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교수 (현 연세대학교 교수)

I. 성서해석이 언어에 대한 개념 해석인가?
II. '말(Wort)' 혹은 '언어(Sprache)'의 인격적 주체성
III. 말씀의 인격성과 삼위일체적 통일성
IV.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 속에 있는 신적 소리(Stimme)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V.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내적 내용으로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감자와 해석자로서의 하나님의 영
VI. 말씀의 구술 내지 다독(多讀)으로서의 영-그리스도론적 말씀 해석

I. 성서해석이 언어에 대한 개념 해석인가?

신-구약 성서 신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성서에 대한 해석은 성서에 기록된 언어들에 대한 연구로 점철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성서에 대한 해석은 언어 및 개념연구로 전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성서해석 방법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요소를 - 곧 '언어'와 '개념' 내지는 기표(記標)와 기의(記意)를 - 구분하지 않고 단지 언어학적 차원에서 성서의 모든 언어들을 분석하는데 제한시켰다. 예컨대 바르(James Barr)는 성서 해석에 있어서 언어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주석학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비르켈란트(Harris Birkeland) 같은 언어학자는 성서의 음운론(音韻論) 연구와, 히브리어 본문들의 연령 연구를 통하여, 구약성서의 자료들이 구전(口傳)인가 아니면 문서(文書)인가를 밝혀내려고 하였다. 특히 바르는 "전통적(traditional), 철학적 (그리고 물론 신학적) 신앙이 언어적 현상들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르(Barr)는 독일의 훔볼트(Humboldt), 미국의 사피어(Sapir)와 보오프(Whof) 그리고 프랑스의 마뜨르(Georges Matoré) 같은 언어철학자들을 거부한다. 그는 성서 해석을 언어학적으로 접근하여 언어의 "개념"이라는 말을 거부하고자 시도하였다. 다시 말해서 언어에는 "개념"은 없고, 단지 "말 혹은 단어", 곧 기표(記標)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신약성서 사전,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을 실패작이라고까지 악평하였다. 왜냐하면 "이 책의 필자들은 일반적으로 '낱말'로 불리어지는 언어 단위를 생각하면서 '개념'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바르는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르의 주장은 성서 해석학을 단지 언어학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는, 동일한 '낱말'이라고 하더라도 사유방식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동일한 성서의 언어에서도 히브리적 사유방식과 그리이스적 사유방식은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적 사유방식이 윤리적이며 종교적이라면, 그리이스적 사유방식은 심리학적이고 인식론적이다. 그래서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히브리서 11장 1절이하를 히브리적 신앙과 그리이스적 신앙의 차이를 분석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즉 히브리서 11장 1절이하에서는 오고 있는 히브리적 축복에 대한 신앙과 불가시적이고 피안적인 그리이스적 축복에 대한 신앙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유대인들은 과거의 신앙을 토대로 해서 행동적인 신으로부터 기적을 요구하였고, 그리이스인들은 자신들 안에 근거를 둔 이성의 근거들을 요구하고 있다(고전 1:22하).
따라서 아래에서 우리는 오늘의 성서 해석학이 단지 "낱말" 혹은 "개념" 해석에 제한되어 있는 것에서 벗어나 언어를 통하여 기술되고 있는 사건(Geschehen) 혹은 사건의 내용(Inhalt)을 히브리 혹은 그리이스적 사유방식에 근거해서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성서 해석학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성서에 나타난 사건에 대한 기술은 단순히 사건발생(Ereignis)에 대한 기록 그 자체나, 진술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의 주체(Subjekt)가 누구(Wer)인가를 증언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더 나아가 본 논문은 "낱말"이나 "개념" 해석에 국한되어 있는 현대 성서해석학을 넘어서, 창조적 언어의 주체, 곧 기술되고 있는 사건의 주체를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해하는 새로운 "영-그리스도론적 해석학(Pneuma-christologische Hermeneutik)"의 기초를 놓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II 장에서는 히브리적 사유 속에 담겨진 '언어(Sprache)' 곧 '말(Wort bzw. Rede)'의 인격적 주체에 관하여, 그리고 III 장에서는 하나님 말씀의 인격성과 삼위일체론적 통일성에 관하여, IV 장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 속에 있는 신적 소리(Stimme)에 관하여, V 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내적 내용으로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해석자로서의 하나님의 영에 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VI 장에서는 말씀의 구술 내지 다독(多讀)으로서의 영-그리스도론적 말씀 해석 방법에 관하여 약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21세기를 직면한 성서해석학이 어떠한 모형교체(Paradigmawechsel)을 해야하는지 인식하게 될 것이다.

