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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교수
V. 영원과 시간 속에서 "다시 나타남"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다시 나타남', 즉 그의 부활 현현은 목격자들의 시각적 감지능력(Wahrnehmensfähigkeit)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일어났다. 예를 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의 파장을 포함하여 적외선과 자외선의 파장 속에서 볼 수 있는 차원에서 현현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누가복음 24장 16절은, 예수가 만나 그들과 함께 걸어갔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 관하여 보고하는 진술이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그들이 그(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다음 - 가장 드라마적으로 부활하신 분의 인식과 동시에 살아짐이 분명하게 진술되고 있다 - 누가복음 24장 31절은, 예수가 빵을 떼신 이후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고", 그리고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인식하게 된 것을 보고하고 있다. 그 다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체험한 것에 관하여 얘기할 때, 또 다시 부활한 예수의 현현사건이 발생한다. 누가복음 24장 36절 이하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하니 저희가 무서워하여 생각하기를, 저희들이 영(靈)을 보았다 생각하더라." 이러한 진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목격자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대상의 실재에 대하여는 회의하지만, 예수의 부활 현현 그 자체를 회의하지는 않았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부활한 예수의 현현 그 자체는 역사적 사실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대상이 구체적인 몸을 지닌 존재냐, 아니면 환영(幻影)이냐 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의 '다시 나타남'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아나로기적(analogisch)으로 실증(實證)해 주는 한 사건이 이미 예수의 지상 생애 가운데 일어났고, 예수의 제자들도 이미 그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목격하였다. 그 사건은 바로 예수의 변모 사건이다. 변화산에서 예수는 이미 죽은 모세(Mose)와 엘리야(Elia)와 만나 대화를 나눈다. 이 사건을 제 삼자(三者)인 예수의 제자들이 목격한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화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 17:1-3, 병행. 막 9:2-9, 참고. 벧후 1:17-18). 이 사건이 기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아와 예수는 동일한 시-공간 속에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도 동일한 시-공간 안에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두 개의 차원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변모한 예수는 그 당시 초월의 세계와 이 지상의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변모한 예수는 영원과 시간,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의 만남 속에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이 암시하는 바는, 예수의 지상 생애 가운데 이미 예수의 부활 현현이 - 곧 예수가 부활하여 육체적으로 다시 나타남을 - 앞당겨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한 예수의 현현은 변화산에서 변모한 예수의 육체의 현현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가 나타난 시-공간은 바로 변화산에서 일어난 그 사건의 시-공간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한 예수의 모습을 그의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것은 예수가 부활하여 나타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을 목격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예수의 부활체, 곧 몸은 변화산에서 변모한 바로 그러한 몸이며,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최초 목격자들의 시각적 감지(感知)는 곧 변화산에서 목격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시는 예수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현현의 시-공간도 바로 변모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시-공간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나타남'으로서의 예수 부활의 의미가 부활보고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전환을 하고 있음(막 16:16)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그는 다른 모양(Gestalt)으로 계시하셨다." 마가복음 16장 14절은 탁자에 앉아있는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에 관하여 보고하고 있다. 이때에 이러한 사건의 경이로움과 직접성이 강조되고 있다. 마가복음 16장 11절과 16장 13절에서 분명하게 반복되듯이, 부활하신 분의 현존에 관한 첫번째 증언들이 그 어떠한 신뢰도 받지 못했다는 바로 이 점이, 예수의 부활은 인간 이성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반증(反證)해 준다. 따라서 예수 부활의 사건은 일종에 계시사건(Offenbarungsgeschehen)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17절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서 신을 벗은 모세처럼, 부활하신 분을 목격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께 경배하였다고, 분명하게 증언한다. 그렇지만 "그러나 몇몇 사람은 의심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경배한 후에 의심이 뒤따랐다"는 것은 그 현현이 인간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라는 것을 오히려 반증해 준다.
