 4:25
사랑 안에서 행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에베소서 5:1,2
서로 받아들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셨다 - 로마서 15:7
서로 판단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시다 - 로마서 14:1-1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 즉 모든 진리를 그 분의 인격과 사역에 관련시키는 것이다. 효과적인 설교는 구세주를 모든 것보다 가장 뛰어나게 하는 설교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메시지 내용에 그치지 않고, 그것의 동기가 되신다.
20.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하라
사랑은 진리를 구미(口味)에 맞는 것으로 만들며, 진리는 사랑이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한다. 사랑 없는 진리는 잔인한 것이라서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으며, 진리 없는 사랑은 진실치 못한 것이라서 역시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다. 진리 없는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며 책임감이 없는 감정이다. 사랑 없는 진리는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무력하며, 진리 없는 사랑은 그릇된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설교자가 진리를 사랑하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자신이 사역하는 사람들도 사랑해야 한다.
"설교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설교는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설교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