II. '말(Wort)' 혹은 '언어(Sprache)'의 인격적 주체성

앗시리아, 바빌론, 이집트 그리고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 전역에서 "말"은 - 특히 신의 말 - 단순히 사상의 표현, 곧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말의 역동성은 마르둑-엘릴(Marduk-Ellil) 신에게 행한 긴 기도문의 몇 개의 호소문들에 잘 나타나 있다:

"v. 3 : 번개같이 사라지는 그의 말 ...
v. 12/13 : 위로는 하늘을 갈기 갈기 찢는 말.
v. 14/15 : 아래로는 땅을 뒤흔드는 말.
v. 20/21 : 그의 말은 막을 수 없게 돌진하여 오는 홍수이다.
v. 24/15 : 그의 말은 갈대처럼 어미와 어린아이를 함께 죽인다.
v. 32/33 : 마르둑의 말은 둑을 무너뜨리는 범람(氾濫)이다
v. 34/35 : 그의 말은 큰 나무를 꺾는다.
v. 36/37 : 그의 말은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폭풍이다.
v. 60/61 : 그의 말은 조용히 걸어올 때면 대지를 파괴한다."

이렇듯 앗시리아와 바빌론 사람들은, 신(神)의 말은 물리적-우주적 세력을 그 속에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신(神)의 말은 이스라엘에서도 분명히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는 역동적(力動的)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 이것은 불과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망치 같지 아니하냐?"(렘 23:29). 특별히 야웨의 음성(音聲, Stimme)은 자연에 작용을 일으키는 힘으로 묘사되었다: "야웨가 시온으로부터 부르짖으며, 예루살렘으로부터 그의 음성을 울려 퍼지게 하여, 목자들의 초장들을 시들게 하고 갈멜산 꼭대기를 메마르게 한다"(암 1:2). 신약성서도, 하나님 말씀은 운동력(Aktivität) 내지 창조성(Kreativität)을 가지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左右)에 날선 어떤 검(劍)보다도 예리하여 혼(魂)과 영(靈)과 및 골수(骨髓)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 안될 것은, 야웨의 '말'은 그 자체로서 자연적인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야웨의 말은, 그 말이 '구술'될 때 창조적 힘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스라엘에서 말은 이사야 55장 10-11절을 제외하고는 단순한 사유(思惟)형식이 아니라, 정신적인(geistlich) 요소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 55장 6절에서 13절까지를 단숨에 읽으면, 여기서 우리는 '구술된 말(ausgesprochenes Wort)'의 주체인 야웨를 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즉 야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어떤 유동적인 혹은 에테르적(äther)적 본질(Wesen)이 아니라, 실제적인 구술(aussprechen)이며, 말의 '구술'을 통하여 우리는 구술된 '말'의 주체를 인격적으로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서 9장 8절에서도 야웨의 '말'은 어떤 유동적(流動的) 본체(Substanz)가 아니라, 구술된 '예언', 곧 '예언적 말'이다. '구술된 말'이라는 것은, 그 말의 주체, 곧 말하는 자(Sprecher)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성서에서 신의 '말(dabar)'은, 뒤르(Dürr)에 의하면, "신의 산물, 이른바 '말' 안에 구체적으로 있는 신의 일부분이고, 그런 것으로 신의 성품과 힘에도 참여한다." 그래서 그는 이사야 9장 8절에 있는 '말'을 "그 힘이 해방을 일으키고 어떤 저항을 이겨내는 잠재력을 지닌 분자(分子)"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구술된 예언자의 말'은 백성을 책망하는 중압으로 꽉 차있는 "에테르"로 서술되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구약성서에서 '구술된 말'은 인격적, 윤리적 행위의 결단을 일으키든지, 혹은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다. 예컨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가 구약성서에 있는 '말씀(Wort)'을 풀어주었을 때에,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4). 이러한 근거에서 구약성서에서 '구술된 말'은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증언 속에서 '구술된 말'의 창조성은 우선 요한복음 1장 1절이하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2:1-2). 태초의 '구술된 야웨의 말'의 창조성과 예수의 말의 창조성의 유사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보고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구술된 말'은, 때로는 창조주 야웨 그 자신을 가리킨다. 더 자세히 말하면 '야웨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기사에서 '야웨께서 말씀하셨다'와 '야웨께서 만드셨다'를 반복해서 병행하여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1,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 1:6-7).