예수의 부활, 곧 '다시 나타남'의 특징은 공관복음서 보다 요한복음에 의해서 더 강하게 강조된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 의하면 부활하신 분은,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을 알아보았을 때, 그녀에게 몇 마디 말씀을 건네신다: "'나를 만지지 말라, 왜냐하면 나는 아직 아버지에게로 들리우지 않았다.'" 요한복음 20장 19절과 20장 26절은 강조하기를, "문이 닫혔을 때", 예수가 오셨고,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다고 한다. 이러한 보고들은 예수의 부활이 옛 육신(die alte Fleischkeit)으로 다시 되돌아 갔다는 환생(還生)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보고들은 예수가 옛 육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 - 더 자세히 말하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고전 15:49) - 으로 부활하였다는 것을 증언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보고는 예수의 부활은 우리들의 시-공간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논증해 준다. 다시 말하면 옛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시-공간 안에 '다시 나타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우리들의 시-공간 안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현현에 상응하고, 하나님의 인간되심에 상응하고, 더 나아가 시-공간 안에서 하늘나라의 존재로 변모한 변화산에서의 예수의 모습에 상응한다. 그래서 이 본문들 속에서는 다음의 사실이 아주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다: 즉 부활하신 분의 현존은 특별한 성질(Qualität)을 갖고 있고, 참으로 예수는 육신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 부활의 사실을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이며, 그 확신은 신앙고백으로 발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초의 목격자들은 부활하신 분과 만남을 분명히 가졌고, 그의 부활은 현현(顯現), 곧 '다시 나타남'이라는 양태를 가지고 일어났다. 그래서 최초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고백은 예수의 부활 현현(顯現)이라는 확실한 경험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현현과 저희들의 목격은 단지 표상(Vorstellung)이나, 형상화(Imaginationen) 그리고 환상(Phantastereien)으로 교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나타남'에 대한 증언은 일종의 사건기술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자연적인 것, 명백한 것 그리고 경험한 사실에 관한 특징(Züge)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부활하신 분은 여러가지 다양한 현현(나타남) 속에서 인간들에 의해서 만나지고, 여러 제자들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시고, 심지어는 마치 천사처럼 닫혀진 문을 넘어서까지 나타나신다. 그렇지만 그 분은, 그의 화육(Inkarnation)이 그러했듯이, 우리와 똑같이 자연적이며, 지상적 육신을 입은 실존적 존재의 모습 속에 계셨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하나의 현현, 곧 우리의 현실 속에 있는, 그러한 나타남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의 삶은 다른 인간들을 위로하는데서, 그들을 바로 세우는데서, 그들을 보내는 삶으로 수행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현실적 현현(나타남)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 현현 그 자체는 사람들을 견고케 하는 일, 사람들을 모으는 일, 그들에게 의무를 부여하는 일, 그들을 소명하고 보내는 일로서 - 곧 성령(聖靈)의 사역 속에서 - 계속되어지고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의 다시 나타남이 지상적이고, 역사적이고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최초 목격자에 의한 경험과 그들의 고백(告白)이 단지 성서적 증언과의 일치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활의 사실(Sache) 때문에, 부활하신 분은 오늘도 지상에 현현(나타남)하고 계신다는 것이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예수의 부활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자기현존(Selbstvergegenwärtigung)에 상응하는 역사 내적인 실제적인 현존이다.
VI. 부활체에 대한 육(肉)과 영(靈)의 인간학적 전거 -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몸
썩어 흙이 되어버린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구약성서적 전거는 에스겔 37장 1-14절에서 발견된다. 이 구절은 부활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부활의 창조적 과정을 제시해 준다. 우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듯이, 죽은자의 부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代言)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겔 37:7).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마른 뼈에 생기(生氣)가 들어가는 구체적인 부활체 형성 과정이 이루어진다:
"인자야 너는 생기(生氣)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生氣)야 사방(四方)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死亡)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 "(겔 37:9-10).
이와 같이 물질(Material)에 - 더 자세히 말하면 마른 뼈에 혹은 "사망(死亡)을 당한 자"에 -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생명체를 만드는 부활의 과정은 최초 인간 창조의 과정에 상응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창 2:7). 이와 같이 최초 인간 창조나 죽은자의 부활은 물질에 - 더 자세히 말하면 흙(ࠄࠍࠃࠀ)에 -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감으로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다. 이러한 증언은 육(肉)과 혼(魂) 혹은 영(靈)이 인간의 존재론적 요소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동시에 이러한 증언은, 부활은 새 창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이와 비슷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날 유대인의 관원(官員)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6). 이 말씀 가운데 성령을 예수는 "바람(Քש ՐՍՅՌՁ)"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이 "바람"은 에스겔 37장 9절에서는 "생기(生氣)"로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에스겔 37장 9절에 의하면 생기(生氣)가 '사방으로부터 불어왔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거듭남(ՁՍՙՈՅՍ)"(요 3:3, 7) 혹은 '다시 태어남'을 니고데모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에스겔 선지자도 생기로 인하여 '다시 살아남' 곧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서는데 ... "(겔 37:10). 이러한 유비적(analogisch)인 비교는 - 그 타당성의 진위는 차치하고라도 - 부활의 가능성이 신-구약성서에 이미 예증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데 충분하다. 그리고 이러한 본문들은, 부활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역사적 현실성을 제시해 주는 본문들이다. 이렇듯 예수 부활의 역사적 현실성이 예수 부활 이전에, 즉 구약과 예수 자신의 증언 중에 이미 언급되고 있다면, 예수의 부활은 결코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산물이 아님이 현실적으로 명백하다. 왜냐하면 몇몇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전히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창작의 산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부활이 환생이 아니라는 것을 니고데모의 오해가 역설적으로 반증해 준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요 3:3)을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는 것"(요 3:4)으로 해석하였다. 이 말은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다시 이 시-공간 안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환생의 차원에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 뱃 속으로 들어갔다가 육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때에 예수는 "거듭남"을 성령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요 3:5-6). 그리고 이어서 그 "거듭남"은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곧 "위로부터"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여기서 예수는 "육"이라는 차안(此岸) 적인 것과 "영"이라는 피안(彼岸) 적인 것의 만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인간의 지상적 존재 양식인 "육"과 신적 존재 양식인 "영"의 결합을 이야기 하고 있다. 왜냐하면 불트만(R. Bultmann)에 의하면 "'육'은 차안적이며, 인간적인 존재 양식을, '영'은 피안적이며, 신적인 존재 양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두 영역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세례받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영역에 살고 계셨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예수 부활체의 존재는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여 존재한 영역은 차안과 피안이 만난 영역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나 죽으자 가운데서 부활한 자는 존재론적으로는 "영"과 "육"의 결합체로 존재하고, 그가 존재하는 영역은 "차안"가 "피안"의 만남 속에 있다.