여기서 하나님의 '구술된 말', 곧 "가라사대"는 곧 바로 "창조", 혹은 "만드사"로 바꾸어 쓰여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술된 말'은 곧 '창조적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 곧 구술하는 자(Aussprecher)와 만드는 자(Macher) 내지 창조자(Schöpfer)는 동일한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의 말은 "창조의 매개체로서의 말(Sermo operatiorius)"가 아니라, 창조주 그 자신의 출현(Erscheinung)이다. 이 점을 우리는 시편 33편 6절이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여기서는 표현의 태(態)가 수동태(Passiv)로 되어있을 뿐이다: "하늘은 야웨의 말로 만들어졌고, 그 모든 천체(天體)가 그의 입김으로 만들어 졌도다"(시 33:6). 이를 능동태(Aktiv)로 바꾸어 쓰면 다음과 같다: 야웨가 '하늘과 그 모든 천체가 생겨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늘과 그 모든 천체가 생겼다. 이러한 바꾸어 씀(Redewendung)의 가능성을 그 다음 이어지는 9절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어 졌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구술된 말' 그 자체가 곧 야웨 하나님 자신의 출현을 가리킨다는 것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에 대한 증언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4:17; 17:5).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사도 바울에 대한 부활한 예수의 부름 속에서도 일어난다: "땅에 엎드려 들으매, 소리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城)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자들이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행 9:4-6).
이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 곧 '다바르(dabar)'는 야웨의 본질을 알리며, 하나님의 한 부분, 출현 혹은 그의 실체(實體) 이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바르'는 야웨의 출현(顯現)양식이다. 다시 말해서 야웨의 말은 하나님의 자기계시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신의 의지표현(Willensausdruck)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성서에 증언되고 있는 야웨의 말은 하나님의 '명령'(렘 32:6, 8), 혹은 '약속'(왕상 2:4), '위협'(왕상 12:15), 또는 '계명'(시 50:7)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야웨의 말은 예언자들에게 임했다(렘 1:4,11; 2:1; 13:8; 겔 3:16; 6:1 등등).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성서에서 '다바르'는 '말' 뿐만 아니라, '행위'도 가리킨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에게 그가 행한 모든 '말들(일들, dabar)'을 전했다"(창 24:66); "솔로몬의 남은 행적 혹은 사적(事蹟)과 무릇 저의 행한 일(dabar)과 그 지혜는 솔로몬의 행장(行狀, 책; 필자 주)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 11:41). 여기서 우리는 구약성서가 솔로몬의 '말'과 솔로몬의 '행위' 혹은 '행동'을 구별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말'은 말하는 자의 '행위'와 동일하다. 즉 '말'과 '행위'는 '다바르'의 두 가지 의미이다. 따라서 '행위'는 '다바르'에 들어있는 기본 의미의 귀결이다. 왜냐하면 '말'만하고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것은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인격은 말과 행위가 일치한다.' 따라서 '다바르'는 행위의 말(Tatwort, Tunwort)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 속에서 괴테(Goethe)는 [파우스트(Faust)]의 악령(惡靈: Bösergeist)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요한복음 1장 1절을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야웨의 '말', 곧 '다바르'는 역동적 인격성을 갖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자기대화(Selbstgespäche)는: "여호와께서 ... 그 심중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창 8:21) 하나님의 '스스로 계심' -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 을 증언해 준다고 볼 수 있다.


III. 말씀의 인격성과 삼위일체적 통일성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일찌기 "성서는 한 신성 안에 한 분 이상이 있음을 가르친다"고 말하였다. 이 말이 암시하는 바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적 실체(Hypostase)이며, 그 인격은 결코 하나가 아님을 뜻한다. 이러한 암시를 우리는 이미 창세기에서 얻을 수 있다. 창세기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분(Aussprecher)>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 그래서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하나의 인격(人格)으로 표현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계속해서 요한복음은 이 말씀이 구체적인 한 역사적 인격(인간), 즉 보고, 만질 수 있는 한 인간 나사렛 예수 속에서 화육(化肉)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요 1:14). 그리고 오순절 사건의 보고에 의하면 성령은 곧 <말씀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비. 욜 2:28-32).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성령은 <말씀하시는 인격>이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가 신앙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말씀의 인격 이외에 다른 분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실재하는 분이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그 말씀>이 육신을 입은 <화육된 말씀>이시고, 성령 하나님은 사도들과 설교자들의 입, 그리고 복음 전도자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계시는 말씀>이다(참. 마 10:19 병. 막 10:11).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 문중 앞에서 그리고 백성과 관원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한다(참. 행 4:6이하). 그래서 칼 바르트(K. Barth)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형태를 갖는다고 말한다. 즉 "선포된 말씀" - 이는 사도와 설교자의 복음 선포를 뜻한다, "기록된 말씀" - 이는 성서를 가리킨다. 그리고 "화육된 말씀" -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뜻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는, 언어학에서 말하는 단순한 "기표" - 개념을 나타내거나,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 그 이상의 뜻을 갖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기호(記票, Zeichen)나 소리(Stimme)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 실체(實體, Hypostase)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말씀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전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그 말씀에 대한 기록인 성서를 떠나서는 결코 바로 이해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격으로서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과 "예배 때 선포되고 있는 설교자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바로 인식될 수 없다.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인격성은 말씀의 삼위일체적 통일성 속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하나님 말씀의 삼위일체적 통일성은 다음과 같은 증언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성령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한 말을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4-25).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의 말씀은 동일한 하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은 아들 성자의 말씀이자 곧 성부의 말씀이다: "내 말이(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그 당시 제자들이 들은) 말씀이다.
셋째, 성령의 말씀은 성령 자신의 말씀이자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 내가 한 말을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리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 그가 ...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여기서 예수님은, 성령의 말이 곧 자신의 말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이것을 오늘날의 상황에 맞추어 설명하면, 우리가 설교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서 듣는 성령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은 곧 말씀하시는 영(靈)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성부 아버지의 말씀은 곧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령의 말씀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성령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야훼 하나님) 나의 법(계약의 말씀)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4);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말)를 행하게 하리니 ..."(겔 36:27). 이러한 증언을 근거로 이제 다음과 같이 계발적인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삼위일체론적인 통일성(Einheit)을 갖는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다른 양태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일치성(Identität)과 연관성(Zusammenhang)을 갖고 있다.