VII. 부활하신 분의 시-공간은 천사의 시-공간과 같다
앞 장에서 논증한 것에 근거할 때 부활하신 분은 지상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남 내지 현현"이라는 양식으로 감지된다. 왜냐하면 부활한 그 분은 현실 속에 계시면서, 자연적-지상적 현실보다도 더 풍부하고 복잡한 영적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적 세계에 비하여 부활한 자의 지상적 삶은 축소된 것으로 성서 속에서 진술된다. 부활하신 분 자신이 현현으로 현존하고, 혹은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 분은 단지 시-공간(時-空間) 속에 있는 한 장소에 그리고 지상적-자연적 실존의 조건에 매이지 않으신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부활한 예수가 자기 자신을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Gestalt)로 계시하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는, 문이 닫혀있건 닫혀있지 않건 간에, 제자들 가운데 자유롭게 나타나신다. 동시에 부활하신 그 분은 상처입은 흔적과 못박힌 흔적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현실적 존재로 인식된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부활 고지들(Ankündigungen)의 성취 속에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인식되어진다. 따라서 예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은 결코 만용적 왜곡과 환상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자기 삶의 정체성(Identität)을 제자들에게 명백히 계시한 것이다. 죽었던 예수가 부활하여 다시 나타나심으로서, 그 분의 지상적 삶이 보다 참되고 생동적인 방법으로 인식되어지고, 유효하게 되어진 것이다. 특히 부활한 예수가 우리들의 시-공간 안에 다시 나타남으로서 이 지상적 시-공간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역사적 기억공간(Erinnerungsraum)이 되고, 그가 다시 사라짐으로서 영적 초월적 세계는 우리들이 미래에 기다리는 기대공간(Erwartungsraum)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부활한 예수가 나타난 시-공간은 천사(天使: Engel)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바로 그러한 시-공간이다.
따라서 부활하신 분의 "높여지심(Erhöhung)"이라는 표현은 '지상적 나타남'이라는 약간은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상대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로 높여짐'이라는 자연적인 표상은 '영적인' 혹은 '위로'라는 질적 표상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높여지심"을 단순히 자연적 혹은 공간적 차원에서 저 높은 하늘로 '올가갔다'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가 부활하여 하늘로 들리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능력과 힘이 모아진, 그리고 동시에 현재도 그 힘이 있는 하나의 영역으로 들어가신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하늘은 우리들의 모든 경험 세계들과,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크고 작은 폭넓은 표상들을, 그리고 현실에 대한 우리들의 개념들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분명 하나의 현실의 영역이다. 그 영역은 우리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교통될 수 없는 영역이다. 그 영역을 우리는 거의 조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영역은 분명히 이 지상 위에서 아주 결정적으로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성서 전승의 증언에 의하면, 하늘에는 자연의 힘과 능력이, 사회적 영역의 힘과 능력이, 그리고 역사, 곧 과거와 미래의 힘과 능력이 군집되어 있다. 예수가 부활 승천하였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가 바로 이러한 영역(현실)으로 들려 올리우심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이 구체적이고 상대적인 세계, 구체적인 시간, 구체적인 문화의 한계와 제한을 받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구체적인 세계 속에 사멸되지 않고 살아계신다. 다시 말해서 부활한 예수는 이 시-공간 속에서 사역하시면서 동시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의 세계에 계신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역사 속에 현존해 계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부활한 예수 자신의 역사적 현실에 의해서 증명되고 인식되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