IV.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 속에 있는 신적 소리(Stimme)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역사는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대화적(dialogisch) 약속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독백적인(monologisch) 약속으로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약속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추측컨대 아브라함에게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문자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성(phonetisch)으로 혹은 소리(stimmlich)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우리가 하나님과 특정한 인간 사이의 구약성서적 대화(Dialog) 혹은 만남(Begegnung)을 주목하면 명백해 질 것이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는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있었던 하나의 대화가 있다.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세가 자신의 목전에서 은총을 받게 될 것임을 확고히 전하고 있다. 이 때 모세는 그 증거로 다음과 같이 간청한다: "나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출 33:17ff.).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너는 나의 얼굴은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본 어떠한 사람도 생명을 부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출 33:20). 이 대화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단지 말씀(in Wort)으로, 곧 화자(話者)로 현현하신다. 그러나 또한 구약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말건넴(Anrede)은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현현으로 자주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모세의 간구는 연속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난 언어(verbaler)적 계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엇 보다도 이러한 연관성 속에서 모세의 불타는 가시덤불이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는 이 불타는 가시덤불로부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전달받았기 때문이고, 그리고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건네심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현현에 상응하여 응답하였기 때문이다. 가시덤불의 불 속에서 하나님의 말건네심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 ...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4b).
구약성서의 일반적인 추세에 비슷하게 하나님의 증언은 나중에 호렙산 위에 있는 엘리야 앞에서 - 모세처럼 - 일어난다. 이 때에 엘리야는 자신의 파송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경험은 신과 인간의 대화로 이루어졌다(참. 왕상 19:11f.): "...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참. 왕상 19:9b). 엘리야는 바람의 속삭이는 소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 여기에서 바람의 속삭이는 소리는 자연현상으로부터 언어로 이행되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 여기서 더 이상 논의할 여지없이 분명해진 것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께서 자연적으로 행하는 모든 선포는 결국에는 기호의 특성(Zeichencharakter)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는 문자(Schrift) 내지 말(Wort)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항상 현상(Phänomen)이 되든지, 아니면 현상으로부터 생성되었다.
세상 속에서 일어난 신적 소리의 영역에 대한 확장된 구약성서의 기술(Beschreibung)은 에스겔1장 1절이하에서도 여전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한 기술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맺는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겔 2:1-2).

이러한 공적이고 자연적인 하나님의 현현 내지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말걸음(Anrede)'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말걸음' 속에서, '대화상황(Dialogsituation)' 속에서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만남'의 형식 속에서 주어진다. 이러한 진술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즉 성령은 신적 소리 속에 존재하고, 성령의 형태는 말씀이 되고, 성령의 능력(Energie)은 말씀을 담지하고 있는 숨(Hauch)이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영적으로 형성된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에게는 그의 육체를 묘사하는 그 어떠한 형상도 타당하지 않다. 지금까지 연구된 구약성서의 진술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인간은 신적 소리(göttliche Stimme)를 들을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신적 소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 속에서 혹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수용되어지고 새롭게 활용되어진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녀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0-11). 이 진술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연적이고 영적인 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적인 언설(Rede)과 유사한 현상을 우리는 오순절 사건 속에서 경험한다. 그 때에 신적인 소리가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상이하고 다양한 그러나 구체적인 각 나라의 말로 혹은 방언으로 주어졌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2-4)."

이러한 사건을 벨커(M. Welker)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능력있고, 공개적이며 놀랄만한 경험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행 2:2)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그 바람은 각기 서로 다른 언어로 이해되어진 '신적 소리'(행 2:6)로 명명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종과 여종들은 성령의 부어주심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발음(aussprechen)할 수 있었다. 성령의 부어주심에 의한 방언(Zungenreden bzw. Golossolalie), 내지는 성령의 부어주심의 문자화(Buchstabilisierung)과 같은 구술(Verbalisierung)에 야웨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들의 대언(Fürsprache)이 유형론적으로 상응한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감동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혹은 "야웨가 .... 말씀하셨다"라는 증언의 형식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언자적 증언양식(Redeweise)에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선포를 고려해 볼 때,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사도들의 선포양식이 상응한다: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b, 참. 막 13). 이러한 근거에서 다양한 자연의 현상들, 즉 지진, 폭풍 그리고 바람 속에서 들려온 영적 혹은 신적 음성(Stimme)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소리의 구술(Verbalisierung) 내지 철자화(Buchstabisierung)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리를 종이에 기록한 것이 바로 성서이다.
이제 여기서 요약하면, 성서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고, 인간과 함께 대화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인격적인 만남 속에 있으며, 그 만남은 대화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대화는 편성되었고, 성서 속에서 증언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는 영감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쓰기(Diktieren)라는 의미가 아니라, 구술로 가르침을 받는다(참. 요 14:26)는 것이고, 성령을 통하여 표현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성서의 저자는 각각의 성서적 문서의 저자가 아니라, 성서의 본문들에 자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신 하나님이 전체 성서의 유일한 저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의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해석에 새로운 주의를 기울여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신적이고 영적인 소리를 통해서 자연적인 현상 속에서 그리고 동시에 "세미한 음성으로 그리고 부드러운 '창발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V.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내적 내용으로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감자와 해석자로서의 하나님의 영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 철저하게 무의미한 언어적인 <기표>가 아니고, 성령의 부어주심의 능력의 장(場) 안에서 인식될 수 있는 영적인 <소리>라면, 이와 같은 말씀은 일차적으로 음성학적(phonetisch)이고 현상학적(phänomenologisch)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모든 단어나 문장이 그 어떤 인격에 의해서 발설될 때, 그 단어와 문장의 고유한 음(音, Phon), 액센트, 리듬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적인 소리도 인간들에게 자연적인 현상 속에서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음, 액센트, 리듬을 갖고 들려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가 자연의 현상을 포함하여 그때 그때 영적 소리로 표현되어졌다면, 하나님의 말씀도 음성학적으로, 의미론적(semantisch)으로 그리고 인격적(persönlich)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들에게 항상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신적인 실체(Hypostase)의 영적 소리로 들려졌기 때문이고, 구체적인 한 인격을 통해서 구술(verbalisiert)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쓰여진 문서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 자체 안에 성서(die heilige Schrift)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영적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지, 필요충분 조건은 결코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영 자체가 성령충만한 능력의 장에서 인간들에게 음성적 소리로써 영감을 주고 있다(행 2:4; 요 14:24-26; 마 10:20 등)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음성학적, 의미론적, 인격적인 해석은 성서의 영-그리스도론적인 해석(die pneuma-christologische Interpretation der heiligen Schrift)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은 하나의 음성(Phon)과 소리(Stimme)로서 다양하고 상이한 언어 가운데서 들려졌다. 왜냐하면 언어는 문자화(Buchstabilisierung)에 따라서 음성과 소리로 형성되기 때문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하나의 구체적인 음성적 파동(phonetischen Wellezug)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파동을 가지고 있는 쏴쏴 거리는 소리(Brausen) 혹은 바람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영감을 받은 성서의 말씀도 음성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컴퓨터 프로그램은 인간의 소리를 문자화할 수 있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언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저자 뿐만 아니라 성서의 독자에게까지도 영감을 주는 성령의 도움을 받은 사람만이 성서 본문의 온전한 의미(Vollsinn)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영(롬 8:9; 고전 2:16; 15:45; 사 40:13)을 담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 즉 구약성서의 참다운 해석자이시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이 보고는,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성서의 해석자 뿐만 아니라, 성육신된 말씀으로서 성서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개개인의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고 있다면(롬 8:26; 참. 8:34), 그렇다면 살아있는 말씀으로서의 예수는 성서해석의 내용 및 대상이 된다. 그러나 성육신된 말씀은 이제 성서의 선포 속에 있는 성령의 증언 속에 살아 계시다. 그래서 루터는 구약성서를 그리스도의 증언(Christuszeugnis)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만"을 "오직 성서(sola scriptura)만"으로 해석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성서의 문자적 의미(literalsinn)인 반면에, 구약성서의 문자적인 의미는 역사적-비판적인 해석에 있어서 오로지 역사적 저술가들의 역사적인 보고들(Berichten) 내지는 전(全)-그리스도론적인 진술의도(Aussageabsicht)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의 중심이며, 성서의 해석은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성서의 본래적인 저자이신 성령의 도움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VI. 말씀의 구술 내지 다독(多讀)으로서의 영-그리스도론적 말씀 해석

이론의 여지가 없이 신학은 본문들과 혹은 해석학과 관계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성서의 본래의 저자인 한에서, 신학적 해석학과 철저히 관계되고, 배타적으로는 삼위일체되신 하나님론과 관계된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성서는 성령에 의해서 영감되었기 때문에, 성서는 영적으로 그리고 기독론적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오늘날 대학에서 영적인 주석이 단지 하나의 그늘진 곳으로 방치되어있다 할지라도, 영-그리스도론적인 성서해석의 원천은 이미 신약시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학적인 근거로서는 무엇 보다도 고린도후서 3장 6절에 나온 바울의 결론적이고 암시적인 진술이 제시되고 있다: "문자는 죽었다. 그러나 영은 살린다." 비록 바울이 도덕적인 율법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대립시킨다 할지라도, 문자와 영에 관한 그의 반명제는 이제 영-그리스도론적 성서해석의 해석학적인 법칙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문자 없이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알 수 없고, 문자에 근거하지 않고는 어떠한 영도 거룩한 영으로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없는 영의 사역(Wirken)은 모든 가능한 신비로운 능력이나 세력과 구별되지 않는다. 성령을 모든 가능한 영적인 것, 유령, 악마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바로 말씀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영-그리스도론적인 성서해석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말씀의 창조적인 능력 혹은 힘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영-그리스도론적인 성서해석의 해석학적인 요구는 성서본문의 일차적인 자기이해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실상 모든 성서의 본래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서본문의 자기관련성(Selbstbezüglichkeit)은 성서의 권위방식(Autoritätsausweis)을 확정하고, 성서의 본문에 해석학적인 근원성(Primordialität)을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루터는 이미 "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를 성서 해석학의 전제로서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역사-비판적 방법이 신-구약성서에 대한 개념-내용적(begriffsinhaltlich)인 통일성과 개혁을 주장함으로서, 역사-비판적 방법은 사실상 그 본연의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영-그리스도론적 성서해석은 본문의 심층적인 구조(Tiefenstruktur)에 정립되어 있으며, 바로 그 심층적 구조에서부터 본문형태적(textmorphologisch)이고 본문의미론적(textsemansiologisch) 자기관련성(Selbstbezüglichkeit)을 기독론적 하나님 언설(Gottesrede)의 권위있는 증명(Autoritätsausweis)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성서가 독자에 의해서 해독되어지기를 원하는 것처럼, 성서는 자기를 인식하도록 내어주기 때문이다. 성서해석의 영-그리스도론적인 방법은 부분적으로는 테오발트(Gerd Theobalds)의 "성서책-신학(Buch-Theologie)"에 접근하지만, 그렇지만 "성서책-신학"과 그대로 결코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의 선포 없이 그리고 성령의 도움 없이는 이미 죽은 문서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영-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충만한 능력의 장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말씀의 창조적인 능력에 기초해 있다. 왜냐하면 복음 그 자체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롬 1:6)이기 때문이고, 성서의 근원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적 소리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그 어떤 사람에 의해서 구술되어지거나 발설되어진다면, 그 말씀은 바빌론이나, 이집트, 그리고 앗시리아에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야웨 하나님 말씀의 창조적 능력은 예레미야 23장 29절; 아모스 1장 2절; 시편 33편 6절에서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와 상응하여 히브리서 4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고,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창조적인 능력은 성령을 통하여 영화(vergeistigen)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에 의한 성서의 영화(Vergeistigung)를 루박(Lubac)은 내면화(Verinnerlichung)로 해석하고 있다: "성령에 따라 말하는 사람은 내면성(Innerlichkeit)을 말한다." 그러므로 또한 성령의 사역 속에 있는 말씀의 창조적인 능력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새창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능력을 수용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 안에서 하나님에 관한 언급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없이는 인간은 자신들의 무능력과 자신들의 잘못된 자기확신에 빠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청취자(Adressat)는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순수한 영혼(Seelenteil)이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전인적인 인간의 삶의 근거가 되는 영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폰 라드(von Rad)가 "창조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 der Schöpfung)"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서의 영-그리스도론적인 해석에서 발견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적인 해석학(biblische Hermeneutik)은 성서를 설교하는데 봉사해야만 할 것이